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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8:1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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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8장 18, 19절: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무리들 틈에서 한 서기관이 나아왔습니다. 하는 말이 ‘선생님을 따라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아가겠습니다’ 정말 훌륭한 사역자가 나왔습니다. 큰 일꾼이 나왔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나왔을까? 서기관은 율법학자요 종교교사입니다. 최고의 학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인간들이 볼 때에는 정말 큰일을 할 수 있는 큰 그릇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후계자 감인지도 모르지! 스스로 나섰으니 사명자요,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겠다고 하는 것을 보니까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순교를 할 수 있는 순교자가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 할렐루야’ 하면서 안수를 했고, 큰 일꾼이라고 ‘능력을 받아라’ 하고 능력을 주었고, 직분을 주어 큰 일꾼으로 삼았느냐? 그가 성경학 박사요 학자니까 예수님을 3년 동안 안 따라다녀도 고속으로 즉석 일꾼으로 세웠느냐? 예수님께서 그런 식으로 일꾼을 세우더냐?
8장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서기관은 보았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
①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병자를 고쳐주는 것을 보았고,
② 무식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 삼으려고 에워싸는 것을 보았고.(무리들이 모이는 것)
③ 제자라곤 무식하게 보이는 어부들로만 보입니다.
그래서 ‘내가 더 성경에 대한 학식이 많고, 학자요 선생이요 종교계에서도 사회적으로도 알아주니 아무렴 어부들보다도 내가 모든 면에서 나을 것이다. 내가 수제자가 될 인물이니, 아니 예수선생보다 내가 성경을 더 많이 알고 있으니 예수선생이 저편으로 가기 전에 인정을 얻어 놓자. 그리고 병 고치는 능력도 얻고, 많은 무리들이 모일 것이니 그렇게 되면 한 번 세계가 떠들썩하게 뭔가 해 보아야 되겠다’ 하는 그 영웅성.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모르실까?
지금도 보면
① ‘나도 병 고치는 능력을 얻어서 영웅이 한 번 되어보자’ 하는 사람도 많고,
② 사람 모으는 방법을 알아 가지고 가르치고 이용하여 나의 발판을 삼자.
이런 거짓되고 허황된 마음을 주님께서 모르실까?
주님과 인격적인 결합적인 대면은 없고 사람이 만들어지지 않은 채 뭘 배워 가지고 써먹겠다는 것. 주님은 그런 사람을 쓰지 않습니다. 일을 크게 했는데도 사람 안 바꾸어진 것을 보고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했지 않았던가!
서기관이 ‘선한 선생님이여’ - 메시아이신 주님을, 창세적 선재적 그리스도였던 주님을 이 서기관이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느냐? 주님을 주님만큼 몰라보는 성경을 가르친다는 이 학박사가 자기 주관적 타락적 계획이 들어 있어 가지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주님이 그 마음을 왜 몰라!
주님께 쓰임 받으려면 그 알량한 존칭과 그 마음을 내어버리고 주님이 직접 부른 제자인 어부들보다도 더 저 아래로 팍 내려앉아서 교만한 마음을 회개하고 3년을 따라다니면서 배워도 시원찮을 텐데 자기가 무엇이나 된 것처럼, 또 무엇이 될 것처럼 나서다가 주님에게 퇴짜를 맞은 것입니다.
먼저 사람 되는 정신을 모르고 주님을 위해 몸 바쳐 사명자로 살겠다고 하면 그만 사람 다 된 줄 알고 받아들입니다. ‘내가 충성봉사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 하면 ‘웬 떡이냐!’ 하고 그만 그런 사람을 씁니다.
① 자기가 주격이 되어서 일을 하겠다는 거와,
② 주님께 불림을 받아서 사람이 만들어지는 거와,
③ 사람을 만들어 보려고 일을 도와달라는 거와는 모두 그 의미가 다릅니다.
