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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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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dabia.net/xe/922026 

믿음과 삶

정재현·연세대 신학과 교수, 전 성공회 대학 신학과 교수

-기독교에서 수행이 지니는 뜻과 더불어-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물어 ??마땅한 물음이지만 대답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게다가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앞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오히려 앞선 물음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통찰도 주목해 마땅하다. 종교의 연원이 죽음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생존본능과 떼어놓을 수 없으니 죽음이 없었다면 종교도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네 발로 기어 다니면서 유한한 본능의 만족으로 살다가 앞의 두 발을 들어 ‘직립인간’(homo erectus)이 되면서 본능의 유한성을 넘어서게 되었으니 이전에 알지도 못했던 무한한 욕망이 심겨지면서 바로 이 욕망으로부터 무한성을 배우게 되었는데 새로 힐끗이라도 보게 된 무한과 겪을 수밖에 없는 죽음 사이를 이으려는 몸부림이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적 인간’이게 했던 것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라는 것은 이미 사람이라는 것이 그 무엇인가를 넘어서고 구하도록 생겨먹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이도 삶의 자리에 따라 ‘믿음’과 ‘깨달음’으로 그 모양새를 달리 하기도 하니 전통과 문화의 다양한 꼴들은 그 좋은 증거가 된다. 신을 말하는 유태-그리스도-이슬람교와 같은 사막의 종교가 ‘믿음’으로 넘어서고자 한다면 힌두교-불교 등과 같은 초원의 종교는 ‘깨달음’을 구하는 것으로 비교되곤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인간은 그렇게 생겨먹었을까? 도대체 사람은 그 무엇인가를 왜 구하는가? 본 연구가 관심하려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묻는다면,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람이 이미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것인가? 그런데 이런 물음을 새삼스러우나마 되묻지 않으면 우리는 이미 그렇게 생겨먹은 대로 살면서 믿는 것을 대단하고 심지어 거룩한 것인 양 착각하게 된다.

 

게다가 문제는 이게 단순히 착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믿음과 얽힌 착각은 곧 자기를 절대화하고 심지어 신격화하는 데에까지 가려는 생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이를 되돌아보지 않으면 그 무엇인가를 믿고 있는 자기 자신의 굴레로 더욱 파고들어가게 되고 결국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붙들고 늘어지게 된다. 즉 자기의 믿음을 믿게 되는데 자기의 믿음이란 곧 자기 자신이니 결국 자신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신앙이 자기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최소한 이런 자가당착으로부터라도 벗어나려면 믿음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것은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안에서는 강박에 사로잡히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독단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확신이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믿음에 대해서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되돌아 볼 수 있을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우리 믿음에 대해서 물음을 묻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믿음에 대해서 묻게 되면 이것이 또 의심이나 회의를 거쳐 불신앙에 빠지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기독교 안에서는 물음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물음을 묻기 전에 이미 많은 대답들이 기라성같이 등장해 있으니 물음을 물을 겨를이 없기도 했지만 물음을 물을 필요도 없는 것처럼, 나아가 물어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지게 하기도 한다. 그동안 기독교는 물음표를 거부하고 마침표, 그리고 더욱 빈번하게는 느낌표를 남용해 왔다.  그러나 앞서 말한 이유를 보더라도 우리는 우리 믿음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에 대해서 물을 수 있을까? 물음을 나타내는 모든 의문사들이 믿음에 대해서 뜻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의문사들을 그 내용적인 연관성의 견지에서 몇 개의 물음으로 제한해서 살피고자 한다. 우선 ‘무엇’ 물음을 두 갈래로 물음으로써 믿음의 대상과 정체에 대해 되돌아보고, ‘왜’를 통해 그러한 믿음의 근거나 이유를 논하며, 나아가 ‘어떻게’라는 물음을 가지고 믿음의 방법에 새기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믿음이라는 것이 삶과 동떨어져서는 믿음으로서조차 성립될 수 없음을 밝히게 될 것이고, 이로써 깨달음 또는 행위/수행의 차원이 믿음에 대해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의 구성을 위한 본질과 정체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아울러 그러한 깨달음이나 수행이 은총에 대해 모순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음도 함께 밝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에 대한 물음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첫째 물음은 당연히 ‘무엇’일 것이다. ‘무엇’이 있지 않고서는 나머지 물음은 물을 수도 없고 물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믿음과 관련하여 ‘무엇’을 물을라치면 우선 ‘무엇을 믿는가?’, 그리고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 두 물음은 그 방향과 운명에서 서로 대조적이다. 앞의 물음이 바깥을 향한 것이라면 뒤 물음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고, 앞 물음이 많이 물어지고 그보다 더 많은 대답을 지녀왔었다면 뒤 물음은 의심과 회의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불순성의 혐의와 함께 오히려 억눌려져 왔었기 때문이다. 우선 순서대로 살펴보자.

