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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6:1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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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대구시 국우동) http://www.onlycross.net/ |
제목 : (25강) 열 두 제자
본문 : 눅6:12-19
<본문>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설교>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께서 직접 열 두 제자를 부르셔서 사도로 임명하신 본문의 내용은 마 10장과 막 3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의 기록이 마태나 마가의 기록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는데 그것은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셔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셨다고 되어 있고, 또 하나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다고 기록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고 모든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예수님은 밤을 새워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다음날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사도로 칭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기도는 열 두 제자를 부르신 일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를 열 두 제자로 택하여 세울지 하나님께 물으시고 응답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기도를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우거나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아야 한다는 말도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직분자를 세우는 일에서나 신자 개인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누구를 세울 것인지 하나님이 알려 달라는 의미이기보다는 누가 직분자로 세워지든,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게 하시든 그 일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해달라는 의미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자기 입장에서 기도를 합니다. 직분자를 세울 때는 교회 기둥이 될 수 있는 좋은 직분자를 세우게 해 달라고 하고, 자신의 일을 위해 기도할 때는 무슨 일을 해야 성공할 수 있을지 알려달라는 의미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내 뜻을 이뤄주는 분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의 기도가 이러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원인은 교회가 기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는 자기중심적인 기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도 하나님께 기도 하셨다는 내용이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외에도 눅 3장에서는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다고 말합니다. 5장에서는 예수님의 병 고친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자 한적한 곳으로 피하셔서 기도하셨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리고 9장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따로 기도하러 가셨다고도 말합니다. 그 외에도 기도하신 내용들이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 십자가 죽으심을 앞두고 감람산에서 기도하셨을 때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표현할 정도로 힘쓰고 애쓰며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기도를 많이 하셨지만 그 어떤 기도에도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피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의 방향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인도하신 대로 주시는 대로 받겠다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의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열 두 제자를 부르신 일에도 이 같은 예수님의 기도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왜 하필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이 부르신 열 두 제자의 이름은 베드로(시몬),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야고보(아패오의 아들), 시몬(셀롯인), 유다(야고보의 아들), 가룟 유다입니다. 열 두 제자의 이름은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일 것인데, 교회를 오래 다니지 않은 분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아넘긴 사람으로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아무리 생각해도 열 두 제자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가룟 유다가 장차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열 두 제자로 부르시고 사도라 칭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나중에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뽑아서 열 두 사도를 채우긴 하지만, 그럴 바에야 미리 가룟 유다를 제외하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마 우리 같으면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은 제자의 명단에서 삭제했을 것입니다. 해를 끼칠 사람인 것을 아는데 누가 제자로 받아들이겠습니까. 교회가 직분자를 세울 때 그가 나중에 교회에 큰 해를 끼칠 사람이라는 것을 미리 안다면 직분자로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기본적인 심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고 그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그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이것을 예수님의 기도와 연결하여 말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고 제자를 부르신 것은, 열 두 제자가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열 두 제자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사람들이고 그 가운데는 가룟 유다도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제자를 그대로 받은 것입니다.
열 두 제자를 하나님이 주신 사람으로 말하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 17:6절의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는 구절을 보면 제자를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 17장이 제자들을 위한 기도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내게 주신 사람’은 제자들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열 두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같이 유대 사회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예수를 팔 유다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 같은 인물들을 예수님께 주셨을까요?
유대 사람들에게 존경 받고 인정받는 바리새인, 서기관과 같은 계층의 사람들 중에서 엄선하여 제자로 주셨다면 유대사회에서의 예수님의 이름이 더 크게 부각되는 일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분명 우리는 그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사람들이 별 볼 일 없고 도움도 되지 않고 해를 끼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거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그대로 받은 것입니다.
가룟 유다만 예수를 배신하여 팔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 번 예수를 부인했고, 다른 복음서를 보면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신하여 도망을 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들을 제자로 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은혜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은혜의 그릇으로 사용될 용도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만약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중에서 이름이 있고 존경을 받는 사람을 택하여 제자로 세웠다면 어땠을까요? 분명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그 모임은 유대인들에게 인정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각되는 것은 인간의 실천적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대 사회에서 또 다른 세력을 가진 인물로 부각이 될 것입니다.
은혜의 시대에 어울리는 제자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는 은혜의 시대입니다. 인간의 실천과 행함이 의로움이 되고 공로로 인정을 받으며 복이 되는 옛 시대는 끝나고 포로 되고 눈멀고 눌린 자가 자유를 얻는 은혜의 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은혜를 세상에 나타낼 자로 부름 받은 사람이 열 두 제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를 부르신 일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일을 아셨기 때문에 열 두 제자를 보내셔서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복종하시는 것으로 밤을 새워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한 것이 그 중심 의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만 얻기 위해 기도하지만 기도의 실제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으며 주신 것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하며 신자로서의 본분이 나타나는 길로 가기 위한 것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내 입장에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우리는 받아야 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을 받든 신자의 본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압니다.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받았다면 의례히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하게 되겠지만,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받았다면 은혜보다는 원망이 앞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길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신자의 본분을 생각하며 제자로서의 길로 인도 받기를 원하는 신자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무엇을 위해 보냄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나타내고 가르치고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은 우리의 본분이기도 합니다.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제자들과 함께 내려 오셔서 만난 세상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을 눌리고 눈멀고 포로 된 자신들을 자유케 할 은혜를 이루시기 위해 오신 분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병을 고쳐주셔서 육신을 편안하게 해줄 분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의도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자로 부름 받은 사람의 본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출하시고, 자유케 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 어떤 실천이나 행함을 자신의 공로로 앞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그릇입니다. 은혜의 도구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살고 양심적으로 산다고 해도 그것으로 신자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 나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내 삶의 전부가 된 길로 가는 것이 신자의 본분일 뿐입니다.
이 길을 간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은 무엇이든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연약함을 알기에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어떤 일에서도 은혜를 잊지 않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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