① 말씀에 피동적 자원적 능동적인 사람과,
② 자기 주관적 능동적 자원적인 사람과,
③ 명령적 피동적으로 사는 사람과는 신앙에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격이 강한 자를 큰 일꾼이다 했다가는 그야말로 큰 일 납니다. 그리고 교역자 입장에서는 가르치기 이전에 ‘내가 먼저 확실히 깨닫고 많이 만들어져야 되겠다’ 하는 그 마음을 가지면 가르치는 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내가 많이 배워서 가르쳐야지’ 하는 마음은 자기 만들어짐이 없으니 속에 인간 타락적 주관성이 즉, 옛 사람이 주격으로 되어 있는 사람이니 빨리 회개를 해야 할 사람인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서기관이 ‘예수 선생이여’ 하는 그런 신앙의 성질입니다. 주님이 퇴짜를 놓는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8장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서기관이 주를 따라 어디든지 가겠다고 한 말끝에 하신 말씀입니다.
여우는 땅의 짐승이고 썩은 시체를 뜯어먹고 삽니다. 생명이 없는 고기 덩어리를 먹고 사는 여우도 굴이 있습니다. 저 여우같은 헤롯도 궁궐이 있습니다.
공중에 날고 있는 날짐승은 여우보다 높이 삽니다. 독수리로 말한다면 썩은 시체를 먹고 삽니다. 독수리는 로마 가이사 황제의 마크입니다.
공중의 나는 새는 바람을 타고 날음입니다. 바람을 잘 타고 날으면 날개가 커야 되고, 정치계 종교계 문화 예술계 과학계에 발이 넓어야 됩니다. 모두 자기가 거처할 집들이 다 있고, 모두 다 노후대책에 걱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겐 그게 없습니다. 병을 고쳐준 자들에게 헌금을 얼마 내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예배당도 번듯하게 지은 것도 없고, 전도를 다녀도 멀리 가서 전도하다가 해가 지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잠 좀 자고 갑시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고,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번듯한 경력도 학력도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따라 다니며 전도해도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고, 예수는 세상 것을 가지려는 욕심은 털끝만치도 없고,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권으로 막강한 바리새교파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로마가 예수님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미움의 대상이니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뭐 큰 비전이 있는 것을 내어놓을 줄 알았는데 말을 들어보니 그것도 없습니다.
20절에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예수 선생 따라봐야 별 볼일 없겠구나’ 생각이 되어 언제 가버렸는지 모르게 그만 없어져 버렸습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기가 바라는 기대가 없는 줄 알고 포기를 한 것이지만, 그런데 20절의 그 말씀의 뜻을 잘 새겨들었더라면 영원한 존영자가 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만 은밀계시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했는데 ‘인자’는 글자 그대로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인데 사람의 아들이란 신학적으로는 인성(人性)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사람의 아들’ 이라는 말은, 그 깊은 뜻은 참 진짜 사람이라는 본질이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 아무리 훌륭하고 유명하다고 알아주는 사람이라도, 왕이고 황제라도 참 사람의 본질로 된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전부는 선악과를 따먹고 영은 죽었고, 이성과 육도 죽어 가는 타락적 기존지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참 사람의 본질로 된 사람이 어디 있느냐? 참 진짜 사람으로서의 우러러보고 돋보이고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전부는 해 아래의 것이요, 본능성적으로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선생이라는 분은 보통 선생이 아니고 정말 사망과 죽음에서, 죄에서 해방시키실 오실 바 메시아로구나! 주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되었으면 큰 은혜, 큰 사랑을 받았을 터인데 성경을 달달 외우고 성경을 가르치는 학박사인데도 듣는 귀가 없었다니 참으로 불쌍한 자입니다. 그러나 서기관 자기는 불쌍한 자라는 것을 모를 테지. 도리어 예수선생을 참 불쌍하게 볼 테지.
8장 21, 22절: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이 제자는 예수님을 이미 따르고 있었는데 말하는 투로 보아서 부친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① 아버지가 나이가 많으셨던지,
② 아버지를 모실만한 형제가 없었는지,
③ 자기가 장자였는지?
어쨌든 부친을 사랑했고, 부친 걱정이 대단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른 자는 야고보 형제와 요한입니다. 본문이 야고보와 요한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문제는 딴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면
① ‘부친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장례를 치르고 와서 또 따르겠습니다’ 그게 하나 있고.
