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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0:2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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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7-02-27 춘천 성암감리교회 |
앞으로 어떻게 살면 되겠습니까?
눅10:25-37
석 달 만에 여러분의 반가운 낯을 뵙습니다. 제가 설교의 첫 문장에 ‘여러분의 낯’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눈치 채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설교가 바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낯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지는 삶을 사는 것이 이 시대의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말씀을 드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술하고 요양하는 동안 꽤 많은 분량의 독서를 했습니다. 입원해 있는 동안엔 수술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 책이나 읽어야지 해서였고, 퇴원을 하고는 책 읽는 것 외엔 달리 할 게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손목에 힘이 없어지니까 누워서 책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신문 스크랩이었습니다. 오늘 제가 그 중에 한 권을 가지고 나왔는데요, 이 기사들은 2011년 경향신문에 [21세기에 보는 20세기 사상지도]라는 것입니다. 20세기에 등장해서 인간사회의 삶과 생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을 소개하고, 그들에 의해 시작된 20세기가 어떻게 21세기를 이끌 것인지, 21세기의 생존 방향성과 인간 삶이 나아갈 길을 귀 뜸 해주기 위한 기획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필요 없는 이름들일지 모르나 이 중에 한 사람의 사상이 오늘 설교의 중심이므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마르크스ㅡㅡ니체ㅡㅡ소쉬르ㅡㅡ쿤ㅡㅡ후설ㅡㅡ니시다 기타로ㅡㅡ가뉴 팽ㅡㅡ비트켄슈타인ㅡㅡ호이징가ㅡㅡ엘런 튜링ㅡㅡ매를로 퐁티ㅡㅡ리오타르ㅡㅡ막스 베버ㅡㅡ레비스트로스ㅡㅡ부르디와ㅡㅡ안토니오 네스리ㅡㅡ자크 라캉ㅡㅡ레비나스ㅡㅡ미셀 푸코ㅡㅡ질 들뢰즈ㅡㅡ-자크 데리다
우리는 처음 들어보는 이들이 20세기를 끌어왔고 21세기를 끌고 가는 겁니다. 여러 인물들의 사상 가운데 자크 라캉과 미셀 푸코 사이에 놓인 20세기 후반의 철학자인 레비나스의 이야기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의 사상이 마치 성서의 한 구절처럼 내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의 사상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겁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이 나에게 던지는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떠맡아 사는 것이 가장 올바른 인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레비나스는 ‘세계내 존재’ 혹은 ‘향유’라고 합니다. 어려운 말인데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근대 이후 인류는 보편적으로 모든 삶에 있어서 ‘나’를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나가 주체인겁니다. 그래서 나와 남을 생각할 때 ‘내가 책임 질 너’라고 생각하지 않고, 갈등이나 대립, 나아가서는 공포와 두려움 또는 무서움의 대상으로 ‘타자’즉 ‘남’을 이해하고 살아왔다는 말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고 합시다. 그러면 인류는 그동안 눈이 마주친 나아닌 남을 책임지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고, 저 사람이 나를 해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경쟁과 질시, 모략으로 남을 규정하며 살아왔다는 겁니다. 오늘날 이런 사회현상은 더욱 심화되어서 누구도 누구를 믿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는 것 자체가 불안이고 손해고 마이너스라서 아예 누구와도 무엇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홀로 사는 길을 택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혼밥’ 혼술‘이라는 사회현상은 구조적인 이유도 있지만 궁극에는 이런 오래된 사상이 인간사를 지배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9.11 테러이후 미국이 하는 행동들을 보세요. 나를 빼곤 보두 적입니다. 경쟁상대고 질시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뭐라고 하냐하면 다른 사람의 낯에 책임감이 없으면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 즉 서로가 낯을 맞추지 않고 그 상대방의 낯을 책임지지 않는 세상은 공포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나와 남의 차이는 사람과 귀신의 차이만큼 생경하고 두렵기 까지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걸 극복하려고 할 게 아니라 마주 봄으로써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엄연히 나하고 같이 공존하는 저 사람을 마주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삶이란 더 이상 항유가 아니라 불안과 공포이며, 지상에 머물러 사는 게 안식이 아니라 피 말리는 투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비나스라는 사상가가 하는 말은, 지금까지 인류는 남이 아닌 나만 묻고 따지고 계산하고 이해하는 ‘나 주체적 삶’을 살아왔지만 이런 삶은 향유도 아니고 거주도 아니기 때문에, 21세기에는 ‘나’가 아닌 ‘너’는 누구냐?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류의 평화와 행복이 각자에게 향유와 거주의 기쁨을 선물하게 되고, 이런 삶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만든 인간다움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1세기에는, 클라우스 슈밥에 의해 주창된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들어선 인간들의 삶의 윤리는, 너의 얼굴빛을 내가 책임 하는 삶, 나 주체적 삶이 아니라 너 주체적 삶을 살지 않으면 두려움과 불안, 공포와 근심, 경쟁과 갈등의 소모품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 가 아니라 너죠. 