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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1: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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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66045456 |
2012년 9월 9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21장 12절~13절
설교제목 : 무화(無化)의 영성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 안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태 21:12~13)】
<예수 이야기>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처음으로 하신 일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역이었습니다. 예수 일행은 성전 안에서 제사용 비둘기를 팔고, 또 이를 위해서 돈을 환전하는 일 따위를 하는 장사치들을 몰아내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꾸짖으시기를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태 21:12~13)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 일행의 이 과격한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오늘 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의 핵심적 메시지>
예수 일행의 이 과격한 행동 속에 들어 있는 핵심적 메시지는 한마디로 “종교마저 상업논리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최소한 종교는, 신앙은, 영성은 상업논리에서 벗어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업논리’를 아시지요? 최소한의 노동을 하면서 최대한의 이익을 만들어 내려는 온갖 투쟁, 그것이 상업논리입니다.
우리 민족이 전통적인 가치로 지켜왔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체계를 생각하면 훨씬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유교가 전파되면서 직업에 따른 신분의 귀천을 사농공상(士農工商), 즉 선비 농부 장인 상인 순서로 자리매김했는데, 이를 참고하면 될 것입니다. 물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체계가 갖고 있었던 폐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인간됨의 사상적 가치를 탐구한다고 했을 때, 이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이야기에 반드시 귀를 귀울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 한 사람의 선비형 인간이 있습니다. 그이는 삶의 전체를 진리 탐구를 위해 바칩니다.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衣食住) 삶에 대해서 무관심한 채로 이 선비형 인간은 오로지 책과 씨름하면서 한 평생을 보냅니다. 순수의 전형이며, 구도적 삶의 표준입니다. 물론 선비형 인간이 노동하지 않은 채, 즉 자신의 생명유지를 누군가에게 기생한 채로 살아갔다는 비판의 여지가 충분하지만, 순수한 구도적 삶의 표준이 되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여기 한 사람의 농부형 인간이 있습니다. 그이는 노동하는 자입니다.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이는 자연 속에서 땀 흘리면서 노동하고, 그 노동의 결실을 가족들과 일가친척, 또 동네 이웃들과 함께 기꺼이 나누는 자입니다. 여기 한 사람의 장인(匠人)형 인간이 있습니다. 그이는 기술자이며 예술가입니다. 그이는 일 자체에 몰입하는 자입니다. 그는 일에 대한 열정이 불타는 자입니다. 일에 대한 완성도, 그 작업 자체의 예술성, 그 일의 숙련도에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런가 하면 여기 한 사람의 상인(商人)이 있습니다. 그는 장사치입니다. 최대한 작은 노력을 하고, 최대한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투쟁합니다. 자기 자신과도 싸우고, 가족과 일가친척과도 싸움입니다. 손님을 찾아서 그이를 속이고, 이익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노심초사(勞心焦思)합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신분체계로 고착화 된 일은 잘못된 것이지만, 사람됨의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했을 때, 선비(士)가 최고봉에 위치해 있고, 장사치가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것은 분명한 현실입니다.
작은 결론으로 말씀드리자면, 장사를 해도 선비처럼 해야할 것입니다. 물론 뜬 구름 잡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분명한 하느님의 진리 차원에서 말씀드리면, 과연 그렇습니다. 선비처럼 하기가 어렵다면, 차선의 방법으로서 농부처럼 혹은 장인처럼 장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상업논리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종교마저 상업논리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면, 그 사회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과격하게 분노하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현대교회?>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예수의 깊은 뜻과는 달리, 현대교회는 얄팍한 계산으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성전 안팎에 두텁게 쌓여 있는 상업논리는 가만히 내버려 놓아둔 채, 그야말로 성전 안팎만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서울의 큰 교회가 교회 근처를 매일새벽 청소하는 일을 자랑처럼 늘어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은 값비싼 성구세트로 화려하게 장식해 놓고, 교회 밖은 매일새벽 빗자루를 들고 쓸어내는 선행(善行)을 자랑하곤 했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왜곡입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예수의 깊은 뜻을 얄팍하게 왜곡하는 비열한 술수였습니다.
<예수의 깊은 뜻을 더 깊게>
예수께서 교회 안팎에 팽배해 있었던 상업논리를 꾸짖으신 사역에 대해서 좀더 깊은 생각을 해보려 합니다. 그것은 곧 무화(無化)의 영성입니다. 교회 안의 건물이나 사람뿐만이 아니라, 교회 안의 ‘조직과 교리, 체계와 신학’을 무화시키는 사건,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교회 안팎의 모든 ‘제도와 사상과 체계, 조직과 교리’ 등에 대해서 유화(有化)와 무화(無化)가 자유로운 체제로 만들어 내는 세상을 꿈꾸는 것입니다.
동양의 스승 노자가 말씀하셨듯이, 도(道)를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닙니다. 예수의 무화영성을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이유는, 비단 예루살렘 성전이 상업적 논리에 빠져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전 안팎을 깨끗하게 무화(無化)하신 이유는, 인류의 이런 저런 제도가 만들어낸 유화(有化)의 세상이 인류의 고결한 영혼을 옭죄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유(有)의 체제가 만들어 내는 감옥을 극복하는 무(無)의 체제, 그리고 유의 체제와 무의 체제가 서로 간의 통행과 교류가 자유로운 유무상통(有無相通)의 세계 … 그런 세상을 예수께서 꿈꾸셨던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무화(無化)의 영성’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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