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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7:1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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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대구시 국우동) http://www.onlycross.net/ |
제목 : (30강) 예수님과의 만남
본문 : 눅7:11-17
2012-09-30
<본문>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설교>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기쁨이 있을 수 있고, 슬픔이 있을 수 있고, 분노나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게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뒤바뀌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 사람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사람으로 모인 우리에게 과연 예수님으로 인해서 바뀐 것은 무엇인지, 또한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발생한 사건이 어떤 것인지를 오늘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예수님이 만난 장례 행렬 ◉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신 예수님이 제자와 많은 무리가 함께 동행하는 가운데 나인이라는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성문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성에서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무리들을 만나게 되십니다. 14절에 보면 죽은 사람은 젊은 청년인 것을 알 수 있는데, 문제는 그가 과부의 독자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과부는 약자에 속한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이 없었기에 기업도 없으며 따라서 사회적 약자로서 오직 아들만 바라보고 의지한 채 살았을 것입니다. 아들이 과부에게는 전부였고 힘이었고 소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었으니 과부에게는 ‘슬픔’이라는 단어를 초월하는 극한 슬픔과 함께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절망적인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난 장례 행렬은 바로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부 아들의 장례 행렬에 함께 따랐던 것은 어쩌면 과부의 처지를 그들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과부의 처지는 딱하기만 합니다. 믿고 의지할 사람이 전혀 없는 과부가 유일하게 의지했을 아들이 죽었으니 비록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안됐다는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같은 장례 행렬을 만나신 예수님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까이 가셔서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시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라는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예수님에 대한 이 일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다고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 보면 절망에 빠진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자비,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내용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것도 틀린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본문의 중심 내용으로 보기에는 많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울지 말라 ◉
그러면 본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먼저 본문에 등장하는 장례식과 같은 상황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발생하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을 향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한 이후로 모든 인간은 죽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양하게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은 흔히 말한 것처럼 천수를 다하고 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본문의 과부의 독자처럼 젊은 나이에 죽기도 합니다. 어떤 죽음은 호상이라고 하면서 슬퍼하기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장례를 치르지만 어떤 죽음은 과부처럼 슬픔과 절망만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이처럼 다양한 죽음의 현장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죽은 자에게 죽음은 차이가 없습니다. 오래 살고 죽었든 젊은 나이에 죽었든 죽음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산자들이 죽음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살아있다’라는 입장에서 죽음의 상황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자가 장례식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찾아가 조문하고 통속적인 말로 위로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과부 아들의 장례식에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도 과부를 찾아와서 여러 가지 말로 위로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부의 상황에서는 무슨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결국 장례식에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 됩니다. 단지 과부와의 친분을 생각해서 함께 해주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이처럼 과부 아들의 장례식 현장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위로가 되어 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 장례식의 현장에 있었다고 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과부에게 돈을 준다고 해서 위로가 될까요? 아니면 위로가 될 수 있는 무슨 멋들어진 말이 있을까요?
슬픔과 절망에 빠진 과부에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려면 오직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 외에는 그 무엇도 과부의 마음에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같은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울 필요가 없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실 것이기 때문에 사실 예수님을 만난 과부는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부는 아직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아들이 죽은 현실만 생각하니 눈물만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은 이 과부가 우리들의 모습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과부가 예수님을 만났으면서도 그 만남의 의미가 무엇인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독자 아들이 죽었다는 현실에만 매여서 울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현장입니다. 그리고 내가 만난 예수님과 그대로 동행하여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모습이 과연 예수님을 만난 자라 할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남으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그 일을 믿는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어쩌면 예수님과의 만남에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의 관심도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의 능력에만 집중될 수 있습니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적처럼 내게도 놀라운 기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에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놀라운 기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기적에 대해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죽은 자가 살아난 것처럼, 병이 고침 받거나 문제가 해결되고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과 같은 기적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내게 어떤 일이 주어졌는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예수님을 만난 신자의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고, 과부처럼 막막한 현실 속에서 우는 것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아들을 살리기 전에는 슬픔과 절망만 있습니다. 장례식에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도 슬픔만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은 아들을 살린 후에 슬픔은 두려움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장례 무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아들을 살려주셨으니 예수님에 대한 과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감사함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본문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과부가 감사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 같은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 두려움과 찬송 ◉
16절에 보면 거기 있었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영광을 돌린 내용은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큰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엘리야와 엘리사도 죽은 자를 살린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엘리사가 살린 자도 외아들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사렙다에 사는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렸고, 엘리사는 수넴에 사는 어떤 부인의 외아들을 살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까지 포함하면 모두가 여인으로서는 최고의 슬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동일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슬픔과 절망에 있는 그들에게 임한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는데 왜 두려움이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경험하게 되면 기뻐하고 찬송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면 기뻐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찬송하게 됩니다. 하지만 앞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움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이사야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했을 때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크심 앞에서 자신은 한없이 작은 먼지와도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심을 깨달았을 때 두려움과 함께 하나님을 자신을 돌보신다는 사실에 기쁨과 함께 찬송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신자입니다.
◉ 만남의 의미 ◉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과부를 슬픔과 절망에서 구원했고, 아들은 죽음에서 건졌으며, 함께 한 무리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찬송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자의 세계입니다.
믿음은 관념으로만 머물 수 없습니다. 관념에만 머문 믿음에서는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신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현실만 바라본 채 과부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슬퍼하고 우는 것만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슬픈 일에서도 울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해도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일으키신 그 기적의 일이 함께 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생명의 사건입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는 나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지 않고 불쌍한 자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나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지도 않기 때문에 생명이 사건을 놀랍고 위대한 사건으로 여기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자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불쌍한 자입니다. 현실에 붙들려서 울고 웃고, 짜증내고 분노하면서 살아가는 그 길의 마지막이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불쌍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불쌍한 자기의 현실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만나주시는 은혜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보시기 바랍니다. 나인 성에서 나오는 장례 행렬이 우리의 인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만나주심으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생명의 기적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송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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