 

1.  무엇을 믿는가?: 믿음의 대상의 비자체적 대상성

 

그런데 사실상 이 물음은 너무 많이 물어왔다. 아니 솔직히 말해 이 물음은 묻지도 않고 이에 대한 대답들만을 떠벌려왔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온갖 교리들이 대체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등장했었으니 이 물음에 대해 대답을 들먹거려가면서 더 곱씹을 이유는 별로 없어 보인다. 다만 교리라 하고 보니 중국집 메뉴판에도 순서가 있거늘 교리에도 마땅한 순서가 있을 터인즉, 교리는 과연 신론으로부터 시작해 왔다. 자고로 종교인데, 신을 믿는다는데, 신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교리에서 신론의 지위는 적어도 전통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아직도 막강한 최우선 순위에 군림해 오고 있는 것은 부인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어서 나오는 그리스도와 성령에 관한 이야기들을 비롯하여 교회를 둘러싼 수많은 주장들이 ‘무엇을 믿는가?’라는 물음을 일단 전제하고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점은 새삼스러운 지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되물을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물음에 대해 그동안 제시되었던 대답들은 과연 재론의 여지없이 타당한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들이 기도할 때, 그들이 부르는 신인 ‘하느님’은 어떤 존재인가? 그 존재는 과연 하느님 그대로인가? 만일 그렇다면 교회사에서 전개된 다양한 교회전통이나 교파의 분열, 심지어 개교인들 사이의 신관 차이를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 결국 그렇게 불리는 그 존재는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이라기보다는 저마다의 방식을 따라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일 뿐이다. 게다가 이 하느님도 아무런 전제나 조건 없이 믿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믿는 것이니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느님’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믿음의 대상이란 대상이 가리키는 바로 그 자체가 아니라 믿는 쪽에서 그려내는 꼴과 틀에 담기는 한에서라는 말이다.

 

사실상 우리는 누구나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느님’에서 시작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이미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믿도록 생겨먹었다. 그리고 이는 기독교 창조신앙에 의하면 조물주의 섭리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겸손하게 깨닫고 성서가 가르쳐주는(teach) 바와 같이 ‘믿고 싶은 대로’를 넘어서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 또는 성서의 맥락에 맞추어 표현한다면 ‘내가 맞닥뜨린 하느님’을 만나야하고 더 나아가 성서가 가리키는(point to) 바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을 향해 무장해제를 해야 할 일이다. 말하자면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은 다만 가리켜질 수 있을 뿐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저편이다.

