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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0:27-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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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09685 |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20:27-38, 창조절 열번째 주일, 2016년 11월6일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28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30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31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32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33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3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38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논쟁을 좋아하셨을까요? 옳고 그름을 놓고 서로 자기주장을 펼치는 논쟁 자체를 예수님이 즐겨하셨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피하지 않으셨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반복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누가복음 20장에는 그런 유의 사람들이 여럿 나옵니다. 눅 20:1절 이하에 따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와서 이렇게 따져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이어서 권위에 대한 논쟁이 이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논쟁 과정에서 기분이 상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눅 20:19절에 따르면 은밀하게 대리인을 예수에게 보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이런 질문들은 다 예수를 함정에 빠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유대교의 고위 신학자이며 성직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전통을 위태롭게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상황을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고, 예수님도 적당하게 타협할 수 없어서 예수님 공생애 3년 동안 이런 충돌이 반복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눅 20:27절 이하에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질문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들과 달리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이 모세의 권위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서 신 25:5절을 인용했습니다. 유대 사회에는 다음과 같은 전통이 있었습니다. 여러 형제가 있는 집에 어떤 여자가 시집 와서 살다가 자식 없이 남편이 죽으면 그 시댁 형제들 중의 한 사람과 결혼해서 죽은 사람의 후손을 이어가야 합니다. 형제들에게는 그런 의무가 있었습니다. 만약 형제들이 이 여자와 결혼하는 걸 원치 않으면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해야 합니다. 이런 전통을 근거로 해서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습니다. 큰 형이 한 여자와 결혼해서 살다가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율법에 따라서 둘째가 죽은 형의 아내와 결혼했지만 그도 역시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일곱 형제가 다 죽었다고 한다면 부활 때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들의 질문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이 질문은 누가 봐도 질문을 위한 질문이지 실제로 진리를 알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 아닙니다. 둘째, 이 질문에는 부활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가 들어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 개념을 현재의 삶이 연장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은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질문에는 대답할 필요가 없는데, 부활에 대한 이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비교적 자세하게 답변하셨습니다. 답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결혼 너머
예수님은 34절 이하에서 이 세상에서는 남녀가 만나 결혼하고 함께 살지만, 죽은 다음 부활의 세계에서는 결혼이 필요 없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는 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방식으로 삶을 경험했기 때문에 결혼도 없고 자녀도 없다면 그게 무슨 삶이고, 또 무슨 즐거움으로 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질문하고 있는 사두개인들도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 이후 부활의 세상에 결혼이 없다는 주장의 근거를 3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이 세상에 결혼 제도가 생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자녀를 낳으려는 것입니다. 그게 인류가 존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만약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자녀를 낳지 않아도 됩니다. 자녀가 없어도 된다면 결혼 제도가 없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죽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을 천사와 동등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미래가 바로 죽음 이후 부활에 일어날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죽을 수 없다거나, 천사와 동등이라거나 부활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우리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계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계는 결혼으로 표상되는 세상의 방식입니다. 부활은 그것 너머의 생명 세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가리키는 핵심은, 죽음 이후의 부활이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삶에만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현들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죽음 이후의 부활 세상에서도 결혼과 가정이 계속되느냐의 여부에만, 즉 거기서도 잘 먹고 잘 사느냐 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거기서 황금 면류관을 받는다는 성경의 표현을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복지의 극대화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생각에 머물러 있는 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생각의 차원을 바꿔야 합니다.
장석주 시인의 시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는 다음과 같습니다. ‘땅거미 내릴 무렵 광대한 저수지 건너편 외딴 함석지붕 밑/ 굴뚝에서 빠져나온 연기가/ 흩어진다// 단순하고,/느리게,/ 고요히,// 오, 저것이야!/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느림!’ 이 시가 그려내는 풍광이 눈에 그려집니다. 저수지 건너편에 외딴 함석지붕의 집이 한 채 있습니다. 비가 내리면 함석지붕은 타악기가 됩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겠지요.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처로 보입니다. 그 집의 굴뚝에서 빠져나오는 연기에서 이 시인은 삶의 극치를 경험합니다. 그걸 ‘아직 내가 살아보지 못한 느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똑같은 광경을 보고 어떤 사람은 부동산 투기를 생각할 거고, 또 어떤 이는 함석지붕 아래에 사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낄 겁니다. 시인은 천천히 솟아올라 옆으로 펴지는 연기에서 ‘느림’을 삶의 새로운 경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생각이 다른 거지요.
