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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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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8장 1절~4절: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타락된 세상은 물질적인 요소로 커진 세상임금이 호령을 하고 권세와 권리행세를 하고 군림을 합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누가 크냐?’
① 제자들이 세상임금과 예수님을 비교해서 묻는 말인지?
② 아니면 열 두 제자 자기들끼리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서 하는 말인지?
③ 아니면 천국에서는 누가 큰 인물인지 몰라서 알고 싶어서 묻는 말인지?
천국에서의 큰 자를 가르치기 위해서 어린아이 하나를 저희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어린아이들처럼 되라, 안 그러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예수 믿으면 천국에 들어가고, 안 믿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기본구원에 속한 말이 아니라 우리의 자랄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자란 것만큼 들어가고, 못 자란 것은 못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① 어린아이는 지혜도 자라야 되고 몸도 자라야 되고,
② 어른이 되기까지 많이 듣고 많이 배워야 된다는 것,
③ 부모로부터 양육을 받아야 된다는 것.
어른들은 어린아이의 상태를 보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흔히들 다 배운 것처럼, 다 아는 것처럼 권리 권세 권위행세가 많습니다. 이런 어른들이 어린아이의 자세로 돌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속 좁은 어른들은 철없는 어린아이들과 똑같은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넓지 못하고 옹졸하고 깊지 못하고 잘 틀어지고 교만하고 허풍스럽고 공갈이 많고 시기 질투도 많고 욕심도 많고 허영심도 많고. 어린아이 속에 든 것은 다 들어 있습니다. 자기에게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요 완전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자는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어른을 향하여 자라듯이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자라고 성장해야 합니다. 일반어른은 이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가 자라듯이 온전을 향하여 자랄 수 있는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습니다. 예수 믿고 따른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예수 믿는 효력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어른들이 세상적으로 커져 가는 자리다툼을 할 바에야 뭐 하려고 예수를 배우겠느냐? 예수를 배울 필요가 없지 않은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신 주님 앞에 타락적 성분을 가진 자기가 낮아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라기란, 진리능력 진리의 실력이 커지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 주님 앞에서 자기가 자라야 할 어린아이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천국적 실력적으로 자랄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천국에서의 큰 자는 세상종교적 정치나 종교적 예술적으로, 또는 비 진리적 이질적인 신비적인 능력 등 이런 것으로 큰 자가 아니고 오직 진리로 인격화되고 사상화 되고 자체화 되고 실상화된 것만큼 남달리 성장된 것만큼 큰 자입니다. 천국은 세상종교적인 것은 못 들어가고 다 빠집니다. 영에 속한 것이라야 다 들어갑니다. 자랄 수 있는 특성은 어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없고 어린아이라고 느끼는 사람에게만 있는 특성이 있습니다. 진리 앞에 낮아지는 그 사람을 따라올 수 있는 어른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다 자랐기 때문에 자랄 수 있는 희망은 없습니다.
그런데 희망없는 어른들이 천국에 가지고 들어가지 못할 돈 앞에는, 명예 권세 앞에는, 덩어리 큰 것 앞에는 머리 잘 숙이고 낮아지는 비굴한 어른도 있느냐?
18장 5절: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영접은 기뻐서 즐거워서 기다렸다는 듯이 쌍손을 들고 환영을 하는 자세입니다. ‘어린아이’란 성장가능성을 말합니다. ‘하나’는 무한히 클 수 있는 첫 숫자를 의미합니다. 어린아이 하나, 어린아이 둘, 어린아이 셋 등 이치가 무한히 커질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하나, 인간 보기에 별 것이 아닙니다. 힘없고 나약하고. 그러나 그 속에 들어 있는 의미는 도덕성도 들어 있고 능력성도 들어 있고 영광성도 들어 있고 주권성도 들어 있고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 의미들이 본질이라면 하나님의 본질성으로 자랄 수 있는 그야말로 주님처럼 온전입니다. 이 자가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18장 4절, 6절, 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주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낮아진 그 마음, 자기의 부족성을 알고 진리로 성장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 마음을 실족케 하면 연재맷돌을 그 목에 매달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
실족은 진리신앙 노선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 진리신앙 노선에서 이탈시키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궁극적 성화구원의 목적에서 이탈하여 비 진리적 이질적 육적 세상적 종교적으로 예수 믿게 하는 것, 유혹 미혹 오점 비난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실족이다’ 하는 것을 ‘교회 다니다가 안 다닌다. 어떤 사람의 잘못으로 그만 교회에 안 다닌다. 교인이 그를 실족시켰다’ 단순히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안 됩니다. 진리에서 생활을 잘 하고 있는 사람을 비 진리로 데려간 것이라는 말입니다. 비 진리에서 아무리 충성봉사를 열심히 했어도 이는 이미 큰 실족입니다. 진리신앙의 본질, 그리고 영원궁극적 신앙의 격차성을 모르고 가르친다면 이미 실족이라고 보아집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에 영원궁극적 구원에 대한 목적을 두고 우리 인간을 지으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사역도 역시 우리의 영원궁극적 구원에 대해 목적적인 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역적으로 본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기본구원을 입히시고 성령은 성화구원을 입히시는 역사를 지금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영원궁극에 해당되는 목적적이며 결과적이며 최종적인 이 성화구원은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의 이치로써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적 온전을 향한 성장을 못하게 하는 것이 실족인데, 걸려 넘어진 것인데 자기가 알았던 몰랐던 실족의 성질들을 보면
① 일 잘하면 큰상이 있다.