 

그런데 누구도 예외 없이 이미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나님’에서 시작하는데 그런 줄을 모르면 자기만큼은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의 경지에서 시작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러한 착각은 신(神)과 신(信)을 혼동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니 여기서 믿음은 문자 그대로 절대적이어서 이 ‘그대로’와 다른 것은 그저 나름대로 ‘다름’이 아니라 아예 ‘그름’이거나 ‘틀림’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바로 독단의 지름길이니 자기강박을 확신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다. 혼자만 옳다는 믿음의 절대성 주장은 그 모양새가 거의 집착적이거나 마술적이어서 일상적인 삶과는 따로 놀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자랑으로 삼으니 여기서 그러한 믿음이 깨달음과 수행의 가치를 눈치라도 챌 가능성조차도 있을 수도 없다. 오히려 깨달음이나 수행은 믿음의 절대성에 방해가 된다고 여길 따름이니 그 대책에 대한 연구는 범종교적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추리자면, 우리가 시작하는 첫 단계인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느님’에서 ‘믿고 싶은 대로’에 주목하여 이를 성찰함으로써 믿음은 깨달음과 수행의 과정을 시작할 수 있고 또한 그러해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느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가? 이 물음에 대해 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의 또 다른 물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2.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의 정체의 원초적 편향성

 

그렇다면 과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이 물음은 앞서 살폈던 ‘무엇을 믿는가?’라는 물음과는 정반대로 막상 대답을 하려면 너무도 막연하다. 믿음과 ‘무엇’을 이으면서 나올 수 있는 두 개의 물음들이 이토록 대조적인 형편에 처하게 되는 것이 꽤 오묘한 일이지만 이는 결국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동의나 인정, 또는 수용인가? 아니면 참여와 행동인가? 혹 그것도 아니면 느낌이나 기분인가? 이것만도 저것만도 아니라면 도대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는다는 것을 믿고 있을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물음이 이렇게 되면 더욱 막연해지기도 하는데 여기서 ‘믿음을 무엇으로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대체함으로써 실마리를 풀어도 좋겠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서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 자리하는가?’를 물어도 좋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묻는다면 대체로 ‘마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답의 옳고 그름은 나중에 살피기로 하고,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는 것도 마음이 하는 일이고, 느끼는 것도 마음이 하는 일이며, 뭔가 뜻을 품는 것도 역시 마음이 하는 일이다. 그 이외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뒤져보아도 좋겠지만 역시 이 셋 중 어느 하나로 추릴 수 있다. 마음을 굳이 정신이라고 한다면 생각과 느낌과 뜻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받아들여지는 정신의 세 요소인 지성(知性)과 감정(感情), 그리고 의지(意志)로 각각 정리될 수 있다. 결국 믿음이 일어나는 자리로서의 마음이 이러한 갈래들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믿음의 얼과 꼴이 또한 그러한 마음의 갈래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될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믿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선 생각하는 마음자리에서 믿음은 ‘무엇을 믿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추리고 받아들이며 새기는 것을 가리키지 않을까 한다. 성경공부나 교리학습을 중시하는 태도가 좋은 예에 해당한다. 또한 느끼는 마음은 예배나 부흥회와 같은 종교적 행위를 통한 정서적 감동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뜻하는 마음에서 믿음은 삶의 실천을 위해 도덕을 강조하고 실천적 행동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들은 공히 믿음의 요소들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개개인 안에서는 마음을 이루는 이 세 요소들이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지 않고 어느 한 쪽으로 집중적이리만큼 쏠려있는 모양새를 취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한 쪽으로 쏠린 채로 지어졌거나 생겨먹었다. 