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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5:2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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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5장 21절~28절: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땅으로 들어가십니다. 왜 이방 땅으로 들어가시느냐?
두로는 견고한 성읍이요, 해양무역의 중심지였고, 두로 왕이 솔로몬 왕의 성전건축을 도운 일이 있고, 예수님께서 방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따른 일도 있고, 그러나 또 이곳 사람들이 헤롯에게 화친을 청한 일도 있고, 사도바울이 방문한 일도 있고, 그리고 회개치 않아서 책망과 멸망의 예언이 언급된 곳이기도 합니다.
시돈은 이스라엘 북쪽의 경계의 고을이요, 시돈에 여신 아스다롯이 있고, 이곳으로부터 우상을 섬기는 여자들을 솔로몬이 끌어들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나라가 두 조각이 난 것입니다.
사사시대에는 시돈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헬라족속에게로 노예로 팔아먹었고, 시돈 땅 엣바알의 딸 이세벨은 이스라엘 왕과 눈이 맞아 북조 이스라엘로 시집을 와 가지고 바알의 제사장들을 끌어들이고, 하나님의 집안에 족보를 완전히 뒤집어 놓고, 남편 죽게 하고, 집안 망해 먹고, 나라 망해 먹고, 자기는 들개 밥이 되고 완전히 쑥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누가 있다고 예수님께서 그 곳으로 가시느냐? 그 고을로 들어가시는데 마침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두로와 시돈 지경 밖으로 나오면서 큰 소리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왜? ‘내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답이 없습니다. 계속 좇아오면서 소리를 지르니까 제자들이 시끄럽기도 하고, 보기가 딱해서인지 예수님께 빨리 돌려보내라고 말을 합니다.
가나안 땅은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에게 축복으로 약속된 땅입니다.
그런데 왜 가나안 여자라고 했을까?
① 이방여자인데 가나안 땅에서 살기 때문에 가나안 여자라고 했을까?
② 가나안 땅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축복된 여자이기 때문에 가나안 여자라고 했을까?
하나님의 축복의 땅에서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예정된 백성이라는 의미로서의 가나안 여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쨌든 사랑하는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만일 나이 많은 딸이라면, 시집을 갈만한 처녀라면 참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보통 보면 나이 어린 여자아이가 귀신이 들리는 것은 좀 드물고 꼭 시집을 갈만한 처녀들이 귀신이 많이 들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질이 좋지 못한 남자 청년들하고 놀다가 사건이 많이 터집니다. 사건이 터지기 좋은 곳은 시돈의 바닷가. 참 무서운 곳입니다. 솔로몬 왕도 당했지. 아합 왕도 당했지.
하나님의 본질이 아닌 이질이며 육적이며 세상적인 시돈처녀, 시돈남자 조심해야 됩니다. 그 이방 우상적인 종교적인 사상에 홀리면 이스라엘 구원생명계대의 족보가 뒤집어지고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처녀 딸이 귀신이 들리면 어떻게 되겠느냐?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겠느냐? 흉악한 행동을 하게 되는데
① 윤리도덕성이 무너집니다.
② 밤과 낮이 구분이 없이 돌아다닙니다.
③ 옳은 소리는 안 듣습니다.
④ 날마다 분장하고 가면 쓰고 나갑니다.
⑤ 옷을 자꾸 벗든지, 또는 옷을 갈기갈기 찢습니다. 옷을 찢어서 입고 다닙니다. 옷을 단정하게 입는 법이 없고 자기 몸을 자꾸 노출을 시키는 것입니다.
⑥ 머리에 핀을 꽂든지 큰 빗을 꽂든지 하고, 남자들을 보고 히죽히죽 웃고 노래를 잘 부릅니다. 그러다가 그만 울기도 합니다.
⑦ 멍하니 먼 산만 쳐다보거나 과거만 생각을 합니다.
⑧ 비가 오려면 밤중이라도 뛰쳐나가고 주룩주룩 오는 비를 홀딱 다 맞고 신을 벗고 맨발로 다닙니다.
이것을 날마다 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떨까? 사랑하는 딸을 낫게 하려고 이방종교 여신 아스다롯 신에게 기도를 안 했을까? 바알의 종들에게 안수는 안 받았겠느냐?
그런데 왜 귀신이 들렸을까? 그것은 귀신이 들끓는 곳에서 산 것이고, 분별이 없었던 것이고, 자라나는 교육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영육간에 분별할 능력이 없는데도 이방종교를 갖는다거나 세상적 육적 소원 목적적으로 신앙을 갖는다면 그것은 결려든 것입니다.
