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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차 한잔 마시면서 전해드리는 햇볕같은이야기
♣♣그 5877번째 쪽지!
□평양대부흥시대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제가 전에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없었다.- 라는 글을 ‘뉴스엔조’이라는 인터넷 신문에 기사로 썼다가 개박살 난 적이 있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분명히 있었다는 분들에게 댓글테러를 당해서 그 뒤로 정내미가 떨어져 다시는 그 신문 가까이 안 갑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없었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아니라 ‘평양대회개운동’이 있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까지만 해도 분명히 ‘평양대회개운동’이었거든요. 그런데, 누군가가 슬그머니 ‘회개’를 ‘부흥’이라고 바꾸어 버렸습니다. 평양의 그 사건은 ‘회개’ 사건이지 ‘부흥’사건이 아닙니다.
사실 100주년이었던 2007년에 학계에서는 성격에 관해 대부흥운동이냐, 대각성운동이냐, 대회개운동이냐, 대사경회냐 하는 논쟁이 한차례 있었습니다. 저는 ‘대회개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길선주 목사의 기록에 의하면, 장대현교회에 1906년 여름부터 하디(Howardie)선교사, 존스턴(Howard A Johnston)박사 등을 초청하여 ‘대부흥회’를 계속 했습니다. 그때 존스턴 박사가 영국 웨일즈 지방에 성령이 임한 대 회개운동에 대해 소개를 했고 회중은 잠잠하여 아무 반응이 없었으나 길선주 조사는 이듬해 1월 ‘대부흥회’라는 용어를 ‘대사경회’로 바꾸고 집회를 열었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그 집회에서 길선주 조사(장로)가 통렬한 ‘회개자복’을 하자 성령이 임했고 그것이 회개운동을 폭발시킨 기폭제로 작용한 것입니다.
감리교 감독 해리스(Harris)는 평양대회개운동에 대해 본국에 보고하는 자료에서 “이 회개운동의 결과는 훌륭하였다. 교회의 신앙수준은 더 높아졌고, 미리 자상한 성경교육이 있었으므로 광신(狂信)은 거의 없었고, 정신이상 같은 경우는 하나도 없었고, 수 천명의 신도가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세웠고, 다수에게 성직(聖職)의 소명을 받게 하였고, 성경말씀을 공부하려고 무려 2천 명이 한 장소에 모이기도 했으며, 수 천명이 글 읽기를 배우고, 기독교를 알아보려고 문의하며, 술주정꾼, 도박꾼, 도적놈, 오입쟁이, 살인강도, 독선적인 유학자들, 구태의연한 불교도들, 여러 천명의 잡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다 교회로 몰려오기 시작하였다”고 했습니다.
평양대부흥을 다시 한번 재현하자!
그런 현수막을 ‘평양대회개를 다시 한번 재현하자!’로 바꿔달고 회개해야 합니다. 평양으로 돌아가려면 ‘회개’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직도 그것이 ‘부흥’이라고 착각하고 부흥을 꿈꾼다면 평양으로 돌아가 봤자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장대현교회가 서있던 만수대 언덕은 ‘김일성 광장’이 되어 버렸고, 십자가가 서 있던 자리에는 높이 20미터의 거대한 김일성 동상이 서 있습니다.
아, 어쩌면 이렇게 극단적으로 역전이 되어버렸을까요? ⓒ최용우
♥2017.9.2 흙날에 좋은해, 밝은달 아빠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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