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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 죽음과 관련한 질문에 답하다

마가복음 양창천 목사............... 조회 수 550 추천 수 0 2017.05.30 23: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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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6:14-29 
설교자 : 안창천 목사 
참고 : d3왕의사역 평신도제자훈련원 http://d3.or.kr 

세례요한의 죽음과 관련한 질문에 답하다

막6:14-29

 2015.1.25

오늘은 세례요한의 죽음과 관련하여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지면 자식들에게 선심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도 그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헤롯이 자기 생일날 딸이 나와서 춤을 추었는데 헤롯과 함께 앉은 자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그 아이에게“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혹 나라의 절반을 구해도 내가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딸은 자기 어미에게 가서 헤롯왕에게 무엇을 구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이때에 어미인 헤로디아가 뭐라고 대답합니까?“세례요한의 머리를 달라.”왜 헤로디아가 세례요한 목을 달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평소 세례요한이 헤롯과 자신의 결혼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서슴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그들을 비판한 이유는 헤롯이 취한 헤로디아는 헤롯의 이복동생의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즉 두 사람 모두 인간이 범해서는 안 될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의롭고 거룩할 뿐만 아니라 선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헤롯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든지 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례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의로운 자가 극악무도한 자에 의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은 참으로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불행한 사건을 통해서도 우리는 영적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헤롯이 평소 세례요한의 목을 베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는데 그가 잔칫날 요한의 목을 벨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딸에게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을 벤 것입니다(막 6:26절).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약속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우리뿐만 아니라 마귀와 천사 앞에서 하셨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자도 자신이 한 말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릎 쓰고 약속을 지키는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신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있는지 아니면 상황을 보고 기도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문제를 만나 기도하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지 않고 상황만 바라보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지존파 때문에 한동안 온 나라가 시끌벅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그런 짐승 같은 인간들이 어디 있느냐고 야단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사랑의 교회 이재명 집사입니다. 지존파는 사람고기를 먹고 화장을 하는 등 도저히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게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재명집사는 그들의 악함을 보지 않고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끈질기게 전도한 결과 그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쓰던 아지트가 이제는 교회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기도의 응답받는 삶을 살기위해서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요? 약속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심비에 새겨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설교에 은혜를 받지만 쉽게 잊어버리는 것은 그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1년 전, 뉴스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파고다학원 박경실 회장이 경찰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해 80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직원이 900명이나 되는 대기업입니다. 학원협회 회장에 재선이 되었고, 2010년에는 자랑스런 한국인상을 수상할 정도로 학원가에서는 최고의 리더로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혐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살인교사혐의입니다. 그 대상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남편입니다. 그리고 회사 돈을 10억 횡령한 혐의입니다. 살인교사혐의는 무혐의로 최종 판결이 났지만 10억 원을 횡령한 것에 대해서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파고다학원 박경실 회장의 종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독교인입니다. 소위 믿음이 좋다고 소문난 사람입니다. 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유명 목회자를 초청하여 직장에서 매주 한 번씩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1995년도에 파고다외국어 학원에서 약 30여회 설교를 했습니다. 그 때에 박경실씨는 학원장의 직함을 갖고 있었고 남편 고인경씨는 대표이사의 직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고 회장은 한두 번 나왔지만 박경실 원장은 거의 매주 참석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감사패도 주었고 그 패는 지금도 저의 서재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씀에 은혜도 받고, 권사라는 사람이 남편을 죽이려고 음모했다는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고, 10억 원을 횡령한 범죄로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심비에 새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여 약속의 말씀을 심비에 새기지 않으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수 없고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지 않으면 목사, 장로, 권사라도 육신의 욕망에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심비에 새겨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의 응답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목을 베는 과정에 관계한 자들이 누구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헤롯과 헤로디아와 그의 딸, 세 사람입니다. 이 일에 부부가 관여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부부가 공모해서 사기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그 사건에 ‘헤로디아의 딸’이 개입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춘 것으로 보아 아주 어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헤로디아의 딸을 ‘소녀’라고 말합니다. 소녀는 어느 정도의 선과 악은 구분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는 어미의 요청에 따라 세례요한의 목을 구했습니다. 어떻게 어린 아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녀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통하여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는데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면서부터 악한 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성선설이 맞느냐 성악설이 맞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나면서부터 악한 자로 태어나기 때문에 성악설이 맞습니다. 모든 사람이 악한 자로 태어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거짓을 말하고 더러운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혹 자신 안에 조금이라도 선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속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에 거하는 이상 어느 누구도선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그렇습니다. 육신을 가진 이상 그가 그리스도이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죄와 무관한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헤로디아의 딸을 거론하면서 모든 사람이 악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말하고 있습니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악한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주님과의 관계가 밀접해질 수 없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아야 예수님을 간절히 찾게 되고 삶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구원 받을 만한 의가 있다고 생각하면 주님을 붙잡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가 0.00001%도 없다고 생각해야 오직 예수만을 붙잡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을 끝까지 의지하고 충성할 수있었던 것은 항상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딤전 1:15)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고인이 된 박완서의 작품 중 “한 말씀만 하소서”가 있습니다. 아들을 잃고 참담한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진솔하게 일기의 형태로 썼습니다. 몇 해 전, 가톨릭에 입교했지만, 자기 배에서 낳은 아들, 그것도 26살의 나이의 성실한 젊은 의사인 아들의 죽음 앞에서 그녀는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술과 수면제로 하루하루를 지내다가 이를 모습을 보다 못한 지인이 권유로 부산의 수녀원에 들어갑니다. 수녀원 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내 아들이 왜 죽었고, 그로 인해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말씀을 해달라”고 하나님께 따지고 덤비고 쥐어뜯고 사생결단을 하듯이 방안을 헤매며 데굴데굴 굴렀지만 하나님께서는 묵묵부답이셨습니다. 그래서 박완서 작가는 수녀원에 있으면서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한 어린 수녀가 친구에게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수녀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남동생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남동생이 어찌나 고약하게 구는지 집안이 편한 날이 없어서 왜 하필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 비관도 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세상에 속 썩이는 젊은이가 얼마든지 있다, 내 동생이라고 해서 그래서는 안 되란 법이 어디 있나? 내가 뭐관대 …’ 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동생과의 관계도 호전되었다”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신선한 놀라움이 그녀를 감쌌습니다. 그때에 그녀는 이렇게 질문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갔을까?”에서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


