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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무척 길군요...그러나 이 어두운 밤도 끝날 때가 있겠지요? 그래요 해는 곧 뜰 것입니다. 밝아오는 새벽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
성경본문 : | 요1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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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 주님의교회 |
하나님의 음성 (voice of God)
요10:27
2017.6.11. 주님의교회 주일낮예배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표준/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개역/요10:27)
1.하나님은 육체에게 말씀하십니다.
2.하나님은 혼에게 말씀하십니다.
3.하나님은 영에게 말씀하십니다.
①소리
②음성
4.부르짖는 기도로 영을 깨우라
5.가까이 계시는 분을 지금 부르라
6.내 마음의 소리와 하나님의 음성을 구분하는 방법
1.하나님은 육체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고등학생 하나가 저에게 ‘하나님의 목소리는 어떻게 듣느냐’ 고 물었습니다. 쉽게 설명해 달라고 해서 쉽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람은 ‘육체’와 ‘혼’과 ‘영’이 합쳐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육체와 혼과 영을 통해서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십니다.
첫번째, 하나님은 육체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어떻게 듣느냐고 묻는 것은 아마도 공기로 전달된 파장을 인간의 귀로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느냐는 뜻일 겁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대화하듯이 그렇게 사람의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을 묻는 것입니다.
한번은 혼자 장거리 운전을 하는데 어찌나 졸리던지 거의 비몽사몽깜빡 깜빡 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벼락같은 소리로 “용우야!”하고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졸음쉼터에 차를 대고 한 숨 자고 왔습니다. 저는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냥 두면 사고가 날 수도 있기 때문에 “용우야!” 하고 부르셨다고 의심 없이 믿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 고속버스 운전하시는 집사님은 한 낮에 얼마나 졸린지 거의 10분 동안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운전을 한 적도 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가 “윤집사 일어나!” 하고 소리를 쳐서 눈을 떠 보면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든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믿는다고 하셨습니다.
늘 기도와 성경쓰기를 하시면서 사셨던 저의 어머님은 자주 예수님께서 집에 오셔서 예수님과 대화를 하시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습니다. 대문을 막 걷어 차면서 “순례야!”하고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 위급한 상황이나 특별한 순간에는 소리로 말씀을 하시지만, 소리로 말씀하시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평생에 10번 정도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고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아직까지 소리로 들은 경우는 몇 번 안 됩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어린아이들에게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소리를 음성으로 듣는 것은 가장 낮은 단계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바라는 것입니다.
2.하나님은 혼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혼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과 의지가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 마치 편지를 읽고 편지를 보낸 사람의 뜻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 free will)주셨습니다. 자유의지는 자신의 행동과 판단을 스스로 조절·통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입니다. 의지를 의식하는 것을 ‘판단’이라고 합니다. 뇌 과학자들은 반대로 의지가 판단한 것을 의식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혼’이라고 합니다. 생각, 정신, 집념, 의식, 자각, 인식, 인지, 각성, 판단, 속, 얼 등등등... 이 모든 것은 혼의 작용입니다. 예수님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의 판단도 ‘혼’의 작용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 가운데 자유의지를 주신 피조물은 ‘인간’과 ‘천사’밖에 없습니다. 천사는 그 자유의지를 잘 못 사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썼고 인간들도 자꾸 자신들의 죄악에 가담시키려고 유혹합니다. 우리가 자유의지를 선한 일에 사용하려면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애쓰고 힘써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혼’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성경’을 주셨습니다. 성경을 읽고 우리의 의식이 인식하고 인지하여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가장 쉽고 가장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잘 풀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는 어떻게 듣습니까? 쉽게 설명해 주세요.”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목소리라니까요. 성경을 읽으세요. 그것이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는 찾아보면 차고 넘칩니다.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이미 충분하고 넉넉하게 증명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신앙의 학생에게 성경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행하는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3.하나님은 영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靈)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우리 안에 우리를 돕는 보혜사 성령(聖靈)을 보내 주셔서 내 영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도우십니다.
