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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4:1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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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172884431 |
2012년 12월 9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24장 15절~16절
설교제목 : 산의 영성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 바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마태 24:15~16)】
<성경 이야기>
오늘 이 성경구절을 읽을 때마다 전율(戰慄), 즉 ‘떨림’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너무 정확한 지적, 예리한 분석, 풍부한 상상력의 대안제시 … 뭐 그런 메시지들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성스러운 것으로 포장된 가증스러운 실체들, 그리고 그것들의 위험함입니다.
<이야기 하나 둘 셋>
오늘 성경을 이리 저리 묵상하면서 크게 세 가지 차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세상의 온갖 잡것들조차도 저들의 삶을 꾸려나갈 때 있어서 항상 ‘거룩하게 보이려는 위선적 포장’을 한다는 점입니다. 즉 성스럽게 보이려 한다는 점입니다. 글쎄요. 어떤 사례를 말씀드려 볼까요! 아주 먼 옛날 이야기를 좀 상상해 해볼까요?
인류가 원시사회를 살고 있을 때, 즉 부족국가 이전의 혼돈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을 때, 어떤 힘센 인간이 무지막지한 폭력으로 그 작은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 무례한 인간이 속으로 잔인무도한 왕노릇을 하면서 밖으로는 인자한 인간이라든가, 성스러운 존재라든가 … 뭐 그런 성스러워 보이려는 위선적 몸짓을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야만 인민(人民)에 대한 통치가 수월해지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통치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고 또 통치자 입장에서도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에 손쉬운 통치의 기술로서 ‘종교의 거룩성’이 이용되어왔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잘 생각해야할 대목입니다. 예언자 다니엘과 예수는 바로 그점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예언자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도 그런 일들, 즉 손쉬운 통치의 기술로서 종교의 거룩성이 이용되는 일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널려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사례는 들지 않겠습니다.
둘째로, 예수는 그때에 유대의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산(山)으로 도망하라고 이야기 했을까요? 더불어 살고 있는 인간들을 겁박하고 옥죄는 - 속여먹는 - 그래서 잘 먹고 잘사는 못된 권력자들에 대항해서 투쟁하라고 독려하지 않고, 왜 “산으로 들어가라”고 했을까요? 아주 여러 가지 상상이 가능합니다. 거대권력의 거악(巨惡)을 힘 없는 백성 하나하나가 감당하기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거나, 교활한 악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백성들 스스로조차도 악의 포로로 오염되는 일 때문이거나, 일종의 일시적 후퇴전술이거나, 산(山)이야말로 인간존재를 거룩하게 성화(聖化) 시켜주는 유일무이한 공간 때문이거나, 산(山)은 인간을 본래적 존재로 치유시켜 주는 거룩한 땅이기 때문이거나 … 뭐 대충 그런 차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셋째로, 우리의 미래 이야기입니다. 인류는 현재 도시의 문화를 일군 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이야기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여 볼 때 발견할 수 있는 무서운 진실은, ‘도시의 문화’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점입니다. 인류는 그 문명화의 길을 달리해야 합니다. 그동안 걸어왔던 도시화의 길에 대해서 세밀하게 성찰해야 하고, 이와 궤를 달리하는 ‘자연문화의 길’로 그 방향을 선회해야 합니다. 그게 다니엘과 예수의 말씀에서 발견해야할 본질적 메시지입니다.
권력과 명예, 재물과 쾌락 - 세속적 가치를 위해서 끊임없이 몰려드는 거대 도시의 문화 속에서 인류는 진정한 구원의 길을 찾지 못합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세속화의 문화에는 인간의 참된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류는 자연의 문화로 선회해야 합니다. 그게 예언자들의 말씀에 담겨져 있는 핵심적 메시지입니다.
<설교의 결론>
오늘 설교의 결론은 중국의 위대한 예언자 도연명[陶淵明, 365 ~ 427]의 시 ‘귀거래사’로 대신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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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돌아가자.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바른 길을 좇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바람은 한들한들 가볍게 흔들리고,
길손에게 고향이 예서 얼마나 머냐 물어 보며,
새벽빛이 희미한 것을 한스러워한다.
마침내 저 멀리 우리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갔다.
머슴아이 길에 나와 나를 반기고
어린 것들의 대문에서 손 흔들어 나를 맞는다.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
어린 놈 손 잡고 방에 들어오니,
언제 빚었는지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가득,
술단지 끌어당겨 나 스스로 잔에 따라 마시며,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남쪽 창가에 기대어 마냥 의기 양양해하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한가.
날마다 동산을 거닐며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문이야 달아 놓았지만 찾아오는 이 없어 항상 닫혀 있다.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발길 멎는 대로 쉬다가,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저녁빛이 어두워지며 서산에 해가 지려 하는데,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돌아왔노라.
세상과 사귀지 않고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겠다.
세상과 나는 서로 인연을 끊었으니,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농부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 주니,
앞으로는 서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혹은 장식한 수레를 부르고,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깊은 골짜기의 시냇물을 찾아가고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나무들은 즐거운 듯 생기있게 자라고,
샘물은 졸졸 솟아 흐른다.
만물이 때를 얻어 즐거워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나의 생이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아, 인제 모든 것이 끝이로다!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그 얼마이리.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며.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돈도 지위도 바라지 않고,
죽어 신선이 사는 나라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때로는 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한다.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잠시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 대로 돌아가니,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산의 영성’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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