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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마1:35-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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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0장 35절~37절: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가족이 형성되게 하신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원 근본목적은 우리의 영원 궁극적 성화구원입니다. 이것을 목적을 두고 제일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먹고 자고 깨고 대화하고 일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인격적으로 서로 사랑하고 제일 빨리 구원이 전달되고 입혀지라고 가족으로 결속을 시켜 주었는데, 그런데 연관구원이 제일 안 되는 것이 또한 가족들입니다.
왜 가족끼리도 불화하고 원수가 되느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보니
① 사랑의 상대가 달라지고,
② 인생 삶의 소원 목적성이 달라지고,
③ 지혜 지식성이 달라지고, 도덕성이 달라지고,
④ 선악 간에 바른 판단 평가성이 되니까 자동적으로 구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지는 이것이 정상적으로 바로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사문제는 타락된 인간이 귀신에게 제사하고 귀신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이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귀신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식구들과 원수가 되지 않으려고 슬며시 양보한 것이 제사가 둔갑을 해서 추도식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사단 마귀의 정복하는 술책인데 모르고 넘어간 것입니다. 슬며시 성경처럼 합리화된 것입니다.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은 세상 풍속 습관을 따르며 하나님과 원수 맺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만 찾아서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사는 자는 ‘내가 하루종일 어떤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나, 그런 곳이 없나?’ 하고 찾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정의 한 식구라도 빛 되신 진리의 복음이 들어가면 천국과 세상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종들은 복음과 세상과 합리화를 시키기 때문에 가정이 하루 빨리 바로 서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더 원수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출생할 때 세 가지 사랑만 가지고 나왔습니다. 상대적인 사랑 필레오, 이성적 사랑 에로스, 동족적인 사랑 스톨게. 이 세 가지 사랑은 가지고 나왔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아가페 사랑은 가지고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적 사랑으로서 하나님께서 예배로 통하여 주셔야 만이 우리 인간이 받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인간의 세 가지 사랑을 다 포함하고 있어서 이 아가페 사랑만 있으면 세 가지 사랑을 다 초월할 정도로 그 사랑이 강합니다. 인간의 세 가지 사랑은 육체를 가지고 있을 때 임시적으로 쓰여질 뿐 영원히 갈 수 있는 사랑은 아닙니다.
아비나 어미, 아들이나 딸을 예수님보다 더 상대적으로 필레오 사랑을 하면 예수님께 합당치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주님께 합당한 사랑이 되겠느냐 하면 자기 식구들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에게 유익이 무엇이며, 나에게 유익이 무엇이며, 식구들에게 유익이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이 우리를 위하심입니다. 주님은 사랑의 충만자이십니다. 주님의 고상한 진리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방편이 그러하십니다.
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덧입혀 주시고자 함이요, 이 덧입을 사랑은 영원히 천국에까지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누구나가 그 사랑을 가지고 사는 곳입니다. 인조사랑은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 합니다.
② 가족들에게도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
주님보다 가족들을 더 사랑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어 버립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영원히 죄 가운데 고통 중에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심입니다. 주님은 임시적 육적 사랑보다 영원한 신령한 사랑을 주시고져 함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성육신 하신 그 당시에는 눈에 보이니까 그 누구보다 사랑을 할 수가 있다지만 지금은 부활 승천하신 후이니 어떻게 집안 식구들보다도 더 사랑할 수가 있느냐? 그것은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했으니 곧, 진리로 사랑하면 됩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진리를 볼 때 성령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진리를 들을 때 성령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진리를 배울 때 성령은 함께 하십니다. 내가 진리를 줄 때 성령은 함께 하십니다. 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보고 배우고 깨닫고 만들어지고 전하는 이것이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진리로 자체화 시키려는 사람은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사상이 생활의 가치 판단 평가성이 영원 궁극적인 천국에 내려진다면 그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기서 문제가 또 하나 생겼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 하는 이것을 일반생활과 종교의식과 완전히 분리된 개념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꼭 종교적인 활동을 해야 만이 주님 사랑이고, 자기가 밥 먹고 사업하는 것은 주님 사랑이 아닌 개인 일이고 세상일이고, 전도하고 산 속에서 기도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이렇게 되면 돈 많은 사람, 할 일 없는 사람은 주님을 제일 많이 사랑하는 자가 될 것이고, 늘 가난하여 돈 버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도 종교활동을 못 하니 제일 사랑을 못 하는 사람으로 돼 버립니다.
