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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으라!

마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712 추천 수 0 2018.02.03 22: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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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3:24-3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55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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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으라!”

막 13:24-37, 대림절 첫째 주일, 2017년 12월3일

 

24.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6.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27.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28.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9.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0.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1.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대림절 이야기


오늘은 전세계교회가 지키는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성탄절인 12월25일 전까지 네 주간이 대림절입니다. 대강절이라고도 부르고 강림절이라고도 부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대림절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의 초림이며, 둘째는 예수의 재림이고, 셋째는 예수의 임재입니다. 초림은 과거이고, 재림은 미래이며, 임재는 현재입니다. 이중에서 핵심은 종말에 일어날 재림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예수가 세상 마지막 때 생명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이야기를 반복했습니다.


이에 대한 보도가 신약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행 1:6-11절이 보도하는 예수 승천에 대한 이야기에 재림 이야기가 포함됩니다. 부활의 예수는 행 1:8절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에 의지하여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하신 뒤에 승천하셨습니다. 구름이 제자들의 시야를 가려서 더 이상 예수를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 흰옷 입은 천사가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살전 3:13절과 4:15절에서도 예수의 강림, 즉 재림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 4:15). 데살로니가 교회 신자들은 예수의 재림을 일상에서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곤란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의 재림은 지연되고 교인들은 자꾸 죽습니다. 뭔가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재림이 비록 늦어지고 있으나 재림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아무 차이가 없으니 죽은 이들로 인해서 걱정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의 재림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많지 않을 겁니다. 교우들과 대화하는 중에 한두 번 생각한 적이 있었을지 몰라도 그게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 주제는 실제의 현실에 어울리지도 않고 신앙생활에서 절실하게 필요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열광적이고 소종파적인 사이비 이단에 속하는 교회가 주로 이런 문제에 관심을 보입니다. 오늘날 정통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봐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재림이 속히 발생한다고 실제로 믿는다면 교회당을 건축하지 않을 겁니다. 장로나 권사가 되려고 신경을 쓰지도 않습니다.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설교를 하고, 그런 기도를 드리고, 그런 찬송을 부르면서 교회의 외적 성장에 매달리는 것은 교회의 자가당착적인 현상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재림 설교를 하는 교회도 드물고, 대림절을 지키는 교회도 드뭅니다. 재림 신앙은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뜨거운 감자와 같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 못 본채 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21세기 지성인으로 살아가면서 그걸 진지하게 대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본문 이야기


오늘 설교 성경본문인 막 13:24-37절에는 예수의 재림 문제가 다뤄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니, 당시 전체 교회에 잘 알려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는 세 토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째 토막은 24-27절입니다. 우주의 대변혁이 묘사됩니다. 24,25절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고대인들에게 하늘과 별들은 사람의 힘이 미칠 수 없는 비밀 가득한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과 별을 섬겼습니다. 하나님 신앙으로 살던 사람들은 초월적인 힘이 작동될 것으로 보이는 하늘과 별도 역시 피조물이기에 끝장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끝장나는 마지막 순간에 ‘인자’가 권능과 영광으로 온다고 26절이 말합니다. 인자는 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유대의 묵시사상에서 인자는 종말에 세상을 심판하러 올 이를 가리켰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 인자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었습니다.


둘째 토막은 28-32절입니다. 우주의 대변혁이 일어나고 인자가 오는 마지막은 ‘언제인가’에 대한 질문이 그것입니다. 본문은 이에 관해서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합니다. 하나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계절이 오는 걸 알 수 있듯이 마지막 때의 조짐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으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모른다는 사실이 32절에서 강조되었습니다. 천사들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도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만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모순처럼 들립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마지막 때에 관해서 알아볼 수 있는 조짐이 있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모순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모순이 아닙니다. 일상에서도 이런 경험은 가능합니다. 1년 전 국정 농단 사태로 인해 촛불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조짐은 이미 여러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포항의 지진도 조짐이 있었지만 오늘의 과학이 그걸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세상일도 그러한데 하나님의 종말 심판과 창조의 완성은 더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셋째 토막은 33-37절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명령문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집을 비우고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집안일을 각각 여러 사람들에게 맡겼습니다.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위임 맡은 사람들은 정신 차리고 자기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갑자기 주인이 나타났을 때 종들과 문지기들이 자고 있다면 낭패도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닙니다. 깨어 있으라는 비유는 복음서에 자주 나옵니다. 마 25:1-13절에는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는 말로 비유가 시작됩니다. 미련한 처녀 다섯은 기름 없이 등만 들었고, 지혜로운 처녀 다섯은 등과 기름을 다 준비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에 따르면 신부를 데리러 오는 신랑 일행이 언제 도착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모두 피곤해서 지쳐 있는 밤중에 신랑 일행이 온다면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동을 밝힐 수 없어서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눅 12:35-40절에도 나옵니다. 40절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깨어 있음”


