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는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밤낮 무덤사이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데가볼리로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전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어느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거라사인의 지방’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거라사인의 지방’이 어느 곳을 가리킬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첫째로, 갈릴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48km 떨어진 곳에 있는 ‘거라사’로 보는 견해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거라사인’에 ‘거라사’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지명과 인명을 고딕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거라사인’에서 ‘거라사’만 고딕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거라사인’과 ‘거라사’를 동일 지명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둘째로, 갈릴리 동쪽 해변에 위치하고 있는 ‘케르사’로 보는 의견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벽과 옛 무덤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갈릴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9.6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작은 성읍인 ‘가다라’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자, 여러분은 여기서 말하는 ‘거라사인의 지방’이 세 곳 중에 어느 곳이라고 생각합니까? 왜 목회자도 아닌 평신도에게 이렇게 어려운 질문을 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결코 어려운 질문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도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셨기 때문입니다. 한번 누가복음 24장 26-27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누가복음 24:26~27). 여기서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라고 했는데 이것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 즉 복음을 말하는 신약성경을 구약성경으로 해석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문에서 말하는 ‘거라사인의 지방’이 어느 곳인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서지리책을 찾아봐야 할까요? 아니면 유명한 성서학자가 ‘거라사인의 지방’을 어떤 곳이라고 말했는지를 찾아봐야 할까요? 물론 그런 것들을 참조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 중에서도 어떤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할까요? 본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보면 됩니다. 성경에서 이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한 곳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8장 28절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거라사인의 지방’을 ‘가다라 지방’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26절은 마가복음과 동일하게 ‘거라사인의 땅’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라사인의 지방’이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있습니까? ‘가다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경만으로 해석이 가능한 책입니다. 성경으로 해석이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에 억지로 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왜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말씀을 드릴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경을 바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알 수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 이단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은 바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하나님의 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은 안상홍을 재림주이며 성령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재림예수는 다윗 왕권을 가지고 오시기 때문에 40년을 통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3년만 채우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30세(1948년)에 세례를 받고 67세가 될 때까지 37년간을 사역한 안상홍이 진짜 재림주라는 것입니다. 또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 안상홍의 이름이 나와 있다고 주장합니다. 거기에 보면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라는 말에서 안상홍의 ‘상(商)’은 한자로 거문고소리 ‘상(商)’과 ‘많은 물소리같고’ 라는 말에서 ‘많은 물’을 뜻하는 ‘홍(洪)’ 자가 나온다면서 안상홍이 바로 재림 예수의 이름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상홍이 1985년에 67세로 죽음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그 후로 장길자를 ‘어머니 하나님’으로 추종하고 있습니다. 장길자는 안상홍과 결혼한 것도 아니고 세상 남자와 결혼하여 불신자 자식들까지 두고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안상홍에 이어 ‘어머니 하나님’으로 추종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안상홍이 죽을 때 추종자들에게 장길자를 ‘네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있으면 자녀가 있고 자녀가 있으면 어머니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며, ‘장길자’를 요한계시록 21장 9절과 22장 17절에 나오는 ‘어린양의 아내요 신부’이며,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나오는 ‘어머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이비 종교가 만들어진 것은 한 마디로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자기 멋대로 해석하면 큰 일 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는 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성경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 깨닫도록 간구하여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라사인의 지방’에 예수께서 도착하시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아보고 예수님께 말을 걸어온 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귀신들린 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귀신에게 얼마나 강하게 붙들렸든지,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려서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어서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귀신에게 이렇게 강하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저는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기 전까지만 해도 귀신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를 설명할 때에 이 본문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귀신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자가 바로 비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귀신의 영향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제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 받기 전에는 마귀에게 종노릇하던 자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 8:44), 마귀에게 종노릇하던 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마귀의 손에 완전히 붙잡혀 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엡 3:1-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를 따랐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마귀의 영향아래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멀쩡해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각종 문제로 인한 두려움과 사망과 심판과 지옥의 쇠사슬에 꽁꽁 묶인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군대 귀신에게 사로잡혔던 자가 바로 비신자들이라고 깨달은 것을 말씀드릴까요? 그것은 단순히 비신자가 영적으로 귀신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모른다면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그들을 구원해 줄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귀신에게 붙잡혀서 영적으로 크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불쌍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들에게 전도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가 가면 갈수록 침체되어가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전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도하지 않는 이유는 비신자들이 영적으로 볼 때 얼마나 불쌍한 자들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육안으로만 세상 사람을 보지 말고 영안으로 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로마황제의 무서운 핍박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안으로만 보면 로마황제와 귀족들이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행복해 보였습니다. 2,000년 전인데도 우유로 목욕할 정도로 그들의 삶은 호화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을 박해하는 로마황제와 군인들을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귀신들린 자가 예수께 달려와서 절을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막 5:7) 우리는 귀신이 예수님을 만나서 한 말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린 자가 주님을 대하는 태도와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태도가 흡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그토록 가까이서 따라 다녔던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귀신의 인격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귀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기 때문에 귀신들린 자 역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귀신들린 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지만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예수님께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귀신들린 자의 말을 보면서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 우리가 지금 귀신들린 자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아니한가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만 삶 속에서는 그분과 무관하게 살고 있지는 아니하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주님이심을 고백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심판과 지옥의 굴레에서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통째로 구원해주셨습니다. 