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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1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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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5장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너희 상이 크다’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오는 순교의 면류관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오는 모든 고난과 환난과 핍박은 하나님께서 더 큰 영광으로 갚아주시는 것이고, 대신 환난과 핍박을 준 자들에게는 진노의 고난과 심판으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환난 핍박을 주는 자들의 정신과 사상과 소원과 목적을 보면
① 물질을 좇아가고.
② 단체 큰 것을 찾아가고.
③ 세상의 누림성을 생각하고.
④ 노후대책을 염려하고.
⑤ 명예 영광을 좋아하는 자들이 예수를 죽이고, 선지 사도들을 죽인 사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예수 이름으로 세상을 구하는 자들이 불신세상과 합심하여 참 교회를 핍박하는 것을 계시록에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의 종들은 그 면에 민감하지만 악한 종들은 별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의 종, 참 성도는 하나님의 의로 인해 환난 핍박을 당하면 당할수록 못이 박히듯이 신앙 믿음은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거짓 신앙은 세상 쪽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참 종, 참 성도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수록 걸레를 빨면 자꾸 깨끗해지듯이 회개가 되고 고치고 사람이 청결해지는데, 거짓 성도는 이유와 변명이 많아집니다. 참 종, 참 성도는 금을 불에 달굴수록 정금이 되어 나오듯이 신앙 믿음이 진리의 본질로 만들어져 나오는데, 거짓 신앙은 시련 속에서 연단이 아니라 잔머리 굴리고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은 하나의 학문이나 종교수양이 아니라 산 역사가 되어 자기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5장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의 본질과 활동성을 생각할 것.
소금은 언제부터 생겼느냐? 창조 때부터 소금은 어떤 인간이 생기게 해서 생긴 것이 아니고, 어떤 인간이 생기게 하라고 해서 생긴 것도 아닙니다. 소금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소금은 우리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은 세상이 필요한 것이지 천국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창세 이후로 소금은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나 어느 지역이나 미개지역이나 문화도시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소금이 필요했습니다. 소금을 무시하고 살아온 때는 없었고, 소금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소금이 사람에게 꼭 필요했듯이 천국복음을 가진 성도는 이 땅에서 꼭 필요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은 변질되지 않고 썩지 않습니다. 소금의 빛깔이라든지 소금의 맛이라든지 1년 전의 그 소금이요, 수천 년 전의 그 소금이요, 1년 후에 맛을 보아도 그 소금 맛이요, 수천 년 후에 맛을 보아도 그 소금 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장소나 지역이나 환경이나 계절이나 환경에 소금의 짠맛과 빛깔은 변하지 않습니다. 도시에 가도 그 소금 그대로 그 맛이고, 시골에 가도 소금 그대로 그 맛이고, 외국을 가도 소금 그대로 그 맛이고. 외국의 소금 맛이나, 한국의 소금 맛이나 모두 똑 같습니다. 소금을 딴 곳으로 가져가서 먹어보니 소금이 신맛이 난다거나 매웁다거나 고소한 맛이 난다거나 그렇지를 않습니다.
소금 맛은 세계적으로 동일합니다. 봄에 맛을 본 소금을 겨울에 맛보아도 그 맛은 그 맛입니다. 가마니에 넣어두나 항아리에 넣어두나 비닐봉지에 넣어두나 부엌구석에 넣어두나 소금 맛은 마찬가지입니다. 소금 한 숟가락을 물 한 그릇 속에 녹였다가 다시 건지나, 물 한 솟단지 속에 넣었다가 다시 증발을 시켜도 역시 그 소금입니다. 부뚜막에 두어도 소금 그 맛, 장독대에 두어도 그 소금 그 맛입니다.
음식을 만들 때에는 꼭 찾고, 비라 올라치면 뚜껑을 꼭 닫아 간수하고, 소금을 많이 넣었던 소금을 적게 넣었던, 짜던지 싱겁던지 사람을 나무라지 소금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바다 속에 들어가면 바다의 고기를 살리고, 소금이 육지로 올라오면 음식의 맛을 냅니다. 썩는 곳에 방부제로 쓰기도 하고, 무쇠에 닿으면 서서히 무쇠를 녹입니다. 인간이 소금을 유용하게 쓰면 소금으로부터 많은 덕을 보게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맛을 잃어버리면 버리워 밟힌다’
세상이라는 세상은 죄로 타락된 세상이요, 변질된 세상이요, 썩는 세상이요, 불에 탈 세상이요, 맛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에서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천국복음을 가진 성도는 소금 맛을 내어야 하는데 소금은 녹아야 음식에 맛을 냅니다.