마음에 성령님을 모신 사람은 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구원받은 사람은 다 그 부르심의 음성을 영으로 듣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주님의 음성을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다고 생각할까요? 그 이유는 ‘음성’과 ‘소리’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적인 음성’으로 말씀하시는데, 자기는 ‘육적인 귀에 소리’로 들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소리와 음성은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1.소리(sound)
소리 또는 음(音)은 공기나 물 같은 매질의 진동을 통해 사람의 청각기관을 자극하여 뇌에서 해석되는 ‘파장’입니다. 우리들의 귀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리는 공기 속을 전해오는 파동입니다. 소리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정보를 전해줍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파동이지만 파동의 여러 가지 성질은 음파의 경우 귀에 들리는 소리의 변화로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공기가 진동하기 때문입니다. 즉 주파수(진동수)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가청주파수는 약 20~20000Hz(20 KHz) 이내이며 나이가 듦에 따라 최대 가청주파수는 낮아지게 됩니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가청주파수 대역폭은 300~3400Hz입니다. 이 주피수 안에서 들리는 사람소리, 차 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이 모든 것이 소리입니다.
2.음성(音聲)
사람이 성대를 이용하여 말하거나, 웃거나, 울거나, 노래할 때 내는 ‘감정의 소리’들을 음성이라고 합니다. 목소리는 음파이기 때문에 크기와 높이가 있습니다. 크기는 성대의 진폭에 의해, 높이는 진동수에 의해 정해집니다. 진폭을 지배하는 것은 호기압으로, 보통 호기할 때의 기관 내압은 5mm 수주(水柱, mH2O) 정도인데, 보통 말소리 정도의 목소리를 낼 때는 그 2~4배로 상승하고, 격앙된 큰 목소리를 낼 때는 때로 400mm로 수주가 됩니다. 같은 크기로 같은 높이의 소리를 내어도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른 소리로 들릴 때 이것을 음색의 차이라고 합니다.
녹음기로 녹음한 소리는 녹음하는 순간의 파장을 기계적으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죽은 소리’입니다. 그러나 직접 눈과 눈을 마주치면서 내는 소리는 서로의 감정과 분위기와 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에 ‘살아 있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음성’으로 말씀하시며 우리는 그것을 ‘영’으로 감지하여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주파수의 진동인 소리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귀로 주님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의 감정으로 전달되는 것이며, 감정은 우리 영, 혼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우리는 영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나의 영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감정은 온갖 쓰레기 같은 정보로 가득 차 있습니다. 텔레비전, 신문, 인터넷, 친구들로부터 눈을 뜨자마자 세상 정보가 내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내 의식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어서 나의 감정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사생활에서부터 시작하여 정치 아야기, 돈 버는 이야기, 맛집 이야기, 땅 사고 집사는 이야기 등등.... 잠시도 쉬지 않고 수많은 정보가 들어와서 포화상태인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영’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설교를 듣거나 기도를 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세상 정보들과 짬뽕이 되어서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 어떻게 하면 필요한 것을 얻을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것을 가질까? 그런 생각만 합니다. 나의 의식(혼)은 아주 잘 발달하여 수박만큼 커져서 세상 소식에 아주 민감하지만, 나의 영(성령)은 소외되어 탱자만큼 작아져서 잠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4.부르짖는 기도로 영을 깨우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잠들어 있는 내 영혼이 깨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내 영혼을 깨우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시55:16)
<짖다>는 것은 개가 컹컹 거리는 것처럼 큰 소리를 내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개가 짖는 것처럼 사자나 호랑이가 으르렁 거리는 것처럼 우렁찬 소리를 내라는 뜻입니다. 기도원이나 통성기도가 이에 해당합니다. 왜 기도하기 전에 ‘주여 삼창’ 을 외치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귀가 어두우셔서 우리보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를 때 우리의 영이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부르짓는 기도는 가장 초보적인 기도이면서 가장 강렬하고 놀라운 기도입니다. 부르짖지 않으면 사람이건 교회건 힘이 없으며 영적인 감각도 둔해서 인간적인 소리만 하거나 인간적인 소리만 가득한 교회가 되고 맙니다. 부르짓는 소리가 가득한 교회는 잠자고 있던 영이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권능과 은총과 영광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고 교회가 됩니다.
