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주에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며 그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한 것은 ‘뱀의 자식들’ 곧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거짓의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왜 죄를 씻기 위해 ‘세례’를 받으러 오는 자들에게 이토록 저주의 말을 쏟아 부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그들이 진심으로 세례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받으러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를 드러러 나와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람에게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도 역시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진심으로 해야 합니다.
또한 세례요한이 무리들과 세리들과 군인들에게 말한 것은 한 마디로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욕심이 자라는 것을 보고만 있으면 안 됩니다. 욕심을 가진 채 주님을 좇으면 주님이 수단이 되고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욕심을 버려야 주님을 온전히 좇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전 9:24)고 했듯이, 욕심을 절제하는 자만이 신앙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만족을 모르고 욕심을 잠재워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세례요한이 주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왜 세례 요한이 투옥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세례요한이 주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이 빈들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회개하라고 외치자 이스라엘백성들은 혹 그가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 이스라엘백성은 로마의 지배 하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과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메시아 대망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행보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그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며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습니다. 세례요한의 이런 행보는 지금까지 영적 지도자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인 제사장은 좋은 집에서 편하게 살았습니다. 또한 종교지도자들은 오직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빈들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뿐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혹 세례요한이 메시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요한을 메시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소망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메시아 대망보다 더 큰 소망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까?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로 이 세상에 소망을 주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세례요한을 통하여 그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인식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즉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자입니다. 그를 소개하는 자이기 때문에 메시아와 비슷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셨듯이 그도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의로운 삶을 사셨던 것처럼 그 또한 의로운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분명합니다.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신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벧전 2:9).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증거해야 세상 사람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복음보다 세상에 소망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사명을 깊이 인식하지 않고 그냥 살아갑니다. 행동은 생각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사명을 인식하지 않으면 결코 복음을 전하지 않고 세상에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지만 큰 교회들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정체성이 대한 인식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즉 왜 여기에 모였는지를 온전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D3왕의사역’으로 주님의 마지막 명령인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모였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나눔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경은 세례요한이 자신의 소유를 나누었다고 문자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눔의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듣고 요한에게 찾아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그가 한 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무리들이나 군인이나 세리에게 한결같이 한 말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나눔을 실천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욕심으로 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적으로 욕심의 아비인 마귀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어주신 희생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눔의 삶이 없이는 세상 사람들에게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왜 대한민국에 5만교회가 넘지만 세상 사람에게 소망을 주기는커녕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국 욕심 때문입니다. 왜 대형교회들이 그들 나름대로는 구제활동을 하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들과 별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 역시 욕심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예배당을 크고 화려하게 짓습니다. 사랑의교회는 다른 교회와는 좀 다르다고 생각하였는데 수천억이나 되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서 예배당을 건축하였습니다. 만일 사랑의교회가 엄청난 재정을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고 사회적 약자와 빈곤층을 돌아보는 데에 사용했다면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또 교회를 세습하려고 합니다. 세습문제는 대형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으면 자식에게 세습하려고 합니다. 왜 세습하려고 합니까? 부모나 자식이나 욕심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습을 계획하셨다면 모르겠지만 세습은 기독교 정신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또 영적지도자들이 욕심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2년 전, 00교단에서 가장 큰 교회가 큰 시험에 들었습니다. 원로목사의 불륜문제로 촉발되었지만 원로목사와 아들 담임목사의 사례비가 도마에 올랐습니다. 담임목사의 공식적인 사례비는 800만 원인데 거기에 특별 사례비로 매달 평균 400만 원을 더 주기 때문에 사례비만 매달 1,200만원을 받습니다. 목회활동비도 월 800만 원이고, 도서비도 매달 100만원을 받기 때문에 사례비와 목회비와 도서비로 받는 금액이 매달 2,100만 원, 1년이면 2억 5200만 원을 받습니다. 