그러기에 세 요소들에 따른 성격과 심리유형분류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앞서 말한 바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느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울러 인간의 정신문화 활동 중에서 문학의 경우 주지주의, 주정주의, 주의주의 등이 그 좋은 예에 해당할 것이며, 음악이나 미술 등 예술에서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들은 우리가 마음의 갈래에서 서로 다른 어느 한 쪽으로 쏠려 있는 것이 긴장과 갈등의 소지를 품고 있기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는 조화와 공존을 위해 그러한 다름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존재로 설계한 조물주의 창조섭리를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문학이나 예술에서는 서로 다름이 다양한 사조의 원천이 되는 데에 비해 종교의 영역에서는 한 쪽으로 쏠림에 의한 다름이 그 방식만을 고집하거나 가장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지닌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지성적 신앙은 성경이나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근본주의적 문자주의인 성경주의나 교리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교리주의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이렇게 되면 이러한 지성적 방식의 믿음만이 옳다거나 가장 좋은 것이라는 주지주의적 교만에 빠질 수밖에 없다. 또한 감정적 믿음은 종교적 감동을 최고의 목표로 추구하기 때문에 예전주의나 열광주의와 같은 주정주의적 착각으로 왜곡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의지적 믿음은 도덕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오히려 사람을 억누르는 도덕주의로 변질되거나 실천을 명분으로 하는 행동지상주의와 같은 주의주의적 독선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국 어느 갈래이든 한 부분에만 치우치게 되면 이러한 왜곡은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왜 그런가? 문학이나 예술은 삶의 표현방식이지만 믿음은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믿음의 자리가 삶의 전 영역이 아니라 마음에만, 그리고 마음 중에서도 한 갈래에만 머물게 되면 안정을 구해야 하는 믿음은 그러한 갈래들 사이의 긴장스러운 생리를 견디지 못하고 쏠려진 한 쪽을 전체로 둔갑시키는 절대화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것도 생겨먹은 꼴에 따른 편향성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오류는 자기도취적 우상주의의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스스로는 진단조차 할 수 없다는 데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이제는 믿음의 자리를 그저 마음으로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느님과 관계함으로서의 믿음이 인간의 어느 한 구석에서만 벌어지는 것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어불성설이요 언어도단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성, 감정, 의지라는 세 갈래를 다 묶어봤자 정신인데 믿음이 육체 없이 정신에만 자리한다고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느님과 관계하는 행위로서의 믿음에 우리가 전존재로 참여해야 하는 것이라면 믿음의 자리는 정신과 육체의 분리 이전의 전인(全人), 즉 ‘통사람’이어야 하며 이를 한 마디로 푼다면 곧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유행처럼 회자되는 영성(靈性)이라는 것도 바로 이를 가리킬진대, 영성은 지성, 감정, 의지에 따라 나오는 제 4 요소가 아니라 이를 모두 아우르는 마음과 내밀려졌던 몸이 하나인 몸의 차원으로서 삶을 일컫는다. 결국 믿음의 자리는 곧 삶이고 그래야 마땅하다. 즉 믿는다는 것은 곧 그렇게 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믿음의 영역을 마음의 갈래로부터 삶의 모든 영역으로 펼쳐내었다. 그리고 이는 마땅한 과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믿음과 삶의 일치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믿음이 수행을 포함하여 행위의 차원을 지니지 않으면 믿음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결정적 이유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냥 그렇게 잘 살면 될 일이지 굳이 믿음이 덧붙여져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래서 우리는 더 깊은 뿌리물음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깔고 있으면서 동시에 향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도대체 왜 믿는가?

