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구유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크게 세 가지를 다루었습니다.
첫째로, 왜 로마의 황제가 온 천하로 호적하라고 명령하고 요셉은 호적을 하러 베들레헴에 올라가면서 임신한 마리아와 함께 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다고 예언하신 것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로, 누가가 구유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를 ‘첫아들’이라고 말한 것이 무슨 의미냐는 것입니다. 언 듯 보면 누가가 아기 예수를 첫아들이라고 한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엄격히 말하면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아들이라고 하려면 다른 아들이 있어야 하는데 아기 예수는 마리아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가가 아기 예수를 첫아들이라고 한 것은 다른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즉 요셉과 마리아가 낳은 첫아들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첫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첫아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첫아들은 야고보입니다. 왜 예수님을 요셉과 마리아가 낳은 첫 아들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말씀을 드렸을까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도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이므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제일 먼저 목자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이 전달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목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를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들었을 때에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한 밤중에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주님의 재림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맡은 일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제자 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지막 명령에 순종하여 제자 삼는 삶을 살아가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 소식을 우리가 가장 먼저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밤중에 양들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도적같이 오시지만 깨어 있으면 그분의 재림 소식을 가장 먼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아기 예수에게 할례와 정결의식이 행해졌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할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할례는 남자의 성기 둘레의 표피의 일부를 잘라 내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고대근동 지역의 여러 나라에서도 시행되었던 것으로 그 목적이 뚜렷하지 않지만 구약성경에서는 할례를 종교적 예식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증거로 할례를 행했습니다(창 17:11-12). 따라서 할례는 신약시대에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입증하는 표시로 받는 세례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을 보면 할례와 세례를 동일한 의미로 표현하는 곳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구약성경 예레미야 4장 4절(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이나 신약성경 로마서 2장 28-29절(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을 통해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를 동일한 의미로 이해하면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세례를 받은 자답게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종교예식과 삶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하냐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세례의 의미대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례를 받는 것은 옛 사람은 죽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를 받으면 삶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세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 6:2-3). 무슨 뜻입니까?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육신의 세례만 받고 실제로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은 진정으로 세례를 받은 자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 종교화되고 형식화되면 안 됩니다. 단지 세례를 받고, 직분을 받고, 주일 성수를 하고, 십일조를 드린다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세례를 받은 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살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정결의식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법대로 정결의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전 개역판에는 ‘정결의식’이 ‘결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아이를 낳게 되면 반드시 정결의식을 행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정결의식을 행하는 기간이 각각 다릅니다. 여인이 남자를 낳은 경우는 7일 동안 부정하고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케 되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여아를 나은 경우는 배나 되는 기간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게 되어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레 12:2). 즉 2주 동안 부정하고 66일이 지나야 깨끗하게 되어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이 남아보다 여아를 낳은 경우 정결하게 되는 기간을 길게 규정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먹는 일에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 2:12-14). 이 말은 하와가 아담보다 먼저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 금지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여자는 교회에서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죄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했지만 용서받았습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용서하셨지만 그들은 고통 가운데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용서해주시지만 죄로 인한 고통은 지불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죄의 제도를 빌미로 죄를 물마시듯이 짖지 말고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결의식을 어떻게 행했습니까? 당시 정결의식을 행할 때는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번제를 위해서는 1년 된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해서는 집 비둘기 새끼나 산 비둘기를 취해서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여 어린 양을 취하여 번제를 드리지 못할 경우는 산 비둘기 한 쌍이나 집 비둘기 새끼 한 쌍을 가져다가 한 마리는 번제로, 다른 하나는 속죄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레위기 12:8).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를 드리려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가정이 매우 가난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웬만하면 어린 양으로 제사를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형편이 어려워 할 수 없이 비둘기 한 쌍으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자신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가난한 생애를 사셨습니다(눅 9:58).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므로 천지에 속한 모든 것이 다 그분의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부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분께서 가난하게 사셨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께서 그토록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만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의 문제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하게 사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땀을 흘려 열심히 일해서 가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직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도록 하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 혼자서 편하게 잘 살려고 부요해지려면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업에 성공해서 빌 게이츠나 록펠러와 같은 부자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재벌이 되려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기 위해 재벌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주일 아침에 식사를 하면서 우연히 25번에서 아침편지로 유명한 ‘고도원’의 특강을 잠시 들었습니다. 그가 영재들이 다닌다는 카이스트에서 강연을 하면서 그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꿈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학생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 학생이 일어서더니 백만장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꿈을 이룬 후에 무엇을 하겠냐고 물었더니 혼자서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하더랍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화가 나던지 원고에 없는 강의를 15분이나 했다고 합니다. 그가 한 말 중에 인상 깊은 말이 있습니다. “자기만 잘 살겠다는 꿈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곧 재앙입니다. ‘꿈 너머 꿈’을 가지고 있어야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보내드린 큐티를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재물은 날개를 가지고 있어서 독수리처럼 한 순간에 날아갑니다. 그러나 재물을 잃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데 사용하면 그 재물은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구원 받은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돈을 얼마나 가치 있는 곳에 사용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드린 헌금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퍼붓는다는 것을 알고 더욱 더 주님께 많이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누가는 ‘정결예식’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23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이 말씀은 출애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출애굽 시킬 때 애굽의 장자를 다 멸하셨지만 이스라엘의 장자는 어린 양의 피로 속하셨기 때문에 멸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후 초태생은 사람이나 짐승을 무론하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도록 했습니다(출 13:2). 즉 하나님께서 정결예식을 행하게 하신 것은 첫 것을 바치게 하심으로 모든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하나님께 바친 것은 바로 아기 예수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부모가 고생해서 자식을 낳고 기르기 때문에 자식을 부모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자녀는 잠시 우리에게 양육하도록 맡기신 것이기 때문에 청지기의 자세로 양육해야 합니다. 같은 자식일지라도 ‘하나님의 소유’로 생각하는 것과 ‘부모의 소유’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로 생각해야 하나님의 뜻대로 키우게 되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고 주일을 지키는 것도 이와 동일한 원리입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림으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수고해서 벌어도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매 주일 주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안식의 개념이 아니라 한 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첫날을 주님께 드림으로 한 주를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예수께서 ‘율법대로’ 할례와 정결예식을 받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율법대로 할례와 정결예식을 받으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갈라디아서 4장 4-5절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말입니까? 그분께서 율법 아래 나시고 율법을 일일이 지키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갈라디아서 3장 10절을 보아야 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 아래에 있다는 것은 저주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신다는 말은 저주가운데 있는 자들을 속량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께서 율법을 지키신 것은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이 저주를 받게 된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은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는데 그 율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지키심으로 마치 우리가 율법을 행한 것처럼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지키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저주와는 관계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을 시키셨다면 우리는 율법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율법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에 우리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율법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율법은 크게 세 가지 즉 의식법, 도덕법, 시민법으로 구분하지만 크게는 의식법과 도덕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의식법’은 주로 제사와 관련된 법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성소, 절기에 관한 법들이며 제물과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제사의식은 한 결 같이 장차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셔서 자신의 몸을 어린양 제물로 삼으시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보혈의 피를 흘리심으로 성취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제사에 관련된 율법규정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 우리가 죄를 지어도 구약시대처럼 짐승을 죽여서 피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법’은 십계명으로 압축되는 아주 중요한 법으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성경의 핵심적인 가치로서 영원히 지켜야 할 명령입니다. 따라서 이 명령은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지켜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종교의식은 단순히 의식이 아니라 삶이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는 옛 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살겠다는 공개적인 선언입니다. 그 선언을 삶으로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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