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모여들었던지 ‘수만 명’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정도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다시 12장 1절을 읽겠습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듣고자 몰려왔으나 그들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먼저 무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같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무리들에게 먼저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고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자가 수많은 무리가 아니라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할 자는 비신자가 아니라 신자입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제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수적으로 많은 ‘무리’에 관심을 쏟지 말고, 수적으로 적은 ‘제자’에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면 타겟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으로 변화를 받는 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치면 그만큼 목표가 분명해지기 때문에 훨씬 효과가 큽니다. 따라서 소수의 사람에게 집중하고 그들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천국 비유’에서는 누룩이 좋은 의미로 사용되었지만(마 13:33), 여기서는 바리새인의 외식을 의미하는 나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누룩은 가루 반죽이나 액체를 발효시키고 부패시키는 효소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누룩에 비유해서 말씀하셨을까요? 원래 ‘외식’(휘포크리시스)이라는 말은 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배우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대역을 맡은 것이기 때문에 이 단어가 실제가 아닌 것을 가장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누룩이 전파되는 속도가 매우 빠르듯이, 바리새인들의 외식이 아주 빠르게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들의 외식을 누룩에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지 않은 것은 쉽게 따르게 됩니다. 아이들이 나쁜 것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따라서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며느리가 못된 시어머니를 흉보면서 배운다”라는 말도 이와 상통합니다.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외식하는 자로 전락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외식을 주의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갑자기 ‘무하마드 유누스’가 떠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선한 영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2006년 8월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는데 2006년 10월에 방한하기도 했고, 두 권이나 그의 저서가 우리 글로 번역되었습니다(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사회적 기업만들기). 그는 평소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미국 밴더빌트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1972년 조국 방글라데시로 돌아와 교수가 되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직접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대나무 의자를 만드는 수피야 베굼이라는 한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열심히 일했지만 사채업자의 고금리로 인해 이자를 갚고 나면 겨우 남은 2센트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현장을 목격하고 어떻게 하면 고국의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를 4년 동안 집요하게 연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무담보 무보증으로 대출을 해주는 그라민 은행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라민 은행은 작게 시작했지만 방글라데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자그마치 가난한 여성 250만 여명에게 돈을 빌려 주어 자립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방글라데시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도 이런 은행이 설립돼 소액 창업자들의 대출과 창업 관련 지식과 사업 운영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체 직원이 약 2만 명에 달하고 지점은 약 2200개에 이르는 거대은행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누스의 종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의 선한 영향력을 보면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데, 그의 이름을 봐서는 이슬람교도입니다. 그는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죄인이고 죽은 다음에 심판을 받아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을 당할 자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죄 사함을 받은 의인이고 장차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자입니다. 그런데 왜 실제의 삶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고, 우리는 이전과 별로 다른 것이 없이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외식하는 자로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천국에 소망을 두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천국에 대한 소망보다는 이 땅에서 좀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즉 겉으로만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지 실제로는 각종 욕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외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한동안 이랜드를 기독교의 모델기업으로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애슐리를 비롯한 계열사 회사에서 ‘아르바이트생 임금체불’ 문제로 세상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랜드 그룹의 물건을 구매하지 말자고 불매운동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천국에서 영원히 왕 노릇할 것을 믿는다면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부를 쌓으려는 욕심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2-3절). 이 말은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자신들의 외식을 감추려고 해도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3절에서 ‘골방’은 보물을 보관하거나 극비의 회의를 개최하는 은밀한 곳을 가리키는데, 그곳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는 말은 은밀하게 말한 것조차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언제 그렇게 될까요? 마지막 날입니다. 그날이 곧 오기 때문에 그날이 오기 전, 외식하는데서 돌이켜야 합니다.
둘째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말씀하셨습니다. 4-5절입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왜 예수께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은 우리를 죽여도 그 후에는 더 죽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인 후에 심판하셔서 지옥에 던져 넣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죽음은 일시적이지만 영혼의 심판은 영원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을 동시에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 둘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각종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근원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두려움이 느껴질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종교개혁자 존 녹스의 묘비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결코 인간을 두려워한 일이 없는 자가 여기 잠드노라.” 그렇습니다. 그가 수많은 대적자들과 박해 속에서도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덧붙힌 말씀이 있습니다. 6-7절 말씀입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여기서 ‘참새’는 일반적으로 작은 새를 가리키며, ‘앗사리온’ 역시 가장 작은 화폐단위의 동전입니다. 즉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린다는 것은 매우 사소한 일이 발생한 경우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소한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모르시게 일어나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에게 일어나는 일을 하나님께서 보고만 계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되었다는 말은 완전한 보호를 나타내는 히브리적 용법으로, 지극히 작고 사소한 일까지 하나님께서 일일이 간섭하시며 주관하신다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혹 박해로 죽음을 당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일어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은 어떤 일이든지 결코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허락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셋째로, 끝까지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9절입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했는데, 이는 메시아적 신분과 사역을 말할 때 사용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다니엘이 메시야의 오심을 말하면서 메시야를 인자라고 부른 사실을 통하여 이를 알 수 있습니다(단 7:13). 그런데 본문을 읽어서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로 표현하면서 ‘시인하다’와 ‘부인하다’를 동시에 사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두 동사를 동시에 사용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시인할 수도 있고 부인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주님을 부인하느냐 시인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왜 우리가 사람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고 부인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시인합니다. 또한 우리가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부인하십니다. 사람 앞에서 부인을 당하고 시인을 당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부인을 당하고 시인을 당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잠시 육신의 편함을 위해 잠시 주님을 부인하므로 영원히 주님께 부인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교는 초대교회의 놀라울 부흥에 위협을 느껴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고 그들을 위협하고 복음을 전하지 말 것을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협박과 위협 앞에서도 담대하게 예수님을 시인하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스데반도 산헤드린 공회에 가서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복음을 전했고 신앙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0절-12절입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사실 예수님 안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습니다(마 12:31). 심지어 주를 부인했던 베드로와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바울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유독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과연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은 우리의 죄를 책망하시고 회개하게 하십니다(요 16:9-10). 그런데 성령께서 죄를 회개하라고 하시는데 이를 끝까지 거역하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을 모독하면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이 구절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혹자는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를 부인하는 자는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인데, 그들이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를 부인했다고 죄 사함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주님께서 무리들이 몰려들었지만 먼저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둘째,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라. 셋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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