귀신이 뭘 좋아하느냐? 북어대가리? 돼지대가리 입에 돈을 물고 빙긋이 웃고 있는 그런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섬기는 사람들을 귀신이 굉장히 좋아하는 것입니다.
① 귀신은 물이 없는 곳, 진리생명이 없는 곳, 썩은 세상을 좋아합니다.
② 우상을 섬기는 곳, 미신적으로 믿는 곳을 좋아합니다. 인간 자기는 성경도 보고 찬송도 부르고 하지만 자기 속에 썩을 세상이 가득한 욕심으로 된 사림인고로 귀신이 인간 자기를 등 두드려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귀신이 뭘 싫어하느냐?
① 하나님을 싫어하고,
②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를 싫어하고,
③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고,
④ 예수 그리스도처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⑤ 진리이치로 영과 육을 분별시키면 양심이 찔리기 때문에 성을 내던지 도망을 가던지 합니다.
‘말세의 사람들이 귀신들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했으니 귀신들에게 이용을 안 당하려면 처음부터 성경을 아는 사람 없고, 믿음 좋은 사람 없습니다만 이런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온전으로 사람이 참 사람으로 바로 만들어지게 해 달라’고 하면 성령이 도와주십니다.(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방 우상종교는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어느 교회가 세상을 구한다면 이는 이방 우상종교와 다를 바 없으니 그 곳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가 그 지경에서 나와 주님께 부르짖듯이 그 곳에서 나와야 하는데 만일 그 곳에 그대로 있는다면 사람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자가 예수님이 주 다윗의 자손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옛날 구약시대 때 솔로몬 왕이 두로와 시돈과 연락을 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들었는지, 아니면 예수님으로부터 나음을 받은 병자들에게 소문을 들은 건지, 아니면 이스라엘이면서 이방 땅에 살고 있었던 것인지? 어쨌든 역사적 표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인 것만은 틀림없다는 것을 기본신앙으로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를 향하여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 부르짖음 속에는 ‘나는 죄인입니다, 인간은 무능합니다, 사람을 고쳐주옵소서’ 입니다. 사람을 고쳐주실 분은 세상천지에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곧,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딸이 흉악히 귀신들림을 보고 다윗의 신앙진리의 신앙노선으로 찾아서 나온 것을 말함입니다.
다윗의 진리신앙노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노선, 죄와 사망을 정복하는 노선, 진리이치의 신앙노선, 하나님 앞에서 시은자가 아니라 수은자적 신앙노선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신앙노선입니다. 여자는 이 신앙노선으로 찾아서 나온 것입니다.
‘소리질러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나이다’
15장 23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그런데 예수님은 대답이 없습니다. 또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얼마나 불렀는지 제자들이 보기에도 주님이 너무 한다 싶었던 모양입니다. 빨리 보내라고 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렇게 부르는데도 귀가 먹은 것도 아니고 뒤를 돌아보는 척 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의 마음은 보통 마음이 상해서 돌아가겠지?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은 딸을 생각하며 더 간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가 먹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대답이 없나? 첫째로는 무언의 책망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자녀가 왜 우상의 곳에서 사느냐? 또 자식을 어떻게 교육을 시키고 길렀기에 귀신이 들도록 했느냐? 세상을 구하는 이방종교가 그렇게 좋더냐?’ 하는 책망이시고, 두 번째는 여자의 자존심을 팍팍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러면 네가 돌아갈 테지, 너의 자식사랑이 얼마나 깊은가 보자!’ 물론 예수님의 책망은 여자의 궁극적인 태도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리하심입니다.
15장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한참 계시다가 제자들의 말끝에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지 너 같은 여자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얼른 들을 때는 그렇지 들리지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지금 어느 고을로 오신 것인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무엇인가?
① 이스라엘이 민족적 환난을 받을 때에 흩어진 자들,
② 이방 우상종교에 빠져 이용당하는 이스라엘,
③ 세상과 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영적 이스라엘,
④ 비 진리적 육적 종교로 나가는 이스라엘,
⑤ 하나님의 예정된 영적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자들,
⑥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바라는 선민 이스라엘 등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입니다.