종교활동을 하느라고 집이 쑥밭이 되는 집도 많습니다. 식구들이 밥을 굶습니다. 모두 집단화되는 짓을 하게 되고, 결국은 사단 마귀의 장난에 모두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날마다 사랑하는 것이 진리 자체화, 사상화 되면 다방면에 생활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성도 모두 다 각자 생활 속에서 주님의 사상화로 사는 것이 주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 하는 그 증거를 보여주기 위하여 교회 전체가 집단화되어 산 속에 들어가서 기도한다거나, 굴속에서 응답을 받는다고 40일 금식기도 한다거나 하는 이것은 다 귀신들의 장난이요 속임수입니다.
또 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냐 하면 진리의 말씀으로 주시는 진리사랑은 받지를 아니하고 일반 인간사랑으로 가정이 더욱 화목해지기를 바라는 그런 기도가 많다는 점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랑도 진리사랑이 아닌 인간사랑에 유혹되어 인간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인양 말을 하게 되니 그만 사람도 가정도 교회도 모두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도 버리고, 가정도 파산되고, 재산도 다 날려버리고......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먼저 사람이 정확하게 바로 깨달아지는 것을 말함입니다. 인간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확실하고, 세상이 어떤 곳인지, 천국이 어떤 곳인지,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인지 확실하게 깨닫고 세상을 바로 살게 됩니다. 만일 이것이 아닌 다른 요소로 사람의 마음을 붕붕 띄우고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것은 옳은 교회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10장 38, 39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주님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우리의 죄를 위해서 지신 십자가입니다.
①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혼을 살리는 십자가.
②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던 원죄를 도말시킨 십자가.
③ 우리의 죽었던 영원을 살린 십자가이신데,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인가?
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함이다?
②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함이다?
③ 자기 죽을 십자가이다?
자기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① 자기가 죽을 각오를 하는 것.
② 육신생명 죽을 각오.
③ 옛 사람이 세상과 함께 날마다 죽는 것.
이 각오, 이 결심이 없으면 예수님을 따르는데 지장이 많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반드시 교훈적으로 길 진리 생명으로 가야지 십자가를 지고 딴 길로 가는 것은 이는 개죽음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알아주지 않는 십자가는 도둑도 질 수 있습니다. 자칭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칭 사도, 자칭 목자입니다.
사실 이들이 말하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어려운 일들을 짊어진다는 의입니다.
① 다른 사람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감당한다든지,
② 다른 사람보다 애먹이는 사람을 자기가 맡았다든지 뭐 그런 것입니다.
내가 지는 십자가는 나를 잡아죽이는 십자가입니다. 세상과 옛 사람을 날마다 죽이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못 따라갑니다.
10장 39절: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우리 예수 믿는 기독자들은 생명이 둘입니다. 하나는 영의 생명, 하나는 육의 생명. 이 두 생명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피로 값 주고 사셨으니까! 중생된 영의 생명은 주격이 되고, 육신 자연생명은 복음을 위해서 투자되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이치를 몰라서 생명의 주격성을 모르고 자기의 자연생명, 육신생명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많습니다. ‘육신생명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를 믿으면 육신생명 도로 살려줄 것이다’ 라고 하며 예수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육신생명을 살려주고, 안 살려주고 하는 것은 주님의 주권에 매인 것인데 조건을 전제하고 믿는 신앙은 이것은 육에 속한 신앙입니다. 옳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방 불신 세상은 자연생명 하나만 알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생명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요’
육신생명 자연목숨은 복음을 위해서 투자하는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투자를 하면 자기의 자연목숨 전부는 죽지 않고 영의 생명에게 삼킨 바 되는 것입니다. 전부는 영생으로 통과되는 것입니다.
육신생명은 어차피 죽을 것. 이 죽을 목숨을 위하고, 이 목숨 때문에 살지 말고, 아끼느라고 호들갑을 떨지 말고 부지런히 영적인 실력을 위하여, 자타의 구원을 위하여 투자하라!
