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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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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21장 1절~5절: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이끌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가까이 벧바게에 왔을 때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불러서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보면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가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라 하면 물론 열 두 제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앞의 말씀을 염두에 둘 때 눈이 밝아진 두 소경으로 연결을 시켜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의 눈이 밝아야 예수님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뜬 자라야 맞은편으로 가서 나귀가 어디에 매여 있는지 세밀히 관찰을 하고 발견을 해서 나귀를 찾아서 예수님께 끌고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그 명령수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예언대로 무명의 성도가 미리 준비해 둔 대로 우리의 구원운동에 쓰임이 될 수 있는 것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 뜬 제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맞은편 마을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임이 분명합니다. ‘앞뒷집 사정을 잘 아는 마을, 가난한 마을, 보잘 것 없는 마을. 이런 곳에서 무엇이 나오겠느냐, 무엇이 있겠느냐’ 그렇게 볼 것이 아닙니다. 잘 찾아보면 나귀와 나귀새끼가 매여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매어 놓은 줄 아느냐? 인간 택자들 구원사역에 쓰여질 나귀입니다.
이 이름 없는 BC 500여년 전의 무명의 성도, 스가랴 선지의 그 예언의 감화를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그 사람을 압니다.
“만일 누가 뭐라고 그러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아, 그렇습니까? 얼마든지 쓰십시오’ 하고 즉시 보내 줄 것이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주님도 그 무명의 성도의 의중을 알지만, 그 무명의 성도 역시 그 정신 사상이 평소에 주님과 인격적 의사적으로 잘 통한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즉시 보낼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라는 분이 무슨 목적으로 오셨는지?
예수라는 분이 무슨 목적으로 시키시는지?
예수라는 분이 무슨 소원을 가지고 그 일을 하시는지?
예수라는 분이 무슨 의사로써 그 말씀을 하시는지?
평소에 인격적으로 관계성적으로 잘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보통 보면 인격적 관계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보기 드뭅니다. 대부분 보면 물질 대 물질목적으로 사람과의 관계성을 가지려고 하니 의사불통이고, 서로가 믿을 수 없는 고통의 세상입니다.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성이 그립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아, 예 그렇습니까? 언제든지 쓰십시오’
내 몸을 쓰시겠습니까?
내 시간을 쓰시겠습니까?
내 재산을 쓰시겠습니까?
언제든지 쓰십시오. 현재는 제가 안 갖고 있지만 모두가 주님의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기 몸을 하나님께 드렸고, 아브라함은 아들과 전 재산을 드렸고, 아리마대 요셉은 돌무덤을 드렸고, 무명의 성도는 나귀를 드렸고. 이 외에도 많이 있지만 이런 성도들의 믿음은 우리에게 해와 같이 영광스럽게 빛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 천지만물 우주, 자기의 몸까지 주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발가벗고 나온 그 알몸도 주님의 것입니다. 최고의 영광스러운 자가 되라고 세상이라는 시공간 속에, 사건 속에 나그네 생활로 잠깐 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사용하는 것도 감사한 일인데 주님께서 ‘좀 빌려쓰자’ 하니 그만 마음이 싹 오그라집니다.
활짝 핀 마음은 참 보기가 좋습니다.
자기 부요만을 위해서,
자기 가정만을 위해서,
자기 자식만을 위해서,
물질적 부요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의 그 마음이 평화로울까?