이제 가나안 여자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말씀이 ‘너는 이방 땅에서 사는 이방여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여자로서는 항변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을 이스라엘 안에서 태어나게 하거나, 이방 땅에서 태어나게 하는 이것은 누가 한 것이냐? 그것은 주님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주님 당신이 그렇게 태어나게 해 놓으시고 여자의 소원을 안 들어주는 이유를 인간에게 찾는다면 그것은 이유가 안 됩니다.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주님이 말이 안 되는 말을 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24절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면서 이 가나안 여자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인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헬라족속에게로 판 일이 있습니다.(요엘 3:4-6) 요엘선지 때는 주전 800년 정도 되는데 그 때에 남조유다 왕은 웃시야 왕 때인데 이때에 남조유다나라와 북조 이스라엘나라가 같은 형제국인데 싸운 일이 있습니다.
노예로 잡혀갈 때에 도망 나온 그 후손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늘 듣던 말은 ‘너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다, 약속의 땅을 받은 이스라엘이다’ 하며 신앙정신의 교육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은 그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들어가시고, 여자는 두로와 시돈지방의 관할의 경계를 벗어나면서, 그 이방정신 사상을 벗어나면서, 뛰어나오면서 ‘주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고 주님을 부른 것이 아닌가? 주님을 얼마나 만나고 싶었겠느냐? 주님의 진리통치, 다윗의 진리통치를 얼마나 받고 싶었겠느냐?
그리고 사실은 본문으로만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땅에 들어오셔서 하신 일은 이 가나안 여자의 사건을 해결해준 일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와 그의 딸을 구원해주러 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오신 발걸음인 것입니다.
15장 25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절하며 저를 도우소서’
여자는 지금자기가 잃어버린 양이 되어 있는지 잘 모르지만 ‘자기를 도와주실 분은 죽으나 사나 오직 다윗의 자손 예수뿐이다’ 하는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끝에 여자의 말은 ‘주여, 저를 도우소서’ 라고 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처럼 들리지만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한 번 새겨듣는다면 여자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에 도와달라는 말은 당연한 것이고, 주님께가 아니면 누구에게 도와달라고 하겠습니까? 아닌 말로 주님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너는 개 같은 이방여자이니까 나는 못 도와주겠다’고 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여자가 ‘예수가 나를 안 도와주니 이방우상에게 도와달라고 하자’ 해서 궁극적 구원의 목적을 두고 인간을 만드신 주님이신데 그 주님이 아닌 우상 앞에 가서 도와달라고 한다면 주님이 그 꼴을 보시기가 마음이 편할까? 그런고로 마땅히 주님이 도와줘야 된다는 말로서 여자가 도와달라는 말이니까 교만한 말로서 명령이 아니라 주님이 불쌍한 양을 도와줄 수밖에 없는 여태까지의 눈물과 고통과 죄와 한스러움과 후회가 들어있는 말이요, 그 엎드림입니다. 여자는 그 엎드림밖에 없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15장 26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런데 이 엎드려 있는 여자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이 말씀을 또 얼른 들으면 여자를 개로 취급을 하듯이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의중을 보면 개로 취급함이 아니고 여자를 이스라엘 집의 양으로서 신앙의 차원을 끄집어올리려고 하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먹는 떡은 참 귀하고 귀한 떡입니다. 귀하게 먹는 떡입니다. 귀한 자들이 먹는 떡입니다. 이 귀한 자들이 귀하게 먹는 이 떡을 개들에게 휙 던져주는 것처럼 사람에게 내던져 줄 수 있느냐? 개처럼 사는 인간에게 귀한 떡은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귀한 떡을 먹으려면 귀한 사람으로 귀하게 살아야 합니다. 귀한 분의 도움을 받으려면 귀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15장 27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자의 대답이 또 명 대답입니다. ‘주여, 옳습니다, 과연 옳은 이치의 말입니다. 말씀도 옳은 이치의 말씀이지만 사실 그 말씀대로 맞습니다. 제가 사는게 그랬습니다’ 여자 자기가 주님의 그 고귀한 것을 받아먹지 못할 자로 살았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시인을 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마음도 저변에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까지도 이미 주님은 내다보시는 것입니다.
‘주여, 옳습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또한 참 지혜로운 명답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은혜주시고 싶은 그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이치적으로 그렇게 옳은 신앙사상의 답이 나오는지!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개도 제 주인이 있습니다. 주인이 있으니까 주인의 아들들이 받는 밥상 밑에서 흘리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지!
