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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세례와 불세례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94 추천 수 0 2017.02.09 22:5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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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3:1-1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14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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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세례와 불세례

마3:1-12, 대림절 둘째 주일, 2016년 12월4일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오늘 우리가 제3 독서로 읽은 마태복음은 기원후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함락 이후 유대-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어떤 저술가에 의해서 기록된 문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이후 대략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때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여전히 불투명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세례 요한과의 관계도 초기 기독교가 풀어야 할 숙제였습니다. 세례 요한을 추종하던 사람들이 초기 기독교 안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네 권의 복음서에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가 다 나오고, 사도행전에도 간접적인 방식으로 나오며, 예수님이 직접 행하지 않은 세례가 기독교 예전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만 보아도 당시의 복잡한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인물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입니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었습니다. 세례를 베푼 사람은 세례를 받은 사람보다 영적인 권위가 높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예수님이 영적으로 훨씬 앞선다는 사실을 강조해야만 했습니다. 그걸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11절입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로, 예수의 세례는 성령과 불세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습니다. 그에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중적 카리스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장에서도 그런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낙타털 옷을 입었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만 먹었습니다. 일단 겉모습만으로도 영적인 뭔가가 ‘있어’ 보입니다. 요한은 단순히 있어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영적인 내공을 갖추었습니다. 5-7절 말씀이 그 상황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이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의 설교는 대중들의 양심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다그쳤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당시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했을 겁니다. 뭔가 삶을 바꿔서 새롭게 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다짐도 했을 겁니다. 그걸 가리켜 성경은 물세례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변화, 정의 실천, 역사 변혁은 지금도 요구됩니다. 경제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하고, 남북평화 통일을 향해서 전진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서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삶의 태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이유에서 가장 큰 게 바로 이런 대목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대한 열정은 지대하지만 그게 삶의 변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세상살이가 힘드니 그저 교회에서 위로 받는다는 생각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기복적이고, 이기적이고, 개 교회 중심적이고, 반역사적이고, 반통일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경향을 많이 보입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가 시급합니다. 이런 세례는 기독교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입니다.


불세례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물세례를 교회의 중심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더 본질적인 세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불세례입니다. 마 3:11b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물세례는 어느 정도 손에 잡히지만 성령과 불세례는 그렇지 못합니다. 흔히 교회에서 말하듯이 성령을 받으라는 말인가, 하는 정도입니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본문에 성령과 불이 병렬로 나옵니다. 성령은 헬라어 프뉴마이고, 불은 퓌르입니다. 프뉴마는 영이라는 뜻만이 아니라 바람과 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히브리인이나 헬라인 모두 영과 바람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공기의 대류현상입니다. 물리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는 그런 물리학적인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는 어떤 것을 느꼈습니다. 봄이 오면 따뜻한 기운이 돌면서 죽은 듯이 보였던 땅에서 풀과 나무의 순이 돋아납니다. 찬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자연에 생기가 없어집니다. 사람이 어머니 배에서 나오면 숨을 쉬기 시작하고, 죽으면 숨이 끊깁니다. 바람과 숨이 세상과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영과 바람을 똑같은 단어인 루아흐로, 헬라인들은 프뉴마로 불렀습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생명을 주는 힘이지만 불은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생명을 결정하는 힘입니다. 고대인들에게 불이 얼마나 신비롭게 보였을지 상상해보십시오. 2백만 년 전 유인원들이 처음으로 불을 보았을 때 살아있는 생물로 보았을 겁니다. 무시무시한 괴물로 말입니다. 천천히 불을 관찰하고 다루면서 불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헬라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만물의 근원으로 보았습니다. 그게 틀린 말도 아닙니다. 불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태양이 지구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전기와 가스, 그리고 핵에 이르기까지 모든 에너지도 역시 불입니다. 고대 여러 문명이 태양을 신으로 섬겼다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구약성경에도 불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메타포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행 2:1절 이하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2백여 제자들에게 성령이 바람과 불로 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행 2:2,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세례 요한이 말한 ‘프뉴마와 퓌르’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바람과 불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바람과 불이 고대인들에게 절대적인 생명의 능력이었던 것처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 생명이었습니다. 절대 생명 경험이 바로 성령강림이자 불세례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람직한 삶의 변화라 할 수 있는 물세례에 머물지 말고 불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붙들었습니다.