예를 들면 한 어린아이에게 ‘사탕 하나 다오’ 하니 서슴치 않고 사탕을 어른 입에 넣어준다면 그 어린아이는 어른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반면에 한 어린아이는 손에 든 사탕을 주먹으로 쥐고 뒤로 감춘다면 어른은 ‘예끼 이 녀석, 꼼쟁이 녀석’ 하며 머리를 쥐어박고 어른은 돌아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면 즉시 보내리라’ ‘아, 예 쓰십시오’ 즉시 쾌히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 준비를 한 사람이요, 단 마음으로 한 사람이요, ‘행여나 주님이 내 것을 안 쓰시면 어쩌지’ 하며 주님이 안 쓰시면 서운해할 사람이요, 주님 마음대로 골라서 쓰시라고 풍족한 마음으로 두 마리나 매어 놓았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치 않으면 어찌 이렇게 미리 준비된 마음이 있었겠느냐?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니 자기 몸처럼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고 물질을 주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니 음식에 정성이 가고 겸손해지고 봉사심이 나오고,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니 맛있는 음식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니 순종심이 나오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니 희생이 나오고, 형제끼리 사랑을 하니 우애가 나오고 덕을 세웁니다. 사랑치 않으면 마음부터 멀어지기 때문에 순종하는 행동이 없습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미리 준비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의 신앙성장의 위치에서,
자기의 신앙성장의 신분에서,
자기의 신앙성장의 시간에서,
자기의 신앙성장의 장소에서,
자기의 신앙성장의 하는 일에서,
미리 준비된 사랑이 실천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교회로서 사랑에서 나오는 준비가 없다면 어떻게 모든 관계성이 즐겁게 이루어지겠느냐? 가정에서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가정을 주신 의미가 있겠느냐?
교회라는 의미가 무엇이냐?
가정이라는 의미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의 장소입니다.
사랑 없는 마음에는 무엇이든지 준비가 없습니다.
녹슨 기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뻑뻑하고 잡음이 많습니다. 흐린 날씨처럼 우중충하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없는 마음은 피곤하고 고달픈 삶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자기 기준, 생활하는 것도 자기 기준, 교회 다니는 것도 자기 기준, 세상 사는 것도 자기 기준. 참말로 고달픕니다. 마음관계성이 참 고달픕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이 무명의 성도는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의 이 예언을 믿은 사람이고, 여기서 미래의 영감의 받아서 자기가 그 나귀를 준비를 하고 살아온 성도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선지자가 하신 말씀을 내가 이루어야지, 전무후무한 하나밖에 없는 그 실천을 내가 해야지, 영원 전부터 예정된 주님의 구원운동에, 영원 전부터 예정된 성도의 구원운동에, 주님이 왕으로 입성되는 그 운동의 그 절정에 내가 한 순서 동참을 해야지. 주님이 그 날 쓰실 일에 빈틈없이 준비를 해 두어야지, 철두철미하게 그 날 쓰실 일에 빈틈없이 준비해 두어야지!’
이렇게 사랑으로 준비된 신앙을 가진 그 무명의 성도!
보잘 것 없는 마을,
이름도 없는 마을,
가난한 마을,
가난한 성도,
이름도 없는 성도,
그 무명의 그 신앙심을 왜 모르시겠느냐?
‘시온의 딸아, 네 왕이 네게 임한다’
역사적으로는 주님이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이시나,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적 영적인 신앙사상은 그 신앙을 가진 그 무명의 성도에게 주님이 왕으로 임하셨고, 겸손한 왕으로 임하셨고, 큰 은총과 사랑을 주시는 왕으로서 임하신 것입니다. 영원히 주님의 총애를 받는 성도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그 역사들을 이루심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신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통한 주님의 말씀은 인간구원의 역사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원인 동기 목적이 이루어지는 역사요,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늘의 일들입니다. 이 일들은 인간이 살면서 순간마다 관찰을 할 일들이요, 모르고 놓치면 인간 자기에게는 영원히 불행입니다. 자기 존재의 목적이 아무런 가치가 없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시는 그 구원역사를 하시고자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시는데 언젠가 멀리서부터 선지자의 예언을 귀담아 듣고 주님의 전무후무한 이 구원운동에 나귀를 제공하여 자원적 소원적으로 동참하고 협조한 그의 이 일은 영원히 기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어느 곳이던 교회가 있고, 성경이 가는 곳이면 예수님께서 무명의 성도가 제공을 한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셨다고, 멍에를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셨다고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나귀새끼가 제 어미가 멍에를 메는 것을 보고 어미를 본받았는지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을 본 나귀새끼의 어미의 마음이 좋습니다. ‘주님이 왕 되는 일에 내 새끼도 기꺼이 한 몫을 하는구나!’ 우리는 만물들이 하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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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당신의 애성에서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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