 

3.  왜 믿는가?: 믿음의 이유, 그리고 결국 이유 걷어내기

 

그렇다면 우리는 왜 믿는가? 대답하려면 다소 당혹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 물음은 사실상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뿌리에 깔려 있는 물음일 뿐 아니라 거슬러 ‘무엇을 믿는가?’보다 앞서 물어져야 할 물음이다. ‘왜’가 그럴 듯하게 깔리지 않고서야 무엇이 ‘무엇’이든 별 뜻을 지니지 않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사에서 ‘왜 믿는가?’라는 물음은 믿음의 뿌리에 대한 불경스러운 시비라는 판단과 함께 신성모독의 죄명이 뒤집어씌워진 채 억눌려져 왔다. “믿는다면 무조건 믿을 일이지 어디서 감히 ‘절대적인 믿음’에 대해 ‘왜’를 묻는가?”라는 불호령과 함께!

 

그러나 ‘왜 믿는가?’라는 물음은 단지 이런 이유로 물어지지 않았을 뿐 누구도 예외 없이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저마다 삶의 밑뿌리에 깔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단지 묻지 않으니 나름대로의 대답을 저마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겨를이 없었을 따름이다. 애써 이 물음을 새삼스러이 물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게 묻지 않으면 비록 의식하지 못할지언정 저마다의 대답을 굳건히 다져감으로써 결국 자기우상화의 굴레에 빠지는 줄도 모르게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로 다시 묻는다: 도대체 왜 믿는가? 물론 믿음의 이유를 말하자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많더라도 이를 모아 기독교식으로 표현한다면 대체로 ‘구원’과 관련될 것이다. 말하자면, ‘왜 믿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결국 ‘구원받기 위해서’라는 대답으로 추려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대체 종교의 존재이유를 생각할 수도 없겠기 때문이다. 물론 ‘구원’이란 말도 그 뜻이 여러 갈래여서 함께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다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뜻이 우리의 초점은 아니다. 구원이 믿음의 왜에 대한 대답이라면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믿음과 구원의 관계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구원받기 위하여 믿는다’는 너무도 당연한, 아니라면 도대체 믿을 이유가 없다는, 이 대답은 구원을 믿음의 목적으로 간주함으로써 간단하게도 믿음과 구원을 수단과 목적의 관계로 설정한다. 여전히 당연한 듯이 보이지만 여기서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다. 물론 구원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고백은 분명히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은총이라면 당연히 ‘무조건’이고 그러기 위해서 인간의 믿음을 포함한 어떠한 것보다 앞서는 ‘선행’(先行)이어야 한다. 그런데 ‘구원받기 위하여 믿는다’면 구원이 믿음이라는 수단에 대한 목적이라는 조건적인 관계에 놓임으로써 ‘무조건’이 손상되고, 또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 목적보다 앞서 등장하는 것처럼 구원보다 믿음이 앞서게 됨으로써 ‘선행’에 어긋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구원받기 위하여 믿는다’는 것이 당연한 듯이 자리를 잡으면 한술 더 떠서 ‘믿음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데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때문에’는 믿음과 구원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묶는다. 그나마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서는 목적에 무게 중심이 실리지만 이제 인과율에서는 원인에 무게가 실리니 믿음이 주도권을 쥐게 되고 구원은 부속품이 된다. 말하자면 믿음을 주고 구원을 받는다는 계산적인 거래 분위기를 떨치기 어렵다. 믿음을 투자했으니 구원은 마땅히 주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인과율은 목적론보다 더욱 옹골찬 조건적인 관계일뿐더러 원인이 결과에 앞서니 믿음이 아예 구원을 끌어냄으로써 선행성이란 온 데 간 데 없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해서 구원은 목적도 아닐 뿐더러 결과도 아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무엇보다도 믿음에는 ‘왜?’라는 물음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믿음에 달리 이유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아니 엄밀하게 말해서 믿음에는 이유가 없어야 한다. 따라서 ‘왜 믿는가?’라는 물음은 물어질 수 없는 물음이다. 삶에 달리 이유가 없어 [Leben ohne Warum] ‘왜 사는가?’를 물으면 ‘그냥 웃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믿음에도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없어야 한다. 이른바 ‘무조건적인 믿음’이다. 구원 뿐 아니라 믿음도 무조건적인 은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를 일컫는다. 말하자면 믿음이 곧 구원인 것이다. 사실상 구원은 차치하고라도 믿음이라는 것이 이미 신비요 기적이 아니던가?

 