맛을 낸다는 게
① 인간을 찾아가서 세상살이에 희망을 불어넣어 사는 맛을 느끼게 하라는 말이다?
② 타락된 세상을 도덕성적으로 썩지않게 하라는 말이다?
① 세상이 복음을 가진 성도를 필요로 한다?
② 복음을 가진 성도가 세상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어느 것이 주격이며, 복음의 맛을 잃기 쉽겠는가? 소금이 맛을 잃으면 누구에게 버림을 당하는가? 다시 말하면 소금의 귀중성은 짠맛인가, 활동인가?
5장 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타락된 세상은 참 빛이 없습니다. 절대적인 기준 척도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혼돈이요 혼합이요 혼성이요 흑암이요 암흑이요 정확한 구별을 할 수 있는 척도가 없습니다.
성도가 비취는 빛은 위로부터 오는 진리의 빛이요, 복음의 빛이요, 모든 정신 사상 소원 목적 지향성 추구성, 모든 영적인 운동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고차원적인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의 빛이 비추어지면 모든 것이 판단되고 구별되고 분별이 됩니다. 정형이 드러나고 정모가 드러나고 정색이 드러나고 정질이 드러나고 정관이 되고 정돈이 됩니다. 사람을 사람만큼, 물질을 물질만큼, 세상을 세상만큼, 천국을 천국만큼 가치 평가적으로 알게 해 주고, 생명과 사망 길을 정확하게 알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빛, 진리의 빛이 아니면 알지를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를 세상의 빛으로 세워 놓으신 것은 일반 도덕성과 남의 허물이나 보고 지적하여 그것을 고치라고 세워 놓으신 것은 아닙니다. 타락세상의 악세사리로 만들어 놓으신 것은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알라는 뜻이요, 세상이라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세상을 세상만큼 알리게 하고 천국의 고차원적인 빛을 비추라는 것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산 위에 있는 동리는 산 아래의 동리보다 차원 높은 동리로서 산 아래의 동리사람들은 그들을 쉽게 발견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을 가진 성도는 그 차원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빛은 더욱 높기 때문에 도덕성이 더욱 고상하고, 또 나쁜 뜻으로 본다면 산꼭대기에서 아무리 은밀히 숨고 살아도 세상을 훤히 아는 성도에게는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사명자들이지 세상에서 은밀히 누릴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도덕성을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가진 최고의 성도 앞에서는 속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5장 15절: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 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추게 하려고! 등불을 켜서 말 아래 곡식을 되는 말로 둘러씌우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미친 사람이 있습니다.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면 집안 사람들의 얼굴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사람의 얼굴인지, 친구의 얼굴인지, 도둑의 얼굴인지 알 수가 있고, 집안 식구들의 얼굴도 아픈 얼굴인지, 졸고 있는지, 싸워서 상처가 났는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아이인지 어른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보고 도덕성으로 행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불을 내리면 어둡고 캄캄해서 사람을 알아볼 수가 없고, 얼굴이 시커멓게 보여서 무섭게 보이고 답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등불을 빨리 높은데 올리라고 야단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올려놓은 빛을 인간이 끌어내리면 자기는 빛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빛을 올릴 줄 모르면 자기는 복음의 빛이 무언지 모른 채 어둔 죄악세상과 함께 망하게 될 것입니다.
5장 16절: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 빛, 너희 착한 행실이 무엇이냐?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 무엇이냐?
타락된 우리 인간에게는 사람에게 비추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만한 빛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원료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와야 합니다. 그래서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게 할 빛은 진리의 빛, 복음의 빛, 예수 그리스도의 빛밖에 없습니다. 너희 빛 곧, 우리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너희 착한 행실 곧, 우리의 착한 행실은 하나님의 온전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복음으로 인하여 최고의 고상한 인격의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에까지 영원히 알아주는 존영자로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자들은 너희 착한 행실을 일반적으로 불쌍하고 가난한 자를 물질로 돕는 것이라고 보통 말합니다. 이런 행실들을 예수 믿는 자들의 착한 행실이라고 보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무료봉사를 하여 예수 믿는 사람이 칭찬을 들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또는 종교적 활동적 사역을 하는 것은 다 성도의 착한 행실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불신자가 죄인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진리의 복음소식을 듣고 예수 믿고 사람이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설령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예수 믿고 참 사람이 되는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으로 그들에게 가치 평가적으로 깨닫게 하여 최고의 사람을 알아보게 하는 것이 선이고, 주님을 닮는 이 이상 큰 영광이 없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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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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