어느 한 부분만 구원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존재적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주문하고 있습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우리가 주님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일입니다. 주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않아도 될 곳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칫 실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을 범사에 인정하지 않고 문제가 있을 때만 그 문제의 주인이 되어 해결해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문제의 주인만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가정생활, 직장생활, 교회생활에서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구석구석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한 곳을 찾아서 그 자리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을 하면서 그분께 구원해 달라고 하지 못하고 자신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강력한 귀신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귀신들린 자는 “예수님, 저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말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귀신들린 자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목숨이 있을 뿐이지 짐승보다도 못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어도 구원해 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귀신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귀의 지배를 받으면 주님과 무관한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문제 앞에서도 기도하지 못하고 절망과 낙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 속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기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귀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적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까? 주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께 간구할 때에 주님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로 들어가 몰사를 당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왜 귀신은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을 때에 돼지 떼에게 들어가도록 요청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영적전쟁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사람에게 집이 있듯이 귀신도 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의 집은 어디인지 아십니까? ‘살아있는 육체’입니다. 그래서 귀신은 자신이 살던 집에서 나오면 다른 곳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돼지 떼에게 들어가도록 요청한 것입니다. 우리가 귀신과 영적전쟁에 승리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귀신은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이 거하던 곳에서 나와서 거할 집을 찾아 이리저리 다니다가 합당한 자가 있으면 들어가기 때문에 영적전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귀신같이 안다는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십니까? 귀신이 들어간 사람의 정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귀신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에 몰사당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과정에서 2,000 마리 돼지가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그 시대에도 엄연히 손해배상에 대한 규례가 있었고, 율법도 출애굽기 22장에서 손해 배상을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책임이 있다면 손해 배상을 하셨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이해타산에 굉장히 밝은 자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께서 돼지를 죽였다고 생각했다면 즉시 손해배상을 청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에 몰살당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 아무런 손해배상을 요구하지 않았고 예수님 역시 그 일로 배상을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돼지 떼가 죽은 것은 예수님과 무관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2,000마리의 돼지 떼가 죽은 것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을까요?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가 누군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군대 귀신들린 자안에 있는 귀신에게 나오라고 명령하시자 그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나를 괴롭게 하십니까?” 귀신이 이렇게 말한 것은 그동안 편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나오라고 하니까 나오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침 돼지 떼가 있는 것을 보고서 그곳에 들어가도록 요청하자 예수께서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자 2,000 마리의 돼지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살한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돼지 떼가 죽은 것입니까? 귀신 때문입니다. 사실 귀신 때문에 2,000마리의 돼지가 죽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마귀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려고 왔다”(요 10:10)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이는 일은 예수님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께서 가시는 곳에는 식물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혹 불행한 일을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불행한 일을 선한 이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불행 앞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고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귀신들렸던 자가 온전하게 되자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6-17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귀신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재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그들이 예수께서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사람들이 그 지방에서 예수님을 떠나라고 간구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떠나라고 한 ‘그들은’ 누구일까요? 돼지 치던 자들을 통하여 귀신들렸던 자가 귀신에게서 해방된 것과 돼지 떼 2,000마리가 바다에 빠져죽은 것을 전해 듣고 읍내 여러 마을에서 달려온 자들입니다. 아마 그들 중에는 돼지 떼의 주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사건을 보고서 내린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 그 지방을 떠나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그 지방에서 떠나라고 했을까요? 귀신들린 자가 고침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된 것보다 죽은 2,000마리 돼지 떼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을 가진 사람들의 삶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것보다 이 세상의 물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 우리도 주님을 자신에게서 떠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로 물질적인 손해를 볼 때에 그것만 보고 주님을 멀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주께서 베푸실 은혜를 바라보고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잃은 물질보다 자신의 영혼이 구원 받고 새로워지는 것이 더 큰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혹 당면한 이런저런 문제로 부담을 느껴 주님과 더 멀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이때가 자신의 영혼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저는 요즘 잠시 당하는 어려움을 통하여 넘치는 복을 받고 있습니다. 저의 영혼이 주님을 찾고 육신의 생각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놀라운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육신의 어려움으로 우리의 영혼이 건강하고 풍요로워지는 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귀신들린 자가 고침을 받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20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한 마디로 고침을 받은 자가 데가볼리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자처럼 귀신에게 종노릇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주의 은혜로 해방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장차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국에 입성하기 전,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가진 사명입니다. 우리교회는 이 사명을 보다 시스템화해서 효율적으로 전하기 위해 ‘D3왕의사역’을 개발했고, 지구촌 모든 교회와 함께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명은 없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 끝까지 승리하는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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