그 개는 주인의 소유입니다. 그 개는 제 주인의 집 관할 안에서 삽니다. 주인으로부터 모든 음식 건강관리 주인의 돌봄을 입는 개입니다. 주인의 아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개도 역시 맛있는 부스러기를 먹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개 취급을 하는 말 같으나 여자에게 진리이치를 한 이치 한 이치 깨닫게 하여 영적인 차원을 끄집어 올리는 것이 보이고, 여자의 말도 타의에 의해서 건, 자의에 의해서 건 개 취급을 하는 말 같으나, 말하자면 여자 자기는 자기를 개 취급하는 것은 아닌데 주님이 그렇게 취급을 하니까 ‘그래, 나는 개다, 개 같이 살았다’ 하고 속에 오기가 있어서 하는 말 같으나 그게 아니고 사실인즉 개 취급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권 애정권 안에서 같이 살고 있는 한 집 식구요, 가족으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한 번 두 번 하시는 말씀이 액면 그대로 여자의 자존심을 바늘로 쿡쿡 쑤시니 여자의 자존심이 팍팍 내려가는 그런 말 같으나 사실은 그런 말이 아니고 여자의 그 무형적 인격적 신앙사상이 이치적으로 올라올 수 있도록 이치적으로 다리를 놓아주는 것으로 여자는 그 사닥다리를 붙잡고 시원시원하게 올라오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같으면 액면 그대로 받아 참말로 자존심이 상해서 ‘사람이 죽든지, 말든지 주님을 못 믿겠다’ 하고 돌아갈 텐데 그런데 여자는 한 시험 한 시험 잘 통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여자의 신앙이 처음부터 돋보입니다. 첫째, 두로와 시돈의 그 사상, 그 지역, 그 관할, 그 치리 밖으로 주님을 찾아서 나왔다는 것. 둘째, 다윗의 자손을 찾았다는 것. 나오고 보니 찾았다는 것이 아니라 찾으려고 나오고, 나오면서 찾았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진리신앙노선의 뿌리를 찾은 것입니다. 셋째, 이스라엘인이면서 이방 땅으로 살려고 간 자기의 무지 무능을 시인을 했고, 넷째로 주님으로부터 책망적인 민족무시 인격무시 사람무시를 당해도, 주님의 제자들로부터 주님의 성도들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아야 사람이 살 수 있다고 하는 그 간절성 마저도 쥐어박고 걷어 차여도 이제는 살길을 찾았으니 주님의 인격을 믿고 주님으로부터 떨어지지 않는 그 믿음입니다. 주님이 그 믿음을 모를까?
15장 28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자는 참말로 고차원적인 인격적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네 소원대로 되라!’ 주님의 선언입니다.
여자의 소원이 무엇이냐?
① 사랑하는 딸이 고쳐지는 것.
② 사람이 온전으로 만들어지는 것.
③ 미친 교회가 고쳐지는 것.
여자는 양육자입니다. 어머니의 믿음을 올려놓고 딸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종, 지도자는 영적 양육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의 믿음부터 이치적으로 올라가면 성도들의 신앙 믿음도 온전하게 잡히고, 사람이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섭니다.
교회가 미쳐서 날뛰느냐? 교역자부터 바로 서는 것이 원칙입니다. 교역자부터 바로 못 서 놓으면 교회가 미쳐서 날뛰게 됩니다.
앞의 사건과 연관시켜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장로들의 유전이나 전통이나 제도나 외모 모양 껍데기 종교운동 외식운동 그것을 자랑 말고, 자기 마음 하나 주님 앞에 바로 못 고치는 헛 인생으로 살지 말고 이 여자처럼 낮아져서 자기 믿음 올라가고 사람이 고쳐지는 이런 믿음을 가지면 이단 되지? 왕따 되겠지?
귀신이 왜 들렸느냐? 개 같이 살면 귀신이 들립니다. 왜 귀신이 들렸느냐? 거룩한 백성이 영육 분별없이 살면 귀신이 들립니다. 왜 귀신이 들렸느냐? 하나님 말씀, 진리의 깨달음을 못 받고 안 만들어지면 귀신들리게 마련입니다.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자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이 여자는 원래 하나님의 예정에도 없는 지옥갈 불택자였고 이방여자인데 생각지도 않게 오다가다 우연히 예수님을 만나서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예수님을 알아보고 너무도 끈질기게 달라붙고, 애걸복걸했고,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속을 박박 긁고 짓밟고 걷어차고 개같이 취급을 해 더 이상 낮출 것도 없을 정도로 취급을 해도 이 여자의 마음이 워낙 넓고 깊고 고상해서 ‘이만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도 손색이 없겠다’ 싶어서 주님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 그리고 난 다음에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합격을 해 준 것인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바로 이 여자입니다. 주님께서 이 여자를 찾으러 그 먼 곳까지 걸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붙잡고 진리신앙의 노선으로만 나가면 신앙 생명역사는 주님의 선언으로 사람이 바로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주석을 보면 대개들 유대인들은 성경을 갖고 있어도 예수를 영접을 안 하기 때문에 구원을 못 받았고, 그래서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향했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해버리면 ‘성경에 이 역사, 활동을 기록하여 현재의 나에게 주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이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네가 보고 네 신앙의 질과 성분을 깨달으라고 주었더니 너는 역사적으로만 말하니 너하고 관계가 없는 남의 말만 하고 있구나’ 하게 되는 것이니 자기에게는 현재적으로 이루어갈 성화구원은 없어집니다.
