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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막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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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 참고 : | 2016-11-17 춘천 성암감리교회 |
감사는 우리 각자의 변화산이다.
막9:2-8
예수님이 제자 몇 명만 데리고 산에 올랐는데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모습이 희게 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산 위에서 일몰이나 일출 때문에 그렇게 보였는지 아니면 제자들이 예수를 너무 흠모한 나머지 환상을 본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하튼 이 장면이 예수의 생애가운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자기가 어떻게 수난을 받을지를 발설 한 다음에 일어난 첫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께서 즐겨 하신 갈릴리에서의 활동이 끝납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고난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기로의 시점에 이 소위 변화산 사건이 있는 겁니다.
이 일이 있기 직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샤라 빌립보에 갔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누구라고 하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이런저런 말들이 나옵니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들 한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더러 묻죠.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다른 사람의 생각 말고 네 생각이 뭐냐는 거죠. 뭐라고 그랬지요? 베드로가 먼저 말하죠.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그는 이 대답으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실상 그 이후 그의 태도는 고백하고는 반대였습니다. 베드로의 그 근사한 말을 받아 예수님은 자기가 고난을 받고 죽게 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뭐랍니까? 항의를 하죠.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사탄아 물러가라!”이렇게 하셨습니다.
정답에 가까운 대답을 한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는 현장에서 침묵도 아닌 부인을 합니다. 그의 이런 처신들을 보고 후대의 학자들은 베드로의 고백은 후대의 교회가 베드로를 추켜세우려고 써 넣은 것이거나, 아니라면 아무생각 없이 지껄인 것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베드로가 한 제안을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자 산 위에 초막 세 개를 짓자고 합니다. 예수, 모세, 엘리야의 초막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독재자 아합왕, 바알종교의 화신인 이세벨과 투쟁을 벌인 영웅입니다. 모세는 이시다시피 민족을 해방시킨 영웅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 민족이 겪는 국가적인 문제가 이런 범주에서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열심당은 민족문제로 보고 해방운동을 하고 있었고, 세례요한은 엘리야처럼 종교문제로 보고 헤롯왕과 싸우던 때입니다.
베드로가 그들을 포함하여 세 개의 초막을 제안 한 것은 예수와 함께 하고는 있지만 아직 사람들이 엘리야와 모세에게 거는 그런 정치적, 종교적 기대감을 베드로도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고난을 받는다든가 하는 일보다는 영웅적이고 화려한 인물이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는 마치 최순실씨에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드로의 이 바람은 거절됩니다. 구름이 나타나고 음성이 들리면서 환상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만 덩그러니 남아있었습니다. 이 예수는 베드로의 그런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환상과 기대를 만족시켜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을 거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대다수 사람들과 자기의 현실적 기대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에게 걸었던 기대감이 사라지려고 할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자 얼른 거기에 베드로는 자기주장과 희망의 당위성을 삼으려고 했지만 그것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기대감과 욕망은 소멸되었습니다. 예수는 베드로를 비롯한 인간들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 위에서의 머무름을 거절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산 아래로 내려 가셨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눈부신 모습은 변화산 위에서가 아니라 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생의 고난 속에 자신을 던질 때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예수의 본질입니다. 온갖 열매로 가득한 가을 들판도 빛이 납니다. 그러나 진정한 빛은 대지가 모든 낱알을 세상에 다 내어주고 자신은 텅 빈 채로 남아 있을 때 진정으로 충만한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변화산 꼭대기에서만 빛난다면 그건 그저 개인이 화려함일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광채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난의 죽음을 맞아들입니다. 이게 진정한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예수만 따르라는 마지막 언질이 갖는 뜻일 겁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은 좋아하시지 않고 오히려 침묵을 명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스승의 수난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습니다. 예수님이 공적 활동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은 것처럼, 그 사탄의 유혹들을 거절하신 것처럼 이번에도 예수님은 일체의 자기욕망에 대한 충족을 거절합니다.
변화산 사건이 교훈은 이겁니다. 엘리야나 모세처럼 위대한 존재되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살기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총이라고 규정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산 사건의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은 하면서도 그의 머리속에는 온통 엘리야, 모세의 환상과 종교적 기대감으로 가득 찼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입으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이 세상이 주는 환상을 따라 허망한 것들을 쫓으며 살고 있습니다. 최순실 사건을 보면 명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점에 산에 올랐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변화산 입니다. 다시 한 번 생의 기로에 서는 겁니다. 베드로나 요한에게도 자신들을 변화시킬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나 요한은 그 산을 자기변화의 시점으로 엮어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드리는 감사가 ‘내년에 더 많은 것을 기대하는 담보’나, ‘금년에 남들보다 더 배부르다’는 자기충족의 간구와 고백이 아니라 예수께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변화산에 오르신 것과 같다고 이해합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을 내려올 때 화려한 모든 수식어는 다 사라지고 고난의 현장으로 담담히 걸어가는 진짜 예수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보통사람들은 이런 위대한 은유의 시점으로 살지는 못합니다. 평범하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언제 우리 자신의 허위를 떨쳐버리고 알짜배기로 전환하는 변화산이 있는 걸까요?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때입니다. 우리에게 감사는 엘리야 같기를 바라는 내가, 모세 같기를 바라는 나를 쳐부수고, 최순실처럼 되기를 꿈꾸는 허상을 버리고 고난의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변모 시킬 우리 각자의 변화산입니다. 결국 오늘, 이 시간의 변화산에서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장차 나의 진면목이 결정 되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진짜 예수만 남았듯이, 이 감사 주일의 아침에 진짜 나, 진짜 예수 믿는 나만 남도록, 거추장스런 낙엽들은 떨어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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