깨어 있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대충이라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언젠가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터이니 세상일에 한눈팔지 말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한국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새벽부터 기도를 드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밤새워 기도하는 분들도 많고, 세계 오지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책으로 유명해진 목사도 있습니다. 이런 것만 본다면 우리나라 신자들만큼 깨어 있는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도 없겠지만 실제로 우리나라 교회가 깨어 있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왜곡된 과도한 열정은 오히려 영혼을 잠들게 합니다. 세상을 도피하게 만들고 이원론에 빠지게 합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성찰하지 못하게 합니다.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깨어 있음’이 무엇일까요? 그걸 모르면 공연한 일에 삶이 쫓겨서 신경과민 상태에 떨어지고, 또는 자기는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이라는 자책감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깨어 있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다른 말씀에 비추어보는 게 좋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카이로스)는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는 구절(막 13:33)에서의 ‘때’(카이로스)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 카이로스는 하나님 나라가 오는 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하나님 나라가 올 것으로는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이 명실상부하게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위상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은 하나님 나라가 여전히 미래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래서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여기에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현실과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의 눈에는 들어왔지만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깨어 있었던 반면에 유대 지도자들은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카이로스와 바실레이아의 현실에서 말하고 행동한 예수가 유대 지도자들에게 신성모독자로 비쳤습니다.


예수는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와서 현실이 되었다고 확신하고 거기에 집중한 것일까요? 눈에 보이는 근거는 없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로마 제국이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갑질’이 있었고, 유대교가 부패해 있었고, 억울한 죽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멀게 느껴졌습니다. 예수는 아수라장 같은 세상에서도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하나님 나라를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믿었습니다. 그게 깨어 있음의 본질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은 분이고 제대로 깨어 있었던 분입니다.


제가 반복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일상은 예수 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습니다. 대학교 총장이나 대학교 건물 청소부나 궁극적인 일상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한 사람은 총장실에서 사무를 보고, 다른 한 사람은 복도나 화장실 청소를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차이는 인간 존재라는 엄청난 사실 앞에서 볼 때 사소한 것이라서 없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있고, 전혀 안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릴 때는 딱지치기와 구슬치기가 삶의 모든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생의 희비가 결정되는 듯이 느껴집니다. 어른의 삶도 이와 다를 게 없습니다. 딱지와 구슬이 돈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어린 시절을 지나면 딱지와 구슬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그런 데 매달린다면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합니다. 한 인간의 발달과 더불어서 딱지와 구슬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지만 돈만은 나이가 들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매달리게 됩니다. 이런 설명은 현재 배부르기 때문에 나오는 거지 배고프면 모든 게 돈벌이로만 보인다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그런 처지에 떨어진 분들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삶의 근본 태도는 달라져야겠지요. 어릴 때 딱지와 구슬을 친구들에게 나눠주는 아이들도 있고, 자기만 아는 비밀 장소에 숨겨 두고 흐뭇해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나중에 그 장소를 까먹어서 모든 게 허사가 되기도 합니다. 딱지와 구슬을 모으는 것에 삶의 목표를 두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순전히 놀이의 과정으로 대하면서 다른 이들과 함께 평화와 해방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질적인 변화에 대한 각성


기독교의 대림절 신앙은 일상을 소유와 업적에 매달리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존재의 깊이에서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만이라면 굳이 기독교 신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월든』을 쓴 소로우나 『무소유』를 말한 법정을 비롯해서 수많은 선생들이 삶을 귀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쳤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들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대림절 신앙에는 그런 가르침과 전혀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이 질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완성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영혼을 맡깁니다. 거기서만 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능력이 현실화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질적으로 변화되어 완성될 세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요? 성경은 그것을 묵시적인 형태나 신화적인 형태로 묘사할 뿐이지 구체화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표현했고, 요한계시록은 하늘이 종잇장처럼 말리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한다고 말했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세상이 하나님의 고유한 능력에 의해서 상전벽해라 할 정도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고 완성된다는 사실에 민감해지라는 뜻입니다. 그런 새로운 세상과 그런 생명을 신약성경은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그 부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영혼에 가득할 때 우리는 명실상부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설명에 실감이 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인정합니다. 우리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만 예민하게 실감할 수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는 것을 실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처음부터 아직 오지 않은 종말의 완성을 내다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전제합니다.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창조의 완성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봄에 석류꽃을 보고 가을에 석류가 맺힐 것은 미리 실감합니다. 이에 반해서 하나님 창조의 완성은 실감하지 못합니다. 나무와 꽃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반복해서 경험할 수 있으나 창조의 완성은 반복 경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나무에서 어떤 조짐을 아는 사람은 더 근원적인에 것에 대한 조짐도 아는 법입니다. 알뿐만 아니라 그걸 희망하기도 합니다. 이런 신앙의 전통이 기독교 역사에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이런 신앙전통보다 더 확실한 것을 여러분이 다른 데서 발견했다면 그것에 기대서 살아가십시오. 저는 기독교의 종말 신앙, 즉 재림 신앙이 가장 확실하다고 보기에 여기에 기대서 살아가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다음입니다. 오늘 말씀에 따라 깨어 있다고 해서 실제 우리의 삶과 운명에서 달라질 것이 있을까요? 궁극적으로는 없습니다. 비관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해와 달과 별이 힘을 잃어서 우주가 파국을 맞는 순간을 우주론적으로나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기다릴 뿐입니다. 지구는 아주 절묘한 물리적 균형을 이루었기에 우리의 생존이 가능한 행성입니다. 만약 공기 중에 산소의 양이 조금이라도 적거나 더 많았다면, 중력이 지금보다 10%정도 강하거나 약했다면 인간 현상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전적으로 의존적이라는 뜻입니다. 개인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모든 걸 대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행하실 궁극적인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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