구체적으로 대답해보십시오. 죽음 이후에 우리가 참여하게 될 부활의 나라를 어떤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만약 여기서 가장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거기서는 더 많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설명처럼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없다면 지금 우리가 여기서 생각하는 모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천사처럼 된다면 여기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행, 불행이 없다는 뜻입니다. 죽음이 없다면 여기서 살기 위해서 기울이는 모든 본능적인 것들도 사라집니다. 그게 실질적으로 옳습니다. 죽은 사람을 직접 보신 적이 있습니까? 먼지가 된 그에게는 재산도 무의미하고, 가족도 무의미합니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두려움이고 저주이고 어둠입니다. 그래서 고대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어둠의 나라인 땅속 ‘스올’로 내려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에게 질문하고 있는 사두개인들도 그런 ‘스올’ 개념을 바탕에 깔고 일곱 형제와 한 여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죽음의 실존에 관한 말을 들으면 여러분들은 두렵거나 아니면 체념을 하고, 엉뚱한 망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죽어 천국에 가면 정말 행복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상상합니다. 먼저 죽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맛난 먹을 게 지천으로 널려 있고, 병에 걸리지도 않고, 장애도 다 고침을 받고,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세상일 거라고 말입니다. 그런 것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기는 합니다. 그런 구절들은 다 은유이자 비유입니다. 아무도 죽음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에 대한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집에 살게 될 거라고 말하는 설교자들은 미숙하거나 거짓말 약장수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의 세계를 외면하지 않고 대면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다른 차원을, 더 깊은 차원을 보게 합니다. 마치 똑같은 함석지붕의 굴뚝에서 솟아나는 연기를 보지만 서로 다른 삶을 경험하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똑같은 저주스러운 죽음 앞에서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뭘까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저는 예수님이 사두개인의 질문에 대해서 두 가지로 답변하셨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 답변은 부활을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행복의 조건들이 연장되는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대답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르게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은 사두개인들이 모세의 전통 운운하면서 질문한 것에 걸맞도록 모세에 관한 구약성경의 한 대목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인용한 구약성경은 출 3:6절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불이 붙었지만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았습니다. 아주 특별한 물리현상으로 보이지만 과학적으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 현상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다음입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이 구절을 인용한 예수님은 여기에 당신 자신의 주석을 붙입니다. 38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일종의 선문답처럼 들립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들이 죽었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문자적으로 보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아주 오래 전에 죽어서 그들의 뼈도 추려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살아있다는 말은 생물학적인 차원과는 전혀 다른 뜻입니다. 이런 말씀을 이해하려면 생명에 대한 이해를 더 넓혀야만 합니다. 단순히 숨쉬고, 심장이 뛰고, 뇌가 활동하는 몸만을 생명으로 알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위 구절의 후반부를 보십시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간단하고 분명한 말씀입니다. 살아있다는 것, 즉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현재 살아있는 사람이나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 똑같이 살아 있습니다.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는 지금 살아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의 궁극적인 실체를 낱낱이 아는 게 아닙니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우선 살아 있다는 것이 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루 세끼 밥을 먹고, 숨을 일분에 열댓 번쯤 쉬고, 맥박이 70번쯤 뛰면 일단 살아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게 80년이나 100년쯤 살겠지요. 그리고 죽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죽기 전까지의 현상에 불과합니다. 시간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습니다. 앞으로 100년 후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습니다. 지금은 살아있는 것 같지만 100년 후에는 사라지고 없는 게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잠정적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살아있다 하나 궁극적으로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살아 있는 겁니다. 지금 죽어도 하나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살아있는 겁니다. 그걸 증명할 수 있느냐, 하고 묻고 싶으신가요? 그걸 누가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생명의 주인이 아닌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증명해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누군지에 대한 생각이 넓어지면 그 사실을 좀더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과 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모세 전승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하십니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말은 존재의 근거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반해서 모든 피조물들은 존재의 근거가 외부에서 주어집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기에 우리의 생명은 그분 안에서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2) 계1:8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사람은 아무도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습니다. 생명은 마지막 때 완성될 것이기 때문에 그 마지막의 주인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3)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일컬어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규정받을 뿐입니다. 주신 것을 받아 누릴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실제로 믿는다면 살아있다거나 죽었다는 말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단지 늙어서 죽는 것으로 생명이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생명은 단백질로 구성된 몸을 가리킵니다. 그 몸이 생명의 구성요소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생명이 그런 단백질 덩어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더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고 완성할 생명은 그것보다 훨씬 방대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일곱 명 형제들과 결혼한 여자의 운명에 대한 질문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주장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죽음 이후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이건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인 질문입니다. 현대인들이 겉으로는 자주 말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계속 남아 있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유형의 대답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인간이 죽으면 스올에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무덤을 열어보면 그들의 생각이 무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죽으면 모든 게 끝장난다고 생각합니다. 과도하게 열정적으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 이후에 대한 허무가 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전혀 다른 믿음으로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죽음 이후에 단순히 스올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며, 모든 생명이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비밀한 방식으로, 즉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죽음 이후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허무하게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고유한 방식으로 지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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