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마리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은혜를 받은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지만 그 당시는 처녀가 아이를 임신하면 곧 돌에 맞아 죽을 운명에 처했기 때문에 그것은 사실 좋아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뤄지이다”라고 하며 적극적으로 천사의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곧 고난을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은혜만 받으려 하지 말고 고난도 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을 피한다면 그것은 아직 은혜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남은 생애 주님을 위해 그 어떤 고난도 달게 받겠다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복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수태고지를 들은 다음 곧바로 엘리사벳을 방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수태고지를 듣자마자 즉시 유대동네로 가서 엘리사벳의 집으로 갔습니다. 왜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듣자마자 엘리사벳에게 뛰어갔을까요? 그것은 늙어서 임신할 수 없었던 엘리사벳이 수태해서 6개월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엘리사벳이 임신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자신이 수태한 일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각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 나누기 위해 빨리 달려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수태고지를 듣고 엘리사벳을 찾아간 것을 통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유유상종’의 원리가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유유상종을 영어로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라고 하는데 이는 서로 유사한 사람끼리 왕래하며 사귐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끼리 끼리’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이해하지만 선한 일에 함께 하는 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믿음 있는 사람과 만나 교제를 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해야 할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도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음이 없으면 믿음의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믿음을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12시 10분에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프로복싱 웰터급 세계 통합 타이틀전이 있습니다. 대전료가 3000억 원에 이르기 때문에 세기의 대결로 불리고 있고, 전 세계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필리핀에서는 파퀴아오가 복싱영웅이라 TV 시청으로 정전사태가 일어날까봐 그 시간에 냉장고는 사용하지 말라고 권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경기가 어떻게 성사될 수 있었습니까? 메이웨더는 현 WBC와 WBA의 웰터급 챔피언이고, 파퀴아오는 현 WBO 웰터급 챔피언으로서 두 사람이 같은 수준의 실력을 갖추기 있기 때문입니다. 종잣돈을 만들어야 그것을 굴려 돈을 모을 수 있듯이 ‘종자 믿음’을 만들어야 믿음의 집을 지을 수 있고, 그 믿음으로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과 영적인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믿음의 등급을 상향시켜야 합니다. 믿음을 향상시키므로 믿음의 고수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풍성한 주님의 은혜를 맛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가자 처음으로 보인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41-44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먼저 마리아의 문안을 들을 때에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복중에서 뛰놀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엘리사벳의 뱃 속에 있는 아이가 마리아의 뱃속에 있는 태아가 누구인지를 알고 그를 환영했다는 말입니다. 또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엘리사벳도 마리아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태중의 아이가 다른 사람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알아볼 수 있고, 또 어떻게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습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1장 15절을 읽어보십시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여기서 ‘저’가 누구입니까? 세례요한입니다. 즉 세례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1장 41절을 보십시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엘리사벳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엘리사벳이나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모두 성령충만했기 때문에 마리아의 뱃속에 있는 분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예수께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묻는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자가 없느니라”(고전 12:3)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단지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게만 하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고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성령충만을 받지 않으면 구조적으로 악한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가 세상에 취하지 않고 주님께 사로잡히기 위해서는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환영하면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그녀는 큰 소리로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지만 처녀가 아이를 밴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네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녀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몸에 모신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릇의 가치는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엘리사벳의 말을 통해서 세상적인 복과 성경적인 복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자기의 뜻과 생각대로 잘 되어지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업이 잘 되고, 학업 성적이 좋고, 좋은 대학과 직장에 들어가면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셉이 형들에게 애굽으로 팔려서 노예가 되었고, 또 누명으로 억울하게 옥에 갇혔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계획대로 잘 되고 재물과 부귀와 영광을 누리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고 계속해서 어려움이 닥쳐도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면 그것이 진짜 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성경적인 복의 의미를 모르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기복신앙에 묶이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축복하자 마리아가 어떻게 했습니까? 찬가를 불렀습니다. 그것이 46-55절입니다. 가장 먼저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찬가와 거의 비슷한 내용이 다른 곳에 등장합니다. 사무엘상 2장 1-10절에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찌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이것은 한나가 드린 기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읽어서 아시겠지만 마리아의 찬가와 한나의 기도는 거의 비슷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어떻게 마리아가 수백 년 전에 한나가 드린 기도와 비슷한 고백을 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소 마리아가 구약성경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을 묵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였기에 그녀에게 믿음이 생겼고, 동일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단지 읽기만 하면 안 됩니다. 묵상을 통하여 그 말씀을 자신의 마음판에 새겨야 합니다. 마음판에 새겨지지 않은 말씀은 내 입을 통하여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마음판에 새겨진 말씀만이 나의 입을 통하여 밖으로 표현되고 그 표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왜 3분복음스피치를 암송하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복음을 마음판에 새겨서 복음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믿음으로 고백한 말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녀가 말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가난한 자들을 높이신다고 말한 대로 예수께서 당시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셨고, 세리나 창기와 같은 죄인들은 영접을 하셨습니다. 또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고 말한 대로 예수님께 대적하는 마귀를 십자가로 멸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하면 그대로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말을 해도 말씀을 사용하는 경우와 그냥 말하는 경우가 다릅니다. 말씀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성취도가 높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도 ‘말씀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기도’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대로 이뤄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지 않은 문제를 만나면 항상 붙잡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8장 2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을 기도 중에 선포하면 이 말씀대로 됩니다. 즉 안 좋은 일 같지만결국은 축복으로 바뀝니다. 또 물질적으로 어려운 때는 빌립보서 4장 19절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번에도 갑작스럽게 성령께서 캄보디아와 필리핀을 다녀오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선교비 였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예산했던 것보다 넘치게 공급해주셨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이 선교에 동참을 해주었습니다. 상황은 바뀌어도 말씀은 영원합니다. 말씀은 세상을 이깁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붙잡고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엘리사벳과 얼마동안 함께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56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었다는 것은 엘리사벳이 출산할 때가 거의 다 되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마리아 자신도 임신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때였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이 임신한 사실을 확인하고 곧바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마리아가 석 달 동안이나 엘리사벳과 함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어떻게 되어가는 지를 좀 더 지켜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마리아의 어떤 면을 엿볼 수 있습니까? 마리아가 매우 신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에 신중해야 합니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방방 뛰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정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만 지속하지 못하는 것은 첫 은혜를 받고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음성을 들었다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면 안 됩니다. 그럴수록 마귀의 역사도 많음을 알고 더욱 더 신중해야 합니다. 저는 종종 이런 일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정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더욱 더 신중한 지도자가 되도록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마리아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소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할 때에 믿음이 생기고 믿음의 언어를 말할 때에 기적이 일어나고, 믿음으로 살 때에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한 것이 많아도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말씀을 가까이함으로 마리아와 같이 믿음으로 살고 주님께 쓰임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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