② ‘부친이 지금 살아 계시는데 부친을 부모공경으로 모시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는 두 가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허락을 해 주십시오’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허락을 아니 했습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큰 사건이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인륜적으로도 큰일이요, 부모를 섬기는 것이나 부모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나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구원을 위한 말씀이라고 하나 이해가 쉽게 안 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이런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자기를 등용하여 국가의 중대한 일로서 시간을 다투는 어떤 일을 맡겼을 때 자기의 집안에 아무리 급한 일이 생겼어도 국가의 중대한 일을 버리고 지기 집 일부터 하겠다고 집으로 가지를 못합니다. 이런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합니다. 무엇이 큰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또 한 예를 든다면 전쟁이 터졌다 그랬을 때에 자기 집 일이 더 급하다고 집에 갔다 와서야 전쟁이 되겠느냐? 이미 끝난 것인데! 말하자면 자기가 살겠느냐? 자기 집인들 있겠느냐? 이제 이런 것도 사람들은 다 이해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복음의 일은 이런 일보다도 덜 급한 것이냐, 더 급한 것이냐? 주님이 어떤 분이시냐? 주님은 창조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신령계와 물질계를 우리 예수 믿는 성도의 구원을 위해서 주권적으로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을 태어나게 하는 분이시요, 부친의 일생을 마치게도 하는 분이시요, 그렇게 하심도 주님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전부는 우리 인간 자기를 위하심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 인간성도 자기를 위한 주님의 구원운동은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부터 창세 이후로 마지막 그 날까지 계속 머뭇거림 없이 중단도 없이 주님께로 따라오건 말건 그대로 진행입니다. 주님이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자’ 했는데 제자가 부친을 장사하고 올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구원 스케줄은 내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로서 가야 할 순서입니다. 되 물림도 없습니다.
제자로서 닦아야 할 자기의 구원도 오늘 이룰 것이 있고 내일 이룰 것이 있습니다. 오늘 이루지 못한 구원을 내일 이루자 하는 그게 없습니다. 오늘 이루지 못한 구원은 내일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제는 어제로서 영원으로 사라졌고, 오늘은 오늘로서 영원 속으로 묻혀 버립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닙니다. 어제는 가버린 나이고 오늘은 다시 시작하는 나입니다. 주님의 구원역사는 시간이 없습니다. 진리생명은 인간 자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제자 자기는 부친을 장사하러 간 사이에 주님은 바다 건너 가버렸습니다. 장례 치르고 다시 온다고 하더라도 바다 건너가면서 이루어지는 구원은 영원히 없습니다. 구원의 실감은 맛보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자타에게 영원히 연관될 구원입니다. 목숨이, 영이 죽은 자는 영이 죽은 자들로 장사를 치르게 하고 너는 영을 살리는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타락된 주관성을 가진 자가 아무리 훌륭하고 주님과 같이 가면서 선생을 모시겠다 해도 이것은 받아 주지 않으나, 깨달음이 좀 부족하더라도 주님의 허락을 받아서 하겠다고 주님의 의사를 묻는 거기에는 주님께서는 성화구원에 손해보지 않도록 옳은 길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그 만큼 중요한 일이다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무리들의 신앙에는 이런 별의 별 것이 다 들어 있는 신앙입니다.
돌아가신 후 초상 치르는 것이 시급한가, 돌아가시기 전에 진리의 주님을 연관을 시키는 것이 더 시급한가? 죽은 자를 붙잡고 죽은 일을 하는 것이 시급한가, 산 자를 따르며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시급한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네 부모 형제 처와 자식을 버리고 너 죽을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오너라’
인정정실에 질질 끌려 다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입니다. 산 자들은 산 자를 쫓아가고 죽은 자들은 죽은 자를 따라 갑니다. 그들의 모든 활동과 이력과 업적은 땅에다가 매장을 합니다. ‘너는 그들의 소원 목적을 따르지 말라. 땅에다가 매장을 시키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일이니 생명 없어 죽은 것을 땅에 묻는 일을 너는 포기하고 산 자를 따르고, 부활할 자를 좇아라!’
형의 명령보다 아버지의 명령이 더 크고, 아버지의 명령보다 나라의 명령이 더 크고, 나라의 명령보다 주님의 명령이 더 큽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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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당신의 애성에서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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