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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따위 인간’과 ‘이 사람’

누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95 추천 수 0 2016.12.09 00: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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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8:9-14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6.6.28 

저 따위 인간’과 ‘이 사람’
눅18:9-14

바리세파 사람과 세리의 비유가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의 말씀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이 내용을 읽고 갖게 되는 오해는 두 경우입니다.

먼저 하나의 오해는 이것입니다. 두 가지의 기도를 대조하면서 어떤 기도가 잘하는 기도냐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처럼 웅얼웅얼 하지 말고 가슴을 치며 해야 한다든지, 자기 자랑을 하지 말고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기도를 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리의 기도가 받아들여졌다고 해야 했을 텐데 그런 말씀은 없고 ‘세리가 의롭다 인정을 받았다’고만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자세에 대한 말씀이아니라 ‘누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느냐’ 하는데 있는 겁니다.

두 번째 오해는 이 비유를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말한다고 이해하는 겁니다. 본문의 끝부분에 나오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하는 내용을 보고 그러는 것입니다. 앞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경우에서 약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누가가 복음서를 쓰면서 덧붙인 겁니다. 이 구절과 같은 내용들은 다른 곳에도 나옵니다.

눅14:11에, 잔치에 초정을 받아 윗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을 말할 때입니다.
마23:12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거만함을 지적하실 때도 비슷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구절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틀림이 없지만 그것이 본래 누가복음의 이 비유말씀에 있었다고 보기 보다는 누가가 이 비유를 겸손으로 이해하고 다른 곳에 있는 말씀을 이곳에 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기도의 자세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겸손해야 한다는 걸 가르치려는 게 아닙니다.

이 비유의 도입부를 보세요.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지요? 그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임은 물론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상상에서 시작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실제적인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 하는 물음을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는 기도는 상상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물론 과장이 될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세리들이 기도하는 중에 겸손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고 이 둘의 세력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이 전제입니다.

우리는 쉽게 바리새파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사실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살았기 때문에 존경받는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국회의원도 바리세인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예수가 비판했을 때 당시대의 사회나 사람들은 의아하게 여겼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바리새인을 비판한 겁니다. 반대로 세리는 누구에게나 지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 세금 징수권을 따내어 동족들에게 세금을 뜯어내는 집단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원수 같은 이들이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들만 세리를 미워한 게 아닌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존경받던 바리새인들을 비판하고 반대로 매국노 같은 세리들을 두둔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들 두 직업 간의 갈등에 관여하고 있는 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모든 민족들이 매국노로 치는 세리들을 두둔하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바리새인들과 모든 세리들을 문제시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몇몇(9절)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몇몇은 예수에게 뿐만 아니라 세리라는 직업을 매도하고 멸시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그들, 세리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무조건 매도당하는 소수의 약자들의 권리를 찾아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를 알아내야 하겠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몇몇 바리새인들이 어떤 인물들인지는 기도하는 모습에서 잘 나타나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감사 기도지만 내용상 자기 자랑이고 다른 사람을 헐뜯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자기가 다른 사람과 이러저런 것이 ‘다름’을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자기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이겁니다. 그들의 자기 행위는 칭찬은 못되어도 비난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름이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그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 이제 몇몇 바리새인이 세리들을 향해 ‘나는 저 세리들과 같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세리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실 이 손가락질이 어느 칼보다 무섭고 무자비하고 독한 것입니다. 손가락질을 하는 바리새파  사람의 손끝을 따라서 눈을 돌려보면 세리가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가 ‘멀찍이 서서’있었다는 것은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뒤에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13절은 그들이 그 위치에서 한 자세들입니다. 우리는 무슨 오해를 하는가 하면, 모든 세리들이 이렇게 기도했을까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리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들처럼 이렇게 뒤에 서서 기도하지도 않았고,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자였고 성전에서도 부자인 그들을 대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장소, 기도의 태도로 바리새인과 세리들이 갈등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세리들은 오만해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세리들은 특수한 사정이 있거나 세상에서 멸시받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서의 다른 곳에서 ‘세리와 죄인들’은 어떻게 쓰여 졌을까요? 마9:10-11, 막2:15, 눅5:30에서 이 용어들은 꼭 세리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멸시받는 사람들을 대표할 때]쓰고 있습니다. 특히 이 비유에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가장 멸시하는 게 세리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세리를 등장 시킨 것이지 꼭 세리라는 직업군을 의미에 두고 등장시킨 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읽으실 때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의 위치를 유의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 쪽에 가까이 있습니다. 그 사람 이야기를 먼저 하고 나서 세리 이야기를 합니다. 또 세리가 멀찍이 있었다고 하는 것도 바리새파 사람보다 예수가 더 멀리 있는 정황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마지막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선언합니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세인이 아니라 이 세리다.”(14절)

조금 전에 예수와 바리새인의 위치가 바꾸지 않습니까? 지금은 예수 곁에 누가 더 가까이 있는 겁니까? “저 바리새파 사람”과 “이 세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라는 말은 “저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이다”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바리새파 사람을 향해 ‘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고 세리(세상에서 멸시 받는 사람)를 향해 “이 사람”이라고 말하는 데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표현에서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것, 또는 사람들이 인정하고 기대하던 모든 것이 역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뒤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저 사람(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사람(세리)’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할 때, 의롭다고 인정한 주체는 하나님이지만, 이런 해석을 하는 주체는 예수님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다 합시다. 그런데 이게 그냥 하늘에서만 작동되는 추상적인 진리가 되면 이 역사 속에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하나님의 의로 우심을 따라 그 의를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 적용하는 존재가 등장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의를 해석하는 주체가 있으면 사람들은 변화해야 하고 변화의 힘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해석의 주체로 등장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해석의 핵심은 뭡니까? 세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겁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그 말에서 다 표현되지 않는 예수의 몸짓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분명히 ‘저 사람’과 ‘이 사람’을 대조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바로  바리새파 사람이 쓰는 인간 차별과 자기 우월의 방법입니다. 바리새파는 분리주의자들이니까요. 너는 나하고 다르고, 나는 너와 구별된다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이분법적 방식을 예수님이 바로 그들에게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저 사람’ 혹은 ‘이 세리’하고 지목하여 말하는 태도는 멸시하는 감정이 담겨 있으므로 ‘이 따위 인간’ 또는 ‘저 따위 인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는데, 이런 모멸적인 언어를 예수님은 정반대로 바꾸어 버립니다. 보이십니까?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살던 바로 그들 바리새인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저 사람’ 혹은 ‘저 따위 인간’이라고 하면서 거리를 두고, 세리를 향해서는 ‘이 사람’ 혹은 ‘이 분’이라고 하면서 친근감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이 비유는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는 ‘저 따위 인간’인지 아니면 ‘이 사람’인지를 묻는 것이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대할 때 모든 정황을 떠나 ‘이 사람’으로 대접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의롭다 하시는 삶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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