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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4: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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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7.4.11 춘천 성암감리교회 |
부활절을 지킨다는 것
갈4:9-10
성탄절은 12월 25일입니다. 성탄절 다음으로 교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절기가 부활절인데, 부활절은 성탄절 같이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부활절은 특정한 계산법에 따라 해마다 다르게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춘분이 지난 첫 번째 보름을 기준으로 바로 직후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오래된 교회의 절기임에도 동방과 서방이 부활절 날짜를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복잡하게 조정이 된 것입니다. 매년 날짜를 계산해야 한다는 건 그 의례가 고착이 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다르게 읽을 가능성이 더 많이 열려있게 됩니다.
춘분직후의 보름 이후 첫 번째 주일, 왜 하필 춘분 직후 보름이 기준이 되었을까요? 유대교는 니산월(3-4월)15일에 유월절을 지냈습니다. 이 날 어린양을 잡았죠. 이는 대속을 뜻하는 거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고 이튿날인 안식일을 지나 사흘 만에 부활합니다. 유대력은 태음력이고 15일은 보름달이 뜹니다. 그래서 보름이 지나 첫 번째 주일이 예수가 부활한 날이라는 겁니다. 이게 태양력을 쓰는 서구사회로 넘어와서 춘분을 지나.. 이렇게 바뀐 것이지요.
여하튼, 기독교의 부활절은 유대교의 유월절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지만, 출애급기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박하고 그로부터 탈출 하면서 비롯된 게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란 ‘비켜가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단지 ‘유월’이라고 하지 않고 ‘해방절’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은 해방의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바로 그 ‘유대인의 해방’을 ‘예수의 부활’과 연결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유대인들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되던 날,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해방의 사건을 벌이려다가 십자가에 처형됩니다. 예수와 함께 해방을 꿈꾸던 이들의 가슴에 주검이 생긴 것이지요. 그러나 그대로 끝날 수는 없는 거였습니다. 해방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소멸될 뻔했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리는 날로 되살립니다. 권력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해방 염원을 불굴의 의지로 되살려낸 날이 바로 ‘부활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부활절을 지킨다고 할 때는 유월절의 해방을 예수 부활절에 연계시켜야 하는 거죠.
부활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중의 소망에 기초합니다. 그것은 낡은 시대, 주님을 죽게 하고, 주를 따르는 이를 죽게 하며, 주를 향한 대중의 꿈을 죽이는 시대, 그러한 죽임의 장치와 시대를 추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의 부활은 새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의 부활절은 하나님 나라를 선취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식입니다. 여기서 ‘선취’라는 단어를 기억하셔야 하셔야 합니다. 앞으로, 미래에 그렇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현재를 냉철하게 읽고 오늘의 삶에서 탈출 또는 부활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해방은 ‘현재’라는 삶의 지평속으로 육화시키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세계를 비평적으로 읽고, 교회를 비평적으로 바라보며, 우리 자신의 일상과 삶의 가치를 비평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본문을 살아 있는 비평 신앙의 한 예로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고 계신데 왜 또다시 그 무력하고 천한 자연 숭배로 되돌아가서 그것들의 종노릇을 하려고 합니까?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숭상하기 시작했다고 하니(갈4:9-10)
여기서 바울이 하려는 말이 뭡니까? 날과 달과 해의 절기 준수를 신앙의 요체로 믿는 종교심을 버리라는 게 아닙니까? 그러면서 신앙의 요체는 절기의 준수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의 탈출(해방)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고정화된 ‘시간의 종교’ 의 끝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때를 고정시키는 것은 현재 맞이하는 시간의 생생함을 외면하게 합니다. 그날에 낭송하고 고백하는 내용을 고정시키는 것은 경험의 생생함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번 돌아오는 절기를 맞으면서도 인간사의 희노애락이 그러한 신앙 속에서 생략이 되는 것입니다.
바른 신앙은 하나님의 해방 사건을 기리기 위해 그때마다의 역사의 구체적인 경험과 결합을 해야 하는 겁니다. 신앙은 고정시키는데 있는 게 아닙니다. 세계의 구체적인 현실속에 자신을 투신하고, 해방의 염원을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가 지키는 그것 부활이면 부활, 성탄이면 성탄이 실현이 되는 거죠. 그러므로 예배는, 절기는 그것을 고백하는 무대여야 하는 겁니다.
신영복 선생의 글에 실린 한 구절을 오늘 말씀의 요약으로 삼겠습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약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의 유고집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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