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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4: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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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4장 12, 13절: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신 것은 예수 당신도 ‘잡히면 죽을 것이다’ 하고 죽는 것이 무서워서 피해서 도망을 가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보내신 선지자를 죽이는 곳에는 주님이 가셔서 역사를 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소리노릇하기를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며 주님을 맞을 길을 닦아주러 왔는데 길 닦는 그 선지자를 마음속에서부터 죽여 없애 버렸는데 어떻게 주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역사를 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주님은 그 곳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내신 종은 선지자의 영의 가졌는데 주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가 되는 길을 열어주고, 궁극적 자신의 미래를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그 선지자를 죽인 것입니다.
어떻게 한 것이 자기에게 온 선지자를 죽인 것인가? 어떻게 한 것이 성령을 떠나게 한 것인가? 그 이치를 모르면 미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룰 구원을 모르면 미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주 성령님은 떠나 버렸는데 복음역사는 무슨 복음역사이며 무슨 성령역사입니까? 사람이 안 바꾸어지고, 사람이 안 만들어지는데 역사는 무슨 역사냐? 마귀의 역사이지!
4장 15, 16절: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스블론과 납달리는 구약 여호수아 때에 제비 뽑아 얻은 땅입니다. 그 후 북방 앗수르의 침입으로 노예로 잡혀가고 남아 있는 여자들과 이방인들과 같이 정주하게 되니 혼합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니 신앙사상적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다’
흑암에 앉아 놓으면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느냐, 인간 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을 알 수 있겠느냐? 그야말로 짐승의 본능처럼 살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인간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으로 모르고 먹고 마시고 자식 낳고 그렇게만 알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주님이 들어가니, 빛이 들어가니 흑암의 사람이 빛의 사람으로 만들어집니다.
‘사망의 땅에 사는 자들이 빛을 보았다’
사망은 죽은 것, 무감각, 무의식, 무활동입니다. 사망의 땅에 사는 것은 죽어 가는 자들이 사는 땅,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땅, 곧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들입니다. 죽어갈 것인데 사는 동안에 죽을 일만 하고 가는 자들입니다. 고통이요 눈물이요 근심 걱정이요 병과 질고요 죽음이요.
이러한 자들에게 주님이 가시니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주받은 땅에서 일어나서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늘진 곳에 사는 자들이 빛을 볼 것이다’
무엇에 가리워 빛을 못 보는 자들이요, 권력과 권세의 억압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죄악에 짓눌려 억압을 당하며 자유 없이 사는 자들입니다. 남 원망, 세상 원망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님이 가시니 빛으로 나오게 됩니다. 음산한 곳에서 해방이 되어 양지쪽으로 나오게 됩니다. 주님이 들어가셔서 역사하시면 이렇게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는 이 역사가 되도록 길을 닦아 놓는 것입니다. 주님의 신실한 종들이라면 진리의 빛을 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 저 촌구석으로 이사를 가신 것은
1. 천국복음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가난하고 인간 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
2. 도시 인간들이, 학식 있는 자들이, 부요자들이, 귄세자들이 무시하는 곳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
천국의 존귀자가 이런 진리로 오신 것은 사람을 불러 부려먹기 위함인가, 영원 존영자로 실력자 능력자로 만들어주기 위함인가?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갈릴리는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누가 주님의 불리움을 받았느냐? 시몬 베드로와 형제 안드레입니다. 이들이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에 불렀습니다. 저희는 어부라! 어부는 물 속에 노니는 산 고기를 그물을 던져 잡아서 생계유지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형제가 얼마나 긴 시간을 그물을 던졌는지, 고기는 몇 마리나 잡았는지 모르지만 어부가 직업입니다. 그 곳에서 나서 그 곳에서 어릴 때부터 고기 잡아먹고 사는 것을 배웠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죽을 자들이었습니다.
그 날도 부지런히 그물을 던지고 있었는데 주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천지의 창조주요 인간 자기를 지으신 이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 한 말씀에 어찌 군소리 한 마디도 없이, 변명 한 마디도 없이 따를 수 있었을까?
거기서 더 가시다가 야고보와 요한이 아버지와 배에서 그물을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 역시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뭘 보고 따랐을까?
1. 신학대학 졸업장도 없다.
2. 종교계의 명예도 배경도 없다.