다른 사람은 곧 나입니다. 다른 사람을 나로 인식해야 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성취해 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설교에 맞는 내용과 제목을 단 영화가 한 편 있습니다. 디 아더스(The Others)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공포영화입니다. 대부분의 공포영화는 내 주변에 다른 환경이나 사람이나 귀신이 등장해서 나를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공포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한적한 시골 오두막에 혼자지내면서 경험하는 두려움과 공포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공포나 두려움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나 주변 환경과 같이 외부에서 오는 것 보다, 나 혼자일 때 스미듯이 엄습하는 그 공포가 더 크고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영화가 말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서로 두려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상대방 눈을 맞추고 응시하면서 대화할 때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 아닌 우리가 될 때, 나와 마주친 너의 얼굴을 책임질 때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레비나스의 사상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21세기를 향한 인류의 방향성은 단지 디 아더스(The Others)나 레비나스의 희망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랜 교회생활 때문에 뻔 하 게만 읽는 성서 속에도 나와 있습니다. 이미 예수께서 보편적 인간 삶의 방향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단지 훌륭한 도덕적 선택으로만 읽습니다. 하면 좋고 안 해도 할 수 없는, 마치 바리새인과 율법사 같은 ‘나 주체적’사고로써만 행동 윤리의 기준을 삼으며 살았습니다. 강도만난 너와 눈 마주치지 않고, 죽어가는 너를 응시하지 않고 나를 중심으로 상황, 사태, 사건, 인물을 살피며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그가 내 얼굴에 던지는 책임을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이 선한 이웃이 된 연유는 단지 그가 착한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존재가 자신을 주체로 두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내 얼굴에 던지는 책임을 다했으므로 선한 이웃이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강도만난 사람과 눈을 마주쳤을 때 그가 사마리아 사람의 얼굴에 어떤 책임을 부과했을까요? 그때 나를 주체로 삼지않고 강도만난 그를 주체로 삼았기 때문에 선한 이웃이 된 것입니다. ‘선하다’는 개념이 인간의 행위윤리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원초적인 장, 초월과 무한의 장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다른 사람의 눈과 마주치면 온갖 비린내를 작동할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이 되기 이전에, 우리가 아주 순박한 어린아이였을 때는 초월적이고 원초적이었습니다. 그 때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창세기 4:9절 말씀에 오늘의 시선을 옮기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을 떼려 죽이고 숨어 있는 카인에게 던지는 말입니다. “카인아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이 물음은 오늘 예수가 무리들에게 “너희는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란 물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이것이 20세기 사상가들의 공통된 물음입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해서 레비나스는 대답하죠. 서로 눈을 마주치고 상대방의 낯이 내게 지우는 책임을 피하지 말고 실행하라는 겁니다. ‘디 아더스’라는 공포 영화도 이걸 말하고 있고,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인류가 ‘진정한 이웃’으로 살아야 한다는 보편적 진리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만의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동생 아벨을 죽이고 도망자가 된 형 카인에게 하나님이 묻는 물음, “내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도 카인을 나무라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 근거해서 해석을 한다면 “너는 왜 너 밖에 모르느냐. 아벨의 낯이 너의 얼굴에 지우는 책임을 왜 다하지 않느냐.”는 말씀이 아닙니까?
진정한 이웃은, 얼굴을 마주치고 너의 얼굴이 나의 얼굴에 지우는 책임을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예시가 바로 사마리아인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눈을 마주치고, 내 얼굴에 와 닿는 너를 책임지며 살아야 합니다. 이게 4차 산업혁명 기에 접어든 시대에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인공지능과 자동화에 인간은 그 역할을 잃고 잉여적 생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런 21세기에 사는 길은 ‘이웃’을 만들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마리아인의 행위 뒤에 예수님이 질문하나를 던집니다.
“너희는 누가 진정한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요구합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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