 

절대생명


예수를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교회가 가르치는 대답은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대답을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아는지, 그리고 그것을 자기 삶의 능력으로 경험하고 있는지에 있습니다. 우선 사람들이 세상에서 무엇을 생명으로 경험하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생명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무엇을 통해서 자기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뜨겁게 경험하고 있을까요? 노골적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사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재미있게 사는 것입니다. 그걸 성취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삶의 태도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세상에서 큰 어려움 없이 평화롭고 행복하기 살기를 저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런데 잘 보십시오. 그런 것으로 삶이 만족스럽다고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한 묶음으로 말하기는 힘듭니다만 방향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릴 때 읽었던 동화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노인 어부가 황금빛 용왕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살려주면 원하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내에게 말하자 좋은 집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이루어지자 점점 욕심이 많아져 여왕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이루어지자 바다까지 다스릴 수 있는 왕이 되어야겠다고 했습니다. 쫄딱 망해서 옛 오막살이에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아무리 넓은 집에서 없는 거 없이 다 갖추어도 결국 오막살이의 삶을 면치 못하게 만듭니다. 초라한 거지요. 이게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생명입니다. 물론 다르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서리가 묻은 토끼풀을 손으로 만지면서 무한한 생명의 신비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영혼의 무게를 걸어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을 성취하는 것에서만 삶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지난 한 달 이상 동안 대한민국 뉴스의 모든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건은 소위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입니다. 이것은 본인들이 알았든지 몰랐든지, 사심이 있었던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고급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가장 저급한 인간 욕망의 도구로 이용한, 그야말로 파렴치한 사건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다는 것은 이런 세상에서 제공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그게 실제로 있기는 있는 것일까요? 현실성 없는 허황한 기독교 교리에 불과한 것일까요? 마태복음 기자는 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말을 하고 이어서 4장에서 예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전한 다음에, 곧 5장에서 그 유명한 ‘팔복’을 말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에 대한 목록이 거기 나옵니다. 복이 있다는 것은 생명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 목록에는 우리의 세상살이 경험과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등등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세상에서 경쟁력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자체가 이런 여덟 가지 복에 해당되는 분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방증입니다. 세상 경험에 따르면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은 아예 말이 되지 않아 보입니다. 가난과 애통 자체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요? 팔복에 열거된 사람들은 세상에서 의존할 게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만 의존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완전한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만 의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만 의존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런 절대 생명에 대한 경험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서 마 3:13-17절에는 예수님이 세례 받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하늘로부터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사도신경에도 예수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에게 신성 모독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분명한 진리였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신성모독이라는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를 통해서 절대 생명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사랑, 생명 경험


저는 지금 예수가 왜 생명인지에 대해서 주변적인 설명만 하고 있을 뿐이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답이 까다롭기도 하고 제가 경험하고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기에 어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으니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 무덤에 묻혔던 예수가 실제로 자신들의 일상에 나타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부활 경험입니다. 예수를 부활로 경험하니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비슷한 경험을 우리도 간혹 합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자식을 생각할 때도 그런 경험을 할 겁니다. 사람에게서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이들은 예수를 특별한 생명 존재로 경험한 것입니다. 죄와 죽음을 넘어서는 경험입니다. 죄와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이는 거꾸로 죄와 죽음으로 빠져드는 게 생명을 잃는 길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성취해야 한다는 유혹과 갈망, 그리고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면 생명을 잃습니다. 겉으로 살아있으나 죽은 거와 다를 게 없습니다. 그게 심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면 우울증이 됩니다. 약물로 우울증을 치료한다고 해도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쉽게 벗어나는 게 아닙니다. 복음서 기자들과 다른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얻는다고 믿었고, 그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마태복음 기자가 세례요한의 입을 빌려서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푼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그런 경험도 없고 믿음도 없는 거 같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여기 계신가요? 거꾸로, 확신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어느 쪽에 속하든지 여러분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수와의 실질적인 만남입니다.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건 한번 경험했다고 해서 계속 이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테니스를 1979년부터 쳤으니까 37년의 구력이 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잘 안 되는 게 공을 끝까지 보는 겁니다. 공을 라켓으로 쳐서 튕겨나가는 순간까지 집중해서 봐야만 공도 잘 나가고 몸도 망가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예수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데 한눈을 팔면 영적인 ‘엘보’가 옵니다. 예수를 생명으로 경험하여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를 더 깊이 아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노력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그런 노력이 없으면서 기독교가 말하는 절대생명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변명이고, 불행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세례로 만족하는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칭찬을 받을만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기독교 근본에서는 거리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불세례가 자리합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흉내만 내는 게 아니라 실제로 가까이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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