그런데 여기서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 있다. ‘무조건적인 믿음’이라는 표현 말이다. 이 표현을 가지고 혹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믿으려면 무조건 믿어야지 뭘 그리 따지나? 그래 가지고 제대로 믿을 수나 있겠나?” 이 물음은 독실하다는 기독교인들이 묻고 싶어 하는 물음이다. 물론 무조건 믿는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오해되어 ‘맹목적인 믿음’으로 둔갑하고 있다. 무조건적’이라는 것이 문자 그대로 ‘조건이 없다’는 것인데 ‘조건이 없다’는 것은 ‘따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게 되고 이는 곧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거쳐 ‘덮어 놓고 맹목적이게’ 되는 데에 이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표현은 ‘무조건적’이라고 하지만 결국 ‘맹목적’인 것을 뜻하게 된다. 그런데 ‘무조건적’에 대해 ‘맹목적’은 단순한 변질이 아니라 정반대의 양태이다. ‘맹목적’이라는 것은 무수한 조건이 얽혀 있음을 보지 못하니 ‘지극히 조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왜곡을 올곧게 직시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맹목성 안에 덮여지고 숨겨져 있는 조건적 욕망의 얽힘을 되돌아 살필 길이 없게 된다. 실상 맹목적인 믿음일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믿음’을 내세우면서 이를 구실로 깨달음과 수행을 인간의 노력과 업적이라고 몰아붙이면서 거부하는 작태가 바로 그 좋은 증거이다. 그러나 진실로 ‘맹목적인 믿음’이 거절하는 깨달음과 수행이야말로 참으로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러한 수행이 믿음에 엉켜 붙어 있는 욕망이라는 조건들을 제거해 나가는 행위이고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물음은 ‘어떻게 맹목적인 믿음에 빠지지 않고 무조건적인 믿음으로 향할 수 있는가?’라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말하자면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가 우리의 다음 물음이 된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믿음과 수행의 관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곱씹을 수 있는 터이기도 하다.

 

4.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믿음의 길로서의 깨달음/수행

 

‘왜 믿는가?’를 물으면서 우리는 믿음과 구원 사이에 깔려 있는 너무도 당연한 듯이 보였던 고리를 끊어내어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 고리야말로 믿음을 결국 구원에 대한 욕망으로 전락시키는 족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믿음이 ‘깨달음’이나 ‘갈고 닦음’을 거부해 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 고리를 끊기 위해서 우리는 구원 뿐 아니라 믿음도 곧 은총이라는 점에 새삼 주목하였다. 말하자면 믿음도 은총이라면 믿음이 구원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곧 구원이라는 것도 결국 이것을 가리킬 터이니 믿음과 구원이 하나가 되는 은총을 받아들이면서 욕망을 떠올린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믿음이 곧 삶이어야 한다면 삶이 달리 이유가 없듯이 믿음도 달리 이유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믿음’이란 바로 이를 일컫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현실은 이를 심지어 정반대인 ‘맹목적인 믿음’으로 왜곡시켰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참으로 무조건적인 믿음을 향하는 길에 대해 묻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그런데 이 물음을 앞서 생각했던 믿음과 구원의 관계에 적용한다면 ‘구원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믿음을 어떻게 해방시킬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구원이 은총이라는 점에 다시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원이란 인간의 행위나 업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은총에 의한 것임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우리들은 암암리에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는 구원 여부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한 나머지 우리들 스스로 구원에 대해서 판정하려고 덤벼든다. 이른바 ‘구원에 대한 확신’을 빌미로 하느님의 자리를 마구 넘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야말로 하느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기가 대신 앉아버리는 ‘실제적 무신론’일 따름이다. 이럴 정도로 기독교인들은 구원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 구원은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이라고 해 놓고서도 인간들이 구원에 대해서 엄청스레 노심초사한다. 이래서 ‘천당 가기를 바라는 무수한 종교적 영혼들이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는지도 모른다.

 

혹자는 ‘욕망’이라는 표현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희망’이나 ‘기대’라는 말로 대체하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떠올리게 되면 이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는 욕망으로 바뀐다. 구원을 인간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인 양 착각하는 순간 욕망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구원에 얽힌 무수한 욕망들을 더 이상 숨기지 말고 진솔하게 시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구원에 대한 ‘바람’마저도 접어야 하는 믿음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쉽지 않은 물음이다. 그러나 마침 예수가 좋은 길을 가르치고 몸소 보여주셨기에 이 대목에서 그 분의 한 말씀을 모실 일이다. 세 복음서에 함께 나오는 구절인데 누가복음서의 구절이 가장 확대판이어서 이를 택한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누가 9:23).

