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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를 새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안창천 목사............... 조회 수 218 추천 수 0 2017.07.03 23:4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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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1:1-4 
설교자 : 안창천 목사 
참고 : d3왕의사역 평신도제자훈련원 http://d3.or.kr 

주기도를 새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눅11:1-4

2016.10.9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자 예수께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평소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이 새삼스럽게 예수님께 기도에 대해 가르쳐달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가르쳐달라고 요구한 때가 언제였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들은 곁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기도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듣고서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도가 지금까지 그들이 드렸던 기도와 전혀 달랐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기도와 자신들의 기도와 다르지 않았다면 굳이 예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기도가 예수님의 기도와 달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의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통하여 어떤 면에서 기도를 잘못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바르게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방법을 가르쳐주시지 않고 먼저 기도의 대상이 누구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에게 먼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을까요? 일반적으로는 기도할 때에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분이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좀 다르게 해석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자체가 기존의 기도와 다른 것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하나님께 기도를 했지만 그분을 아버지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지만 그들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고 생각했기에 만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자기가 곧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1)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면서 “너의 선한 일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을 인해 치려고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 신성모독죄를 짓게 되어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수님 자신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쳤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을 읽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본문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에 그 믿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즉 무엇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이신데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양육청구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인하여 정정당당하게 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사람에게 구걸하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구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주에서 가장 돈과 권력과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권리는 사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에 불과합니다. 권리는 사용한만큼만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방금 말씀을 드린 대로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가장 먼저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도 여전히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에 예수께서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할 수 있고, 기도하지 않아도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예를 성경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구약성경에서 실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솔로몬이 나이가 어려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했습니까? 하나님께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구하지 않은 부와 명예까지도 주셨습니다. 신약성경에 실례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그런데 세리는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그는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절).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까? 세리의 기도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서 ‘이름’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뜻합니다.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의 전 인격과 신분을 대표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대표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흔히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크게 두 개입니다. 하나는 ‘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은 구약에서 흔히 사용되는 이름으로 우리말 성경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여호와’(Jehovah) 또는 ‘야훼’(Yawh)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영원자(永遠者), 자존자(自存者), 구별자, 구속자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라는 이름에 덧붙여서 사용하여 단어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준비하신다는 ‘여호와 이레’,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여호와 라파’, 우리의 승리가 되신다는 뜻의 ‘여호와 닛시’, 평강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의 ‘여호와 샬롬’, 우리의 현실과 상황 속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뜻의 ‘여호와 삼마’, 우리의 의로움이신 하나님시이라는 뜻의 ‘여호와 치드케누’, 방황하는 양떼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여호와 라하’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3계명, 즉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함부로 ‘여호와’(야훼)라는 단어를 입술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야훼’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대로 발음하지 않고 묵음(默音)으로 그냥 지나쳤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씩 거룩한 옷을 입고, 양의 피를 칠하고, 그들의 지성소에 들어가 야훼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를 수 없기 때문에 여호와라는 이름 외에 다른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이 주인이라는 뜻을 가진 ‘아도나이’(Adonai)”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경솔하게 부르고 있습니까? 사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거룩하게 하기 전부터 이미 거룩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얼마든지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2:24을 읽겠습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기도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 156:1)라고 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통하여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소서”


두 번째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천국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적 개념보다는 미래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정 반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미래보다는 현재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는 말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뤄지기를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기를 기도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 지금 통치하시도록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현재적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으면 장차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왜 현대인들이 천국에 대한 소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장차 들어갈 천국의 행복을 맛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구하면 우리에게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미리 천국에서 경험할 것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사실 때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에 가슴에 와 닿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단지 육신의 빵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구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것을 들을 때 순간적으로 무엇이 떠오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것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나와 메추라기가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40년간 광야에서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주셨기에 이스라엘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었듯이, 우리가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날마다 영적인 양식을 먹어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날마다 일용할 양식만 구하지 영적인 양식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영적으로 교만해서 좀 더 먹어야겠다는 사모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영적인 양식을 구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 세상의 것으로만 배부르게 되고 세속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신령한 양식을 날마다 구하면 예수의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날마다 육적인 양식 뿐 아니라 신령한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넷째로,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은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이 기도가 무슨 뜻입니까? 문자적으로는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성경의 정신과 어긋납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작은 상처를 입힌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크게 상처를 입힌 경우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께 용서를 받았기에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용서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한 자를 용서해 줄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다른 사람을 용서해줄 수 있도록 간구하는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본문은 영어로 “And bring(lead) us not into temptation.” 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마귀가 주는 시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문장의 주어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본문을 난해구절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신학자는 본문의 시험을 연약함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난해구절이 아닙니다. 이 기도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마귀가 유혹한 과정이 빠져있습니다. 즉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도록 하나님께서 버려두지 말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도록 버려두시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왜 이렇게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버려두면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싸워야 할 마귀는 너무 강하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결코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간구하고 있습니까? 날마다 일용할 양식과 영적인 양식을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까? 내게 죄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도록 기도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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