옛날 70-80년대 새마을 노래 기억하십니까?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새벽종은 교회 종소리입니다. 온 나라가 교회 새벽종 소리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더니 금방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새벽에 종을 울릴 수 없습니다. 그와 동시에 교회에서도 부르짖는 기도가 점차 식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렘29:12-13)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 안개에 휩싸인 내 영혼이 맑아지고 밝아지고 깨끗해지면 비로소 내 영혼이 제 기능을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옛날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거나 기도원에서 목소리를 높여 열광적인 찬양을 했던 이유가 바로 소리를 지르면서 영혼을 깨우고 정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후에 경배와 찬양집회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율동과 몸동작 중심으로 하는 집회는 부르짖음을 현저하게 약화시키게 되었습니다. 영혼을 건드리는 집회가 아니라 감정을 고조시키는 집회는 유행처럼 반짝하다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5.가까이 계시는 분을 지금 부르라
우리는 언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언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까요?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두 가지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첫 번째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저 높은 하늘 위에 계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으며, 저 높은 곳의 하나님과 전화 통화를 하려고 해도 너무나 먼 곳이라서 감히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남의 이야기처럼 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들었습니다. 여호와를 만날만 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좀 더 솔직해져 봅시다. 우리는 지금 당장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지금 당장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까? 오! 우리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음성을 들려주신다면 어쩌면 우리는 기절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면 심장마비를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는 여호와는 지금 내 옆에 계심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편만하신 분이라 안 계신 곳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에는 하나님의 속성이 들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영이 어두워 그것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의 눈은 우리 몸 안에 있는 뼈를 보지 못하지만 병원에서 엑스레이로 찍어 보면 몸 안에 뼈들이 이쁘게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으로 보면 내 옆에 계신 하나님이 보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계시며 영적인 것만을 추구하시고 영적인 사람과 관계를 맺으십니다. 만약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며 담대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지금 바로 내 옆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6.마음의 소리와 하나님의 음성을 구분하는 방법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내 안에서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내 안에 하나님 말고 또 다른 존재가 말을 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또 다른 존재는 그냥 ‘내 생각’입니다. “하나님 말씀 하세요 제가 듣겠나이다.” 하고 주님의 음성을 기다릴 때 내 안에서 어떤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내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 음성’과 ‘내 생각’을 어떻게 구별할까요?
1.주님이 말씀하실 때는 성령의 감동이 동반됩니다.
주님의 내적 음성이 들리기 전에 성령의 감동이 반드시 먼저 있습니다. 내 생각은 ‘오만 잡생각’입니다. 별로 유익하지 않은 과거의 어떤 생각과 경험의 부스러기들입니다. 생각은 눈을 뜨고 하면 좋은 아이디어가 되지만 눈을 감고하면 잡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동은 성령을 따라 오기 때문에 생각이 잡스럽지 않고 거룩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담을 줍니다. 신학자들은 그것을 ‘거룩한 부담’이라고 표현합니다. “내 머리에서는 이런 생각이 나올 수 없어.” 맞습니다. 도저히 내 머리에서 나온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바로 하나님의 감동이며, 때로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생각이라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담스러운 것이며, 그래서 ‘거룩한 부담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내용은 ‘계시적’(생각이 갑자기 신비하게 떠오른다는 의미)입니다. 내 생각은 온갖 부정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해 볼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음성입니다. 현실적으로 계산해 보면 답이 안 나오는 어떤 일을 “한번 해 보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안돼, 그것은 너무 많은 물질과 에너지와 시간이 들어가는 것이라서 힘들 거야” 하는 생각은 ‘내 생각’이고, “그래도 어떻게 한번 방법을 만들어 보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감동’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순종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신기하게도 일이 풀리면서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들이 가능한 일들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3.주님의 음성은 ‘마땅한’ 말씀이며, 듣는 사람에게 공명을 일으킵니다. 신디 제이콥스는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 마음은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외치게 됩니다.”고 했습니다. 어떤 생각을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그것이 인간의 방법이고 계획이고 인간의 욕심이나 야망에서 나온 것이라면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무거워지고 반대자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고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사람들이 호응을 하여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 역사하시어 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일은 대부분 그렇게 해서 시작됩니다.
4.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지혜와 구재(말재주)가 나타나서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혜롭게 하는 말을 들으면서 자기 자신이 놀랍니다. 또 듣는 다른 사람들도 놀랍니다. 아니 내가 언제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을까? 아니 저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사람이었어? 귀에 쏙쏙 들어오고 정리가 되는데. 맞아 옳은 말이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내주시어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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