 

이 말씀은 사실상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 뿐 아니라 앞서 살폈던 모든 물음들에 대한 대답을 안고 있는, 그야말로 그리스도 신앙의 결정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할 때 기왕 앞서 던져졌던 물음들에 대한 대답부터 살펴보자. 우선 ‘무엇을 믿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대답했던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느님’에 대해서 ‘믿고 싶은 대로’를 정면으로 거슬러 넘어서야 함을 단도직입적으로 일깨워준다. 다음 물음인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 말씀은 “나를 따르라”는 주문을 통해 ‘따름’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런데 따름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그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하는 것과는 달리, 자기 기득권을 포기하고 언제든지 어디로든지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 무엇인가를 더 많이 받으려고 하지만 따름은 지킴이나 받음과는 달리 자기의 중심적인 자리를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따름은 순간적인 마술과 같은 동의나 즉각적인 수용이 아니라 깨달음과 수행이 함께 얽히면서 지속적으로 엮여져가는 삶의 과정이다.

 

그 다음 물음인 ‘왜 믿는가?’에 대해서 이 말씀은 오묘한 화법을 통해 이유를 캐 들어갈 수 없는 믿음의 무조건적인 경지를 드러내준다. 즉, “나를 따르려거든  ...  나를 따르라”라고 말한다. ‘구원 받으려거든’이나 ‘복 받으려거든’, 또는 ‘잘 살고 싶거든’이 아니라 “따르려거든 따르라”라고 선언한다. 조건절의 형식을 취하지만 동어반복을 통해 조건의 얼개를 깨부수는 절묘한 수사이다. 말하자면 ‘따르라’에 앞서 어떠한 조건도 전제되어 있지 않음을 명백히 함으로써 ‘따름’으로서의 믿음의 무조건성을 확연하게 선포한다. 믿는다는 것이 곧 따름이라고 할 때, 이 따름은 그에 앞서 어떠한 조건도 깔지 않는, 그야말로 무조건적인 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결론적으로 논해야 할 마지막 물음, 즉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 말씀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앞의 이야기와 연관하여 다시 묻는다면, ‘어떻게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가 바로 이에 대한 가장 핵심적이고도 직설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는 긴 이야기를 생략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보여주셨던 것처럼 자기를 비우고 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앞서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하느님’에서 시작하는 줄 모르고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인 줄로 착각하는 자기절대화가 빠질 수밖에 없는 자기도취로부터 헤어 나오라는 ‘자기 비움’의 일침이다. 물론 불가에서도 무아(無我)론이나 공(空) 사상 등 이와 유사한 가르침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목에서 과연 우리에게 자기 비움이라는 것이 말처럼 가능한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에 연관하여 그 가능한 뜻을 더듬는다면 현실에 얽매이지 말고 초월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극단적인 자기멸절(self-annihilation)이 결코 아닌 자기부정(self-negation)은 이렇게 ‘현실초월’을 향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버리고 비우기 위해, 즉 현실을 초월하기 위해 현실을 벗어나 탈속수도를 시도하였다. 그런데 자기를 버린답시고 현실과 세속을 벗어나다보니 부지불식간에 ‘현실도피’로 전락할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인간 심성의 이러한 폐부를 꿰뚫어 보신 예수의 말씀은 그러기에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곧 이어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엄청난 주문이 따라 나온다. 그런데 “자기를 버리고”가 ‘현실초월’을 가리킨다면 이제 “자기 십자가를 지고”는 자기가 처한 현실에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로써 현실초월을 구실로 하여 현실도피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계하는 균형 잡기라고 하겠다. 나아가 대속적 구원만을 명분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우상화하려는 종교적 욕구를 정면으로 깨부수는 명령이다. 앞선 이야기에 잇댄다면 ‘하느님 그대로의 하느님’이라고 착각하면서 빠지게 되는 우상숭배를 벗어나라는 우상파괴의 명령이기도 하다.   
  