3. 부자도 아니고 가난뱅이 목수의 아들이다.
사람이 몇 명이나 따르고 있다면 ‘저 사람들이 따르니 우리도 따라보자’ 하겠지만 따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이 배와 그물, 아버지까지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성령의 감화가 아니고서야 어찌 따를 수가 있을까 느껴집니다.
세상에는 많은 기술자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기술자들이 있지만 사람을 낚는 기술은 없습니다. 사망계에서 생명계로, 임시계에서 영생계로, 죄악세계에서 거룩의 세계로, 고통의 세계에서 희락의 세계로 사람을 낚아 올리는 어부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타락세상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세상이라는 이 인간세상은 전적으로 타락된 세상이요, 불로서 심판을 받을 세상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하던 돈 잘 벌어 부귀영광이나 누리고 가자’ 입니다. 그래서 모두 다 돈 잘 버는 기술을 습득하고 가르치고, 부모도 돈, 자식들도 돈, 사회도 돈, 국가도 돈, 집집마다 ‘돈 돈’ 하며 돈을 잡는 목적에 총 경주입니다.
심지어 종교계에서까지 돈 잡는 기술을 가르칩니다. ‘어떻게 하면 깨우치나’가 아니고 ‘어떻게 하면 끌어들이느냐, 어떻게 하면 크게 짓느냐, 어떻게 하면 성공 출세하고 가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영의 기능과 지능 면이 살아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육의 소욕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가르치니 영적인 면이 어떻게 성장이 되겠느냔 말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배와 그물, 아버지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물질선 인정선을 초월하고 따르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생명선을 초월했는지 궁금합니다. 십자가 밑에서 달아난 것을 보면 말입니다. 아마도 오순절 성령을 받은 후에 생명선이 초월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변질되고 변색되고 썩어지고 불타지고 상처입고 통곡을 할 것뿐입니다.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붙잡고 있으면 필히 통곡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인격화되고 사상화 되고 자체화 되고 실상화 되어 살아가는 것이 창조의 근본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심입니다.
깨닫고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불러 가르치신 것은 인간을 영원히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된 세상은 원래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소원 목적을 모르고 세상을 향한 소원으로 살기 때문에, 180도로 정신 소원이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정신과 가르침이 예수님과 대립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잘 모르는 교역자들이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세상운동을 하고 귀신운동을 하고 육 운동을 하고 음란한 짓을 하기 때문에 그런 자들 때문에 예수님의 진리의 교훈이 핍박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이 욕을 먹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장 23절~25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으로 다니신 것도 놀러 다니신 것이 아니라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 주셨습니다.
① 시골이라 병원이 없어서 고쳐주심인가?
② 돈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심인가
③ ‘병을 고쳐주면 복음이 잘 증거될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고쳐주심인가?
천국복음과 병 고침 중 어느 것이 주 본업이냐? 천국복음이 주목적이신데 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 주셨느냐? 단순히 육신의 병만 생각한다면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뜻이 없어집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심에는 일반적으로 볼 때 사대육신 정신적으로도 인간의 신체적 온전이 들어 있습니다. 또 이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천국복음에는 신령하고 영적 면에서의 인간의 온전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병이 있으면 사람이 육신적으로 자유하지 못하고 육신의 기능이 지능이 자라지 못하듯이 영적인 병이 있으면 사람이 정신적으로 자유하지 못하고 영적인 기능 지능이 자라지 못합니다. 이래가지고는 사람이 온전하게 자라지 못합니다. 천국복음, 주님의 하시는 일에 수종을 들지 못합니다.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자칫 사단 마귀의 이용물이 되고 맙니다.
4장 24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예수님의 소문이 어떻게 번져 나갔을까? 예수는 천국복음을 전하시는 분이신가, 아니면 예수는 육신의 병을 고쳐주는 분이신가? 모든 병자들이, 모든 약한 자들이 어떤 예수로 알고 예수님을 전했을까?
앓는 자: 몸이 아파서 앓는 자, 마음이 아파서 앓는 자.
고통에 걸린 자: 몸 고통에 걸린 자, 정신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악한 신이 들려 귀신에 붙들려 사는 자.
간질하는 자: 때와 장소 없이 아무 데고 넘어지는 자.(돈보고, 불보고 넘어짐)
중풍병자: 반신불수. 정신은 멀쩡한데 환경에 얽매인 자.