성경역사의 전개는 믿음 없고 신앙 없는 사람도 잘 압니다. 성경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으나 성경역사를 잘 안다고 믿음 있다고 보면 큰 오산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성경역사를 하나도 모르는 늙은 노인네는 믿음이 하나도 없지요? 그리고 본문은 현재 자기 자신에게 성화구원 면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역사를 말씀으로 만들어서 주시는 것으로 말씀을 붙잡고 주 성령이 찾아오셔서 묻는 것이니 여자처럼 올라가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 보면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찾으러 왔는데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은 그만 흐지부지 없어져 버리고 주님이 헛 다리를 집은 것이라는 식의 말들을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전지전능성, 주님의 예정 면이 다 날아가 없어져 버리고, 기본구원이고 성화구원이고 다 없어진 그야말로 인간 자기 생각으로 만들어진 구원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 이와 같은 궤변이 많습니다.
다시 여자에게로 돌아가서 그 후의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딸이 나음을 선언 받고 돌아가서 어머니로서, 교역자로서 자기부터 바로 서서 진리로서 딸을 양육을 잘 했을까요? 두로와 시돈 땅으로, 그 사상으로 이사를 가니까 그만 딸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흉악한 귀신이 들더니 부모고 교역자고 두들겨 패고, 사정없이 목 조르고, 죽이려고 달려들더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을까요?
이 성경역사를 아는 오늘날의 부모와 교역자들이 흉악한 귀신들린 사상 정신이 뭔지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고도 부모노릇, 교역자노릇 한다고 배를 내밀고 목을 꼿꼿이 세우지? 돈이면 다지? 큰 것 가지면 다지? 부자로 살면 다지? 귀신은 가난한 사람에게만 들어가고 부자에게는 안 들어가나? 부자에게는 더 잘 들어가나? 귀신의 성질이 뭔지 알기는 하나?
오늘날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가, 인간세상이, 부모들, 교역자들부터가 완전히 잘못된 정신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진리이치적으로 빨리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으로 유학을 간 아이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너무나도 많은 아이들이 마약과 범죄의 소굴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춘기 청년이 한 방에서 쌍쌍이 몇 쌍씩 자고, 그것도 밤마다 돌아가면서! 그러고서는 돈이 없으니까 의료보험증 하나 가지고 병원으로 유산시키러 오고. 거짓 목사는 ‘교인들이 몇 명이다’ 하며 권리금으로 교인들을 팔아먹고 딴 데로 가고, 그러면 그 교회에서는 목사할 사람 오라고 신문에 광고를 내고.
그런 것도 그런 것이지만 신앙이 구복주의로 신비주의로 사회주의로 나간 것은 속화되고 타락인 줄 모르고 진리요 진짜인 것처럼 가면을 쓰고 있으니 참말로 걱정 중에 대 걱정입니다. 어쩌면 좋을는지 눈물이 콱 납니다.
우리는 여자의 사건에서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놓고 오묘한 임시적 방편을 쓰시는 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볼 수 있는데
① 한 사람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어 한 사람을 바로 세운 후에 고통을 당하는 자와 함께 모두 바로 세우는 방법이 있고,
② 부모부터 바로 세우기 위해 자녀에게 고통을 주어 부모를 바로 세운 후에 그 부모의 교훈으로 자녀를 바로 세우는 방법이 있고.
교회도 같은 이치입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하나님의 질적인 본질적 단일성으로, 이룰 구원으로 신앙성장이 되어야 하는데 비 진리나 세상적인 정신 사상이 지배가 되면 하나님의 온전한 인격성장은 중단이 되고 즉, 성화구원은 중단이 됩니다. 중단이 되면 흉악한 귀신이 들어와서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사람 자체가 인격 면에서 하나님 앞에 완전히 폐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29절에서 예수님을 따라 모두 산으로 가야 합니다. 무슨 산? 북한산? 갈멜산? 산은 무슨 산이냐, 진리의 산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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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당신의 애성에서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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