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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사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494 추천 수 0 2018.02.03 22: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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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40:1-1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56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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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대림절 둘째 주일, 2017년 12월8일

 

1.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9.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우리는 오늘 2천5백 년 전에 선포된 사 40:1-11절을 설교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말이 2천5백년이지 본문은 엄청나게 오래된 텍스트입니다.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군사 공격 앞에서 반년 정도 버티다가 결국 함락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노예로 잡혀가고, 난민이 되었습니다. 지도급 인사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갔고, 승전국 바벨론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들어왔습니다. 고대의 제국이 작은 나라를 군사력으로 압도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자기들에게 동화시키기 위해서 양쪽 백성들을 교차 이주시킨 것과 같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수많은 작은 나라들이 땅도 잃고 언어도 잃고 문화와 종교 전통도 다 잃습니다. 유대인들도 바벨론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런 처지에 떨어졌습니다. 그런 세월을 50년 가까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바벨론 포로 1세대들은 대부분 죽거나 노령에 접어들었습니다. 마흔 살에 포로로 잡혀왔다면 지금 구십 세가 되었을 겁니다. 부모를 따라서 아주 어릴 때 바벨론으로 온 이들이 지도급 인사들이 되었겠지요. 바벨론에서 태어난 2세들의 나이도 이미 40-50살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나은 이주민 3세들도 청년으로 자라서 바벨론에 적응하면서 살았을 겁니다. 50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세대들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어울려 지냈습니다. 하나님 신앙은 점점 약화되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신앙을 포기하는 이들이 다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왕 자신들의 운명이 이렇게 진행되었으니 바벨론에 잘 적응해서 사는 것이 최선입니다.

 

제2 이사야


바로 그때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한 선지자가 등장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 성경에 이사야라는 이름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1-39장을 기록한 8세기의 원래 이사야와 다른 익명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 시대인 6세기 사람으로서 사 40-55장의 내용을 선포했습니다. 이 문서를 나중에 이사야라는 표제가 붙은 1-39장에 포함시켜서 지금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 익명의 선지자를 제2 이사야로 부르는데, 우리는 편의상 그대로 이사야로 부르겠습니다. 이 사람은 바벨론에서 일종의 숙명주의에 떨어진 채 하나님 신앙을 시나브로 망각해가면서 바벨론 문명에 길들여지던 동족에게 정신 바짝 드는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씀이 사 40:1절에서 이렇게 시작됩니다. 대합창단이 함께 불러야 어울릴 정도로 아주 강력한 외침입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하라.’는 말은 우리가 어디서나 흔히 듣습니다. 공무원 시험에 자꾸 떨어지는 청년들이나 아이 키우는 일에 힘들어하는 어머니들도 다 위로가 필요합니다. 실연당한 사람이나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역시 따뜻한 위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서로 위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위로는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그것입니다. 이사야는 위로의 내용을 2절에서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1) 노역의 때가 끝났다. 2) 죄악이 용서받았다. 3) 벌을 배나 받았다. 공동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났다고, 그만하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야훼의 손에서 죄벌을 곱절이나 받았다고 외쳐라.’ 그들은 자신들의 바벨론 포로 상황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고난과 불행을 존재의 깊이에서 바라보는 겁니다. 즉 고난과 불행의 원인에 관해서 남 탓을 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징벌의 시간이 다 지났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억울한 30년 옥살이를 끝내고 출옥 통지서를 받는 거와 같은 경우입니다. 이것처럼 큰 위로는 없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위로하라.’는 명령에 이어서 몇 가지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더 받습니다. 3절은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려면 중간에 광야를 지나야만 합니다. 길이 좁고 울퉁불퉁합니다. 높은 산을 낮추고 낮은 골짜기는 높이고 길을 넓혀야합니다.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는 명령은 실제로 광야에 길을 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6절은 ‘외치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모든 육체는 풀이라는 사실을 외쳐야 합니다. 포로생활을 끝내는 이들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말씀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포로들만이 아니라 바벨론 귀족들도 모두 풀입니다. 별 볼일 없는 소시민이나 높은 신분이나 다 똑같이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이런 시야가 확보되어야만 포로생활을 실제로 끝낼 수 있습니다. 노예근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노예에서 해방되었지만 심리적으로 여전히 주인에게 복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주인이나 노예나 모두 똑같이 풀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물리적인 해방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해방까지도 가능합니다.


9절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이렇게 외치라고 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본 자는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행위는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하나님이 포로들을 해방시키고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라는 상황에 모든 이들이 지칠 대로 지쳐있던 그 순간에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보라고 외쳤습니다.

 

새로운 엑서더스- 출(出)바벨론


이사야의 외침은 52:11,12절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위로하라는 외침의 메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을 들으면서 유대 역사에서 일어났던 비슷한 사건이 떠오를 겁니다. 출애굽입니다. 출 3장에는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는 타지는 않으나 불이 붙은 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 현현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는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는 말씀을 듣습니다. 출애굽은 당시로서 불가능한 미션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일단 애굽이라는 제국이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소수 민족들이 독립하면 제국의 힘은 약화되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요즘의 중국도 소수민족의 자치권은 인정하지만 독립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민족이 티베트 사람들입니다. 러시아도 체첸의 독립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 나라들이 세계 곳곳에 많습니다.