모두 보면 다른 사람에까지 고통을 주고, 모두 온전자가 아닙니다.
이런 모든 자들을 예수님께서 무엇으로 고쳐주었습니까? 능력으로 고쳐주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하면 질적인 성분이 약해져 버립니다. 아무 능력이나 즉, 마귀가 쓰는 능력과 분별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으로 고쳤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고치신 것입니다. 고침을 받은 자들도 길과 진리와 생명의 능력에 의해 고침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고치시는 기준입니다.
이 고침으로 고침을 받는 자들은 천국복음을 들을 수 있었을까? 그렇다.
우리 모두는 온전자 완전자가 아닙니다. 똑똑한 자가 아닙니다. 모순 투성이이고 거짓 투성이입니다. 냄새 투성이입니다. 고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누구에게 안수 받고 고침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천국복음을 모르니 어떻게 된 것인가? 그것은 순 육의 소욕으로 고침을 받고, 육의 소욕으로 고쳐준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뜻을 알면 천국복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25절)
4장 23절~25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각색 병자들을, 고통을 당하고 앓는 자들을 고쳐 주시니까 사방으로 소문이 나서 많은 무리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 무리들이 예수님의 무엇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왔을까?
① 천국복음이 좋아서 일까?
② 아니면 병을 고쳐주니 좋아서 일까?
아무튼 무리들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고 하니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두 모인 집단인데, 이 무리들의 소원 목적 취미 간구성 추구성이 모두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절대로 하나 같이 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모두 다른 것입니다. 물론 그 속에는 교인들인 제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원 목적 취미대로 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의사 단일성으로 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이 무리들 속에는
① ‘예수님의 이적 기사가 나타나는 것이 신기하니 구경해야지’ 하고 구경하러 나온 사람이 있을 수 있고.
② 자기 집 식구나 자기가 아파서 데리고 나와서 병 고침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③ ‘나도 예수님의 능력을 잘 보고 배워서 나도 그런 능력을 써먹고 돈도 벌고 이름도 날리고 노후대책도 세우고 유명하게 한 번 살아야지’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④ ‘정말 사회적으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살아야지’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⑤ ‘정말 천국복음이 저런 것이로구나, 이제야 내가 참 메시아를 만났구나’ 하는 바로 듣고 깨닫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뭐 이런 등등의 자기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리들의 정신 사상입니다. 그러니까 무리들의 정신 사상은 예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예수님의 뜻에 적중한 것이 아니고 모두 각자이고 저거들끼리(주-자기들끼리)도 안 맞습니다. 모두 예수님과 의사 단일성이 아니고 비 단일성, 비통일성입니다.
그런데 제 삼자들이 볼 때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보고 ‘와, 교인들 많다!’ 하고 보게 됩니다. 제 삼자들이 그렇게 보는 것처럼 교회 인도자, 지도자들 중에도 그렇게 보는 자들이 많습니다. 교회들을 볼 때 ‘하나님의 본질에서 단일성이냐, 비 단일성이냐’ 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고, 단일 같은 비 단일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종교적 사역으로 주체적 사상을 가진 교회를 말함인데 이것이 주님과의 비 단일성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과 주님으로 의사 단일성으로 자랐는지, 비 단일성으로 자랐는지 그것도 모르고 단순히 사람이 많은 것을 본다거나 건물만 보고 군침을 흘렸다간 죽을 일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허영심 영웅심을 가진 자들이 제일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본질에 의해서 부피가 커지는 것은 정상입니다. 비 단일성으로, 이질성으로 부피가 커지는 것은 사망성공이니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맞는 것 같은가?
① 예수님이 육신의 병을 고치신 것이 주목적의 사역인가?
② 천국복음과 우리의 죄 해결인가?
①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전하실 때 앞에 각종 병자가 있기에 만능의 능력을 가지고 아무 뜻이 없이 그냥 고쳐주신 것뿐이다?
② 천국복음을 더 잘 듣고 깨달으라고 죄에서 자유자로 풀어내어 고쳐주신 것이다?
①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② 병 고침만 성령의 역사인가?
예수 믿고 병 고침을 받았던, 교회 나와서 병 고침을 받았던 진리이치인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참으로 불쌍한 자들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은 비 단일성, 비통일성으로 된 소원 목적들을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으로 통일성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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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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