반면에 담임목사의 아버지인 원로목사는 은퇴했지만 매월 8백만 원을 받고 있습니다. 또 부활절·맥추감사절·추수감사절·성탄절 등 일 년에 4번 있는 절기마다 800만 원을 별도로 받기 때문에 원로목사와 담임목사는 각각 3,200만원씩을 받습니다. 또한 담임목사는 성찬식을 집례할 때마다 50만 원씩 사례비로 받는데 한 해 성찬식이 다섯 번 있기 때문에 250만 원을 받고, 학습 세례 집례 사례비로 300만 원을 받습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송구영신 예배 시 나온 헌금의 10분의 1을 담임목사가 가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2013년에 1억 1천만 원의 헌금이 들어와 1,100만 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담임목사가 휴가비로 1,500만 원을, 원로목사가 1,000만 원을 받습니다. 또한 원로목사는 선교 순방을 명목으로 3, 4, 5월에 각각 세 번을 필리핀과 중국을 방문하는데, 그때마다 500만 원씩 총 1,500만 원을 받았습니다. 생일이 되면 축의금으로 각각 500만 원씩 받았고, 김장비 명목으로 두 부자가 320만 원을 받았습니다. 어버이 주일에도 각각 100만 원씩 받았고, 병원비는 모두 전액 교회에서 부담합니다. 진료비와 약제비를 합하면 200만 원이 넘었습니다. 또 목사관 접대비도 매월 100만 원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 부자 목사가 1년에 교회에서 부담하는 돈이 무려 5억이나 된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겉으로는 하나님을 외치지만 마음 중심에는 돈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을 그리스도로 생각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16절입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자신이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말한 것은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자라는 것입니다. 당시 그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자신을 그토록 낮출 수 있었을까요? 주님과 자신을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비교하면 우월감을 느낄 수 있겠지만 주님과 비교하면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로 인기가 높아지고 명예를 얻어도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인식하는 길은 주님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또한 심판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서 마지막 날에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지막 날 그분 앞에 서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지옥으로 가는 심판은 받지 않지만 상급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의식한다면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하고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아도 자신을 자랑할 수 없고 교만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자신을 낮출 때에 세상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힘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가졌다고, 안다고, 먼저 믿었다고, 목을 뻣뻣하게 세우면 그들에게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다음은, 세례요한의 투옥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18-20절입니다. “또 그밖에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분봉 왕 헤롯은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자기가 행한 모든 악한 일로 말미암아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세례요한이 사역하던 시대는 분봉 왕 헤롯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헤롯 앞에 ‘분봉 왕’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헤롯대왕이 죽고 난후 이스라엘을 세 아들인 안티파스, 빌립, 아켈라오가 나라를 구분하여 통치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봉왕 헤롯은 안티파스를 말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왜 분봉왕 헤롯이 세례요한을 옥에 가두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헤롯이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를 그의 아내로 맞이한 일에 대하여 세례 요한이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동생 빌립의 집에 갔다가 제수인 헤로디아와 눈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분봉 왕 헤롯은 아레다 왕의 딸과 이혼하고, 헤로디아도 그의 남편 빌립과 이혼하고 다시 결혼했습니다. 당시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세례요한이 그들의 부도덕한 삶을 책망하자 세례요한을 감옥에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례요한이 이렇게 바른 말을 하다가 옥에 갇힌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면 불의를 지적한 요한이 옥에 갇히도록 가만히 보고만 계시느냐며 신앙의 회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혹자는 왜 쓸데없이 다른 사람의 악행에 간섭해서 고난을 당하느냐며 냉소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혹자는 고난을 당할지라도 세례요한처럼 불의에 맞서 싸우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세 번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불의한 권력 앞에 침묵하거나 악을 조장하는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 불의를 지적한 그 용기를 배워야 합니다. 기복신앙에 매여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데만 관심을 가지지 말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세상의 불의와도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누가가 세례요한의 투옥사건을 기록한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불의를 대항하여 싸우라는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우선적으로 주님을 본받는 것인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이 세상의 불의와 싸우신 결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무슨 의도를 가지고 헤롯이 세례요한을 투옥한 사건을 기록했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20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헤롯이 세례요한을 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로 옥에 가둔 것은 그가 행한 악에 또 다른 악을 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누가는 세례요한의 투옥 사건을 통하여 그가 얼마나 악한 자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는 세례요한의 투옥사건 말미에 “그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라고 말함으로 헤롯의 죄악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헤롯이 누구입니까? 단지 ‘헤롯 안티파스’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헤롯이 지은 죄에 한 가지 악을 더했듯이, 우리는 지은 죄에 또 다른 죄를 계속해서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자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육신적으로는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죄의 바벨탑을 더 높이 쌓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상 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물을 마시듯이 죄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헤롯을 보면서 자신이 지은 죄 위에 또 짓는 죄를 찾아내고 그것을 예수의 피로 헐어버리겠다고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자라고 있는 ‘분봉왕 헤롯’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득 채우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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