출애굽이 불가능한 미션인 더 큰 이유는 히브리인 내부에 있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은 3,4백년 살았습니다. 거기에 삶의 모든 근거가 있습니다. 특히 애굽은 요셉 신화가 자리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1세대 이주민인 요셉은 애굽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총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애굽에서도 노력하면 그런 출세가 보장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곳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큰 불편도 없습니다. 출 1,2장에 따르면 모세가 태어나던 때에 애굽에서는 소수민족에 대한, 특히 히브리인들에게 대한 박해 정책이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불편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애굽을 떠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엑서더스는 어려움이 많은 곳에서 편한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편한 곳에서 불편한 곳으로 탈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인 갈대아 우르와 중간 기착지인 하란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도 상황은 같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는 곳을 향해서 단 한 가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만 붙들고 떠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엑서더스입니다.


불편한 곳에서 편안한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엑서더스를 감행하는 이유는 영혼의 자유를 찾기 위한 것입니다. 그 이외에는 아무 이유도 없습니다. 영혼의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결코 엑서더스를 감행할 수 없습니다. 친구 따라서 얼떨결에 나섰다가도 곧 낙심하고 맙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에 들어간 히브리 사람들은 먹을거리와 마실거리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외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그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세를 원망했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당장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주변 사람들을 선동하기도 하고, 내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의 자유보다도 배부르게 먹고 편안히 지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비롯해서 당시 광야 공동체를 끌어가던 지도자들은 영혼의 자유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사야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영혼의 자유를 위해서는 편안하고 익숙한 바벨론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유대 민중들을 설득하는 중입니다. 여기서 영혼의 자유는 하나님 신앙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이사야의 설득을 동족들이 받아들였을까요? 반응은 각각 달랐을 겁니다. 영혼의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따라나섰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뒤에 남았을 것입니다. 따라 나선 사람들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새롭게 굴러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벨론의 실존


오늘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으셨는지요.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애굽이나 바벨론에서 사는 게 아니니까요. 두 가지 점에서 이사야의 선포는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1) 현재 우리의 세상살이는 바벨론의 세상살이와 다를 게 없습니다.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가장 일상적인 것으로 말한다면, 여러분의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직장생활이나 자영업이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돈벌이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건 당연하니까 그것 자체를 문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체제와 구조들이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대기업에 취업했을 때의 기쁨은 잠시이고 그 조직 안에서 일어나는 경쟁은 우리의 영혼을 훼손시킵니다. 심지어 목회생활도 영혼의 자유를 풍요롭게 하는 게 아니라 축소시킵니다. 주변의 목사들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목사들도 보통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목회에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영혼 구원, 즉 영혼의 자유를 설교하는 목사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간다는 증거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교회현장에서 출애굽, 출바벨론을 감행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아서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2) 인간 실존 자체가 바벨론 상황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던져졌습니다. 피투적인 존재입니다. 숨을 쉬지 않을 수 없고, 뭔가를 먹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을 시간과 공간으로 경험하고, 오성으로 느낍니다. 다른 것으로는 경험하지 못합니다. 인간이기에 개의 청각이 없어서 못 듣는 소리가 많습니다. 새가 아니기에 비상의 능력도 없고, 물고기가 아니기에 유영의 능력도 없습니다. 코로 숨 쉬고 잠시 살다가 떠납니다. 거기에다가 죄의 실존이 겹쳐져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강요와 유혹과 갈망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그것은 곧 영혼의 자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더구나 현대 문명이 우리를 그런 것에 더 매달리게 합니다. 이런 인간 실존은 바벨론에서 살던 고대 유대인들의 실존과 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하고 떠나야 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마주할 자신이 없으니 우리의 영혼이 점점 궁핍해집니다. 그게 운명이려니 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우리가 모두 혁명가가 되거나 도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바벨론 포로라는 실존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또는 그런 질문 자체도 없이 그냥 지금 방식으로 가능한 편안하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억지로 영혼의 자유를 향해서 바벨론을 ‘떠나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 삶을 받아들이는 관점이 다르기에 모두 똑같은 방식의 삶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실제 삶의 문제는 여러분 각자가 알아서 선택해야합니다. 설교자로서 저는 성경이 말하는 궁극적인 위로가 무엇인지를 더 분명하게, 그리고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궁극적인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오늘 제3 독서인 막 1:1-8절에는 설교 본문인 사 40:3절이 인용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길을 곧게 하라.’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그의 길을 곧게 하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사람을 세례 요한으로 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가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이고, 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막 1:7,8절에 나오는 세례요한의 말을 들어봅시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마가복음 기자는 하나님이 광야를 지나서 오신다는 이사야의 신탁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수가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위로이고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모든 복음서 기자들과 신약의 편지들은 이 사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과 임재를 기리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미 오셨으며 세상 마지막 때 다시 오실 것이며, 지금 여기에 비밀한 방식으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가장 궁극적인 위로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가 견뎌야 할 노역의 때를 대신 감당하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징벌을 대신 받으셨으며, 그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에게서 완성된 부활 생명에 우리도 값없이 믿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가 아니라 우리 삶의 실질적인 능력입니다. 바벨론과 같은 세상으로부터 영혼의 자유를 위해서 과감히 떠날 수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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