그러나 그런 질문도 잠시 뿐, 자신의 삶에는 적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후에도 그녀는 긴긴 밤을 지새우며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렇게 크게 잘못했기에 이런 무서운 벌을 받아야 하느냐”라며 하나님께 항의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다지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러운 과식으로 복통을 일으켜 변기에 엎드려 토해내고 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 나도 죄인이야!”
이것이 깨달아지자 그의 생각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지금까지 남에게 악을 행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그것은 위선에 불과할 뿐임을 깨달았습니다. 특별히 자신이 물질과 사랑을 가족과 친척중의 극히 일부와 소수의 친구에 국한되어 나누었을 뿐, 이웃이라고 부를 수 있는 타인에게는 철저하게 무관심했음을 깨닫고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었고 인생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날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아야 주님과 가까워지고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과 가까워지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면 날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이 목 베임을 당할 때에 침묵하셨을까요? 예수께서는 얼마든지 기적을 일으켜 요한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세례요한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의 친척이고 죽임을 당할 만큼 악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사장인 아버지 사가랴와 기도의 사람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난, 그것도 예수님처럼 천사로부터 태어날 것을 미리 예고 받고 태어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예수님께 직접 세례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고,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고 불의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예수님조차도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버려두셨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을 얻으면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성경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작가 박완서 씨와 동일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렇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게 하십니까? 도대체 주님은 어디서 무엇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전, 우리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왜 세례요한을 이 세상에 보내셨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례요한의 존재목적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막 1:2).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시기 전, 광야에서 먼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중에 가장 큰 목적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요한에게 목 베임을 당한 것은 곧 예수께서 죽음 당하실 것을 준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의 죽음에 침묵하신 것은 그의 죽임을 통하여 곧 예수께서 죽임 당하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요한의 죽음을 이렇게 이해할 때 얻는 결론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떤 고난을 당하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목 베임을 당한 것이 개죽음 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쉽게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고난이 자신의 실수로 왔든, 억울하게 당하든 지금 당하는 고난을 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날아가는 참새도 허락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 10:29). 우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 고난 앞에서 주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할 때에 우리가 더욱 성숙해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례요한이 헤롯의 악행과 불의를 지적하다가 죽임당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세례요한이 목 베임을 당한 이유는 헤롯의 악한 행실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용기 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내며 기독교인은 세상의 불의와 맞서서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갑자기 찾아온 한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왜 예수께서는 헤롯의 악행에 대해 한마디도 하시지 않으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6개월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세례요한과 동시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헤롯의 악행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하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모든 악행에 대해 침묵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당시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는 화가 있을 것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예수님도 꾸짖지 않은 자를 비판하다가 죽음에 이른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우리가 세례요한의 행위를 본받아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립니다. 세례요한의 행위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신앙과 삶과 사역에 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어떻게 하셨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세상의 악을 비판하여 죄 문제를 해결하시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까요? 악을 비판하는 것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즉 대속의 희생이 없이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당시 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의 악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지만 그들의 악과 대항하여 싸우라고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순복하라고 가르쳤던 것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조적으로 악한 세상을 바꾸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이 세상의 악과 대항하여 싸우는 ‘전투자’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은 먼저 본을 보이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 정치지도자들의 악행에 대해 비판하기 전,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해 비판하고 성찰을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많은데, 어찌 누구를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비판하기 전, 내 안에서 자행되고 있는 악은 없는지를 살피고, 그 악에서 떠나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불의를 보고 일절 함구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마땅히 악을 악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거룩하신 성령께서 거하시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잘못을 비판해도 심판자의 자세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오늘 세례요한의 죽음과 관련한 질문과 답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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