아울러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을 명분으로 자기교만에 빠질까를 경계하여 “자기를 버리고”라는 앞의 말씀이 겸허를 주문하는 것으로도 읽어야 할 일이다. 결국 이 두 말씀은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적으로 한데 얽힘으로써 자기도취적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통속적 종교성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준엄한 요구가 된다. 단언하건데 자기 비움(kenosis)은 우상파괴(iconoclasm)이다. 그러기에 믿음은 수행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비움과 파괴의 수행은 은총에 모순될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비움과 파괴야말로 은총의 증거이다. 은총 없이는 비움이 불가능할 터이고 비움이 불가능하다면 파괴도 물 건너가겠기 때문이다. 결국 각각 뜻을 세우되 서로 경계를 주고받음으로써 유기적인 삶의 얼과 꼴을 엮어야 한다는 이 가르침이야말로 기독교에서 믿음이 지녀야 하는 수행의 정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로써 기독교 안에서 오랜 세월동안 벌어져왔었던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한 부질없는 논쟁은 종식되어야 한다. 아울러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라는 종교개혁구호도 행위와 수양을 경시하는 천박한 신앙주의적 곡해로부터 건져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굳이 덧붙이자면, 실로 되묻건대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씀이야말로 종교적 인간이 종교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주문이 아닐까? 우리가 믿기로는 ‘죽어 마땅한 죄를 내가 지었으되 내가 그 분을 믿기만 하면 내 죄의 대가를 그 분이 대신 짊어지고 죽어주심으로써 나는 그러한 죽음을 건너뛰어 부활의 영생에 참여하도록 초대받는 것이 구원이라’고 수도 없이 들어온 것이 그간의 역사였는데, “자기 십자가를 지라”니? 그것도 “날마다”?

 

이래서 이 말씀은 즐겨 새겨지지 않는다. 아니 건너뛰어야 하는 지뢰밭처럼 간주된다. 그러지 않고서는 교회의 장사(?)가 잘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들어야 할 소리’보다 ‘듣고 싶어 하는 소리’를 연출해 주어야 교회가 부흥(?)된다는 현실의 역리는 이 말씀을 ‘걸림돌’로 여길 수밖에 없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로 기울어져 있는 현실의 기독교는 바로 이런 이유로 믿음에서 깨달음과 수행을 거부하고, 수퍼맨의 마술과 같은 모양새를 취하는 구원에 대한 환상을 믿음으로 간주한다. 말하자면 값을 측정할 수 없는, 그래서 ‘값없는’(priceless) 은총을 ‘값싼’(less price) 은총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러나 깨달음과 수행을 포함해야 하는 ‘자기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대속 십자가’는 종교적 이기주의의 발상일 뿐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대속의 은총이 개입할 리도 없다. 이 대목에서 독일의 히틀러암살단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세계 2차 대전 종전 직전에 안타깝게도 처형당한 젊은 신학자의 절규가 우리를 파고 든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유별나게 종교적이 된다거나, 어떤 특수한 방법을 통해서 자기를 인위적으로 (죄인으로서나 회개하는 자로서나 성자로서)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인간은 어떤 특수한 형태의 인간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창조하는 새로운 인간이다. 왜냐하면 한 인간이 굳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특정한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신의 고난에의 동참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천당 가기를 사모하는 종교적 영혼보다 자기를 비우고 내어주는 인간적 영혼이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 그리고 믿는다는 것은 곧 그렇게 산다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과연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서 일어날 수 있을까? 마땅히 그러해야 하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한 분뿐이며 그는 이미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니체의 조소가 예수 자신의 탄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끝.


2014년  11월에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와 한국교수불자연합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학술대회 "믿음과 수행, 그 접점을 찾아서"에서 개신교 측 대표로 발제한 정재현 교수의 발제문 <믿음과 삶-기독교에서 수행이 지니는 뜻과 더불어> 전문을 여기에 올립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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