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셨듯이, 우리도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귀신은 우리 안에 침투하여 더러운 생각을 갖게 하여 죄를 짓게 하고, 우리를 파멸로 인도하기 때문에 생각의 단계에서 곧바로 귀신이 넣어 주는 더럽고 악한 생각을 물리쳐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초전에 박살을 내야합니다. 마귀가 넣어준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마귀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넘김으로 파멸에 이르게 된 것도 마귀가 그의 생각 속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었을 때에 곧 바로 그 생각을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사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하신 과정을 통하여 몇 가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먼저, 누가복음 저자는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설교하신 후 나오셔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께서 베드로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집에 들어가셨을까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나가는 길이라 잠시 들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께서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린 것을 아시고 그녀를 고쳐주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들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두 가지 중 어떤 견해에 동의를 하십니까? 저는 두 번째 견해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38절 때문입니다. 한 번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성경은 예수께서 회당에서 나오시자마자 곧바로 시몬의 집에 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어떤 목적을 갖고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음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나오셔서 곧바로 시몬의 집에 가신 것은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 위독한 것을 미리 아시고 그녀를 고쳐 주시기 위해서 찾아가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부탁하지 않았음에도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고난에 처해있는지를 다 알고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물질로 고생하는 것을,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것을, 인간관계에서 서로의 오해로 고통 당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고난을 당할 때에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고난을 아시고 찾아오시는 때와 방법은 그분께서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원하는 때와 방법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는 시기와 방법에 따라 찾아오십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원하는 때와 방법으로 찾아가시지 않고 그분의 때와 방법으로 찾아가셨습니다. 따라서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때에 주님이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찾아오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당하는 ‘당장’과 주님이 찾아오시는 때까지의 기간을 통하여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곧바로 우리의 고난에 개입하시지 않는 것은 일정기간의 고난을 통하여 모난 성품을 다듬으시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몇 해 전, 초대 문화관광부장관을 지낸 이어령 씨의 딸인 故 이민아 목사가 집사 시절 온누리교회에서 간증한 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눈병과 암과 아들의 자폐증을 치료받은 것을 간증했습니다. 이민아 집사가 자신이 앓던 암은 힘들지 않게 치료받았지만, 자신의 눈병과 아들의 자폐증을 치료받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베푸신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완강히 거부하던 남편이 주님께 돌아오게 되었고, 아버지 이어령씨가 돌아오고 그녀 자신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녀의 간증을 들으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에 빨리 개입하시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에 빨리 응답해주시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기도의 응답이 빠르지 않다고 낙심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 됩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신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며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어떻게 고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예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꾸짖으심으로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기사를 소개하는 마태복음 8장에는 예수께서 베드로 장모의 손을 만지셨더니 열병이 떠났다고 말씀하고, 마가복음 1장에서는 베드로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켰더니 열병이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이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방법을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성경에 비판적인 사람은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성경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다양하게 기록된 것을 통하여 오히려 성경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매스컴마다 동일한 사건을 다르게 보도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합니다. 조선, 중앙, 동아는 보수적인 편에 서서 보도하고, 한계레나 경향은 다소 진보적인 편에서 보도합니다. 그렇다고 어느 신문사의 보도는 맞고 어느 신문사의 보도는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과 다름의 문제일 뿐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기자가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기록할 수 있습니다. 즉 마태는 예수께서 손을 만지신 것을, 마가는 손을 잡아 일으키신 것을, 누가는 열병을 꾸짖으신 것을 각각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런 사실을 말씀드릴까요? 그것은 자신이 알고 경험한 것만 옳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만 보고서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손을 만져야 된다, 마가복음만 보고서 손을 잡아 일으켜야 된다, 누가복음만 보고서 병을 꾸짖어야만 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러한 사실을 의식했던지 바로 뒤인 40절에 많은 사람들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다는 말을 듣고 몰려왔을 때에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셔서” 고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한 가지 방법만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방법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경험한 것만 옳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만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고정관념에 갇히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현대판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됩니다.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생각하고 함부로 정죄하고 비판하게 됩니다. 당연히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만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자신을 더 넓은 세상으로 인도하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지식이 되어야 하지, 자신을 갇히게 하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지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수많은 병자를 고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0-41절을 읽어보십시오. “해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손을 얹어서 각종 병을 고치실 때에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병과 귀신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 병을 고치실 때에 귀신이 떠나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자 보이지 않던 눈이 보였습니다. 듣지 못하던 귀가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과 귀신의 관계에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병이 귀신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즉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락침례교회의 김기동목사와 그의 추종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병에 걸리든지 귀신을 쫓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크게 2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그들이 귀신을 쫓을 때에 귀신과 대화를 하는데 귀신이 병과 자신이 관계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런데 귀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으면 됩니까? 성락침례교회가 이단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그들의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에 세워져 있지 않고 귀신의 말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획일적인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병은 귀신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빨간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모두 빨갛게 보이고, 파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모두 파랗게 보이듯이, 모든 병이 귀신과 관계있다는 안경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병을 치유할 때마다 항상 귀신이 떠나갔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갈 때에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만나서 고쳐주신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니이까 그 부모니이까?”(요 9:1-3). 제자들이 이렇게 질문한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은 평소 제자들이 모든 병의 원인은 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모든 병의 근원은 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드러내시기 위해 때로는 질병을 허용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통시적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편견을 버리고 종합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은 경영이나 학문의 세계에서도 융합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그분께 자신의 생각을 굴복시켜야 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좇아내시자 무리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예수께서 다른 곳으로 가시지 못하도록 만류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눅 4:43).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 이 목적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목적 때문에 죄에서 건져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1:21)고 말씀하셨듯이, 예수께서 복음을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상수동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우리교회와 다른 교회의 차이는 우리는 해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직장을 주시고, 지금까지 생명을 연장시켜주신 것은 모두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러 오셨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병든 자를 고치시기도 하셨고 귀신을 좇아내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복음을 증거할 때에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예수님처럼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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