② 예수 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되고 만사형통된다.
③ 어떻게 하면 교회덩어리 키우나?
④ 무당 짓을 해 놓고 누가 크니이까?
⑤ 박사증 따놓고 누가 크니이까?
⑥ 가라지로 만들어 놓고 누가 크니이까?
⑦ 큰 예배당 지어놓고 누가 크니이까?
이런 등등의 요소로서 신앙을 시키고 가르쳐왔다면 이게 실족입니다. 이런 것들은 진리신앙이 아니며, 진리이치가 나와서 깨달아진 신앙행위가 아닙니다. 이런 신앙노선에서 지금도 모두들 ‘누가 크니이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시겠느냐? ‘너도 연자맷돌을 목에 달아 깊은 바다에 빠져 죽으라, 꼴도 보기 싫다’고 말씀을 안 하실까?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
천국에서 커지는 이치를 땅에서 교역자가 안 가르쳐주면 누가 가르칠 것인가? 모두들 세상불바다에서 ‘누가 크니이까’ 하고 있는데 이 실족된 신앙상태로 가르치고 왔다면 자기가 무슨 수로 그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
주의 종이라면서 어떻게 실력의 격차, 차등성으로 영원히 되어지는 이 면을 몰라 진리이치에 대해 우습게 여기고, 하찮게 여기고, 가볍게 여기고, 시시하게 여길 수 있을까?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목회를 하느냐? 주의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나 알고 주의 종이 되었느냐? ‘내가 뽑은 가룟유다도 저 모양으로 배 터져 죽었는데 너는 내가 뽑지도 아니했고, 또 너는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있는데 가룟유다가 안 된다고 네 스스로 장담할 수 있느냐?’ 인간활동이 앞서고, 거기에다 성경구절을 이용하면 그게 하나님 말씀이냐? 방편이 목적으로 되면 그게 신앙인가?
나만 위한 세상은 불신세상이지. 또한 너를 위하고 우리를 위한 것이라도 세상 것이라면 거기에도 하나님의 진노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천국, 너를 위한 천국, 나를 위한 천국이라야 성령의 역사이고 실족이 아닙니다.
선악과 따먹은 세상에는 실족의 원인물들이 많습니다. 방해자도 많고 훼방자도 많고 함정도 많습니다. 올무도 많고 유혹도 많고 비난거리도 많고 죄를 짓게 하여 넘어질 것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무의식중에 죄를 짓고, 억압 강압에 죄짓고, 고의적으로 죄짓고, 스스로 가서 죄짓고, 따라가서 죄짓고, 끌려가서 죄짓고, 눈으로 보고 죄짓고, 혼자 되어 죄짓고, 둘이 되어 죄짓고.
연자맷돌은 곡식을 찢기 위해 소나 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입니다. 옛날에 이방인들이 죄지은 자나 포로들을 붙잡아다가 형벌로, 또는 사형선고를 받은 자에게 짐승처럼 그 맷돌을 돌리게 했습니다. ‘차라리 이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아서 깊은 바다에 빠져죽는 것이 낫다’ 하는 것은 그러니까 성화구원에 방해자는, 성화구원을 못 이루게 한 자는 그 죄가 사형이나 살인을 하는 것보다도 더 흉악무도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종들이 이 말씀의 무게를 어느 정도 민감하게 받아들일까?
하나님의 진노가, 재앙이 왜 오느냐? 실족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타가 실족치 않게 하려면 적극적으로 진리이치를 깨닫고 사상화 시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는 대신관계적인 면에서, 대인관계적인 면에서, 대사관계적인 면에서, 대물관계적인 면에서 오점거리 비난거리 실족의 원인거리 걸림돌이 될만한 것을 유심히 살펴서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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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당신의 애성에서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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