예수님을 바로 믿으려면
① 물질초월,→ ② 인정초월,→ ③ 목숨초월이 되어야 예수님을 바로 믿게 되고 성화구원이 잘 이루어져 나갑니다.
10장 40절~42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너희를 영접하는 자’
여기 ‘너희’는 사도들인데 사도들을 영접하는 자는 주님을 영접함이고, 주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함입니다.
어째서 그럴까? 그 이유는 주님께서 사도들을 보내실 때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을 넣어 주셨고, 그 사상과 정신을 넣어 주셨고, 성령의 감화 감동을 주셨고, 하나님이 같이 하는 역사를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사도를 맞아들인다면 개인적으로는 심령천국이 이루어질 것이고, 온 가정이 영접을 한다면 가정천국이 이루어질 것이고, 영접하는 자 모두에게는 인격적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집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거짓 사도들도 주님의 이름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복음의 본질을 모르는 자들과, 교회라는 것은 무슨 일을 하는 곳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들은 그만 거짓 사도들에게 속아 넘어가고 맙니다. 그래서 성화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믿음에 파산 당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모르는 이유는 첫째는 예수 믿는 자기의 소원 목적을 위해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육적인 소원 목적, 세상에 속해 있는 것을 이루어 달라고 하는 믿음입니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거와 똑 같은 것들입니다. 둘째는 거짓 사도들도 그런 것을 이루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 교회나 다녀보자, 이왕이면 큰 교회에 다니고, 예수 믿고 부자나 되어 보자, 예수 믿고 병이나 고쳐보자’ 하는 자들은 거짓 사도들에게 이용물인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가 잘못되어 있으면 위로부터 오는 은혜는 완전히 막혀 버리고 자기의 신앙 일생 다 도적맞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은 심판대로 받고 맙니다. 참말로 두려운 일입니다.
10장 41절: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 선지자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미리 말씀을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미리 예언하는 예언자요, 이상을 미리 보는 선지자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자입니다.
● 의인
의인은 하나님께서 인정을 해 주시는 옳은 사람. 가치 판단 평가성이 정확하고 매사에 옳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사도들을 영접함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릅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
선지자적인 정신 사상이 자기에게 들어가는 것이요,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선지자의 감화성이 들어가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미래가 보이는 것이요,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말하게 되고, 성경해석을 하게 됩니다.
‘의인의 이름으로 영접을 하면 의인의 상을 받는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니 하나님의 것을 옳게 바르게 비판하고 판단하고 정평 정가를 내릴 수 있는 지혜 지식이 생기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옳음을 말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영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의 옳은 사도, 주님이 보내신 옳은 사도를 영접하면 반드시 그 효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사도를 영접하면 그런 효력은 아무리 믿어도 없습니다. 열심 충성봉사 강조를 받은 것뿐이지 자기 속에는 아무런 깨달음도 없고, 의롭게 사람이 만들어진 것도 없고 세상 걱정은 여전히 들어 있습니다.
10장 42절: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도들이 주님의 보냄을 받아 가는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은 아닙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국복음을 전할 때 목숨이 위험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배고프고 목마르고 피곤하고 한 그런 일이 왜 없겠느냐?
진리를 전할 때 ‘아, 저 분은 주님의 제자다’ 라고 자기에게 인정이 되고, 제자가 냉수 한 그릇으로 피로를 풀고자 요구할 때 냉수를 갖다 드리는 것이 별 것 아니더라도 주님은 그것을 똑똑히 기억하여 그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한 것은 절대 공짜가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천국복음의 가치력을 빨리 알아차리고 사도들을 영접을 할 때에 이왕이면 흔해빠진 제자보다 사도로, 또는 선지자로, 또는 의인으로 맞아들여 그 상을 내가 받는게 좋지 ‘저 사람은 세계 인류 부흥강사가 아니니, 박사증도 없으니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라고 여기게 되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니 주님으로부터 자기도 외모로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을 외모로 판단하는 자들은 주님의 보내신 사도들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은 주님의 사도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은 주님의 사도들이 아닌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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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당신의 애성에서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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