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구입] 예수님을 따르는 삶 - 328쪽 12200원 https://goo.gl/3LP57r
<책 소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흔히 많은 것을 포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얼굴부터 고통스런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려면 그동안 추구하던 세상 재미와 오락, 취미생활과 퇴근 후 한잔씩 마시던 술도 못 마시고 만나던 친구들도 더 이상 만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뭔가 궁상맞고, 슬프고, 비장한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을 배 아파 하셔서 그걸 막으시는 분이 전~~혀 아니십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면 이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최고의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대적 마귀가 더 잘 압니다. 그리하여 대적 마귀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서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약간의 치루어야 될 대가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얻는 즐거움과 기쁨에 비하면 그것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오히려 마귀를 따라 살면서 치루어야 될 대가는 상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비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지난 일년 동안 그와 관련된 글을 썼습니다. 실제로 얼마나 예수님을 따라 살았는지 돌이켜 보면 부끄러움뿐입니다. 그러나 덕분에 늘 예수님을 의식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저의 신앙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어린 아이처럼 응석을 부리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글을 쓰는 지난 일년 동안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추천사>
최근 유명 시인의 감추어졌던 비밀이 폭로되면서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어두운 민낯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작가나 소설가, 시인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그분들의 사생활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생활이 중요한 이유는 작가의 정신세계가 글속에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삶이 아름다우면 글 속에서 큰 감동과 교훈을 얻게 되지만, 삶이 뒷받침 되지 못하면 문장이 아무리 뛰어나도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이런 면에서 최용우 전도사님은 분명 삶이 아름다운 분입니다.
많은 책들을 읽고, 많은 책들을 쓰셨지만, 언제나 말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겸손한 분이요, 아내가 앉을 자리에 방석이 없음을 보고 자신의 방석을 말없이 내어 주는 따뜻한 남편이요, 두 딸을 가진 딸 바보 아빠이기도 합니다.
혼자 있을 때에도 묵상과 기도를 쉬지 않는 영성가요, 교회에서는 먼저 인사하는 분이요, 식사 후에 식기를 놓을 때에 모든 빈 그릇을 씻기 편하게 분리하는 우리교회 숨은 일꾼입니다. 등산과 달리기를 좋아하고, 커피를 사랑하는 그의 글 속에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넉넉한 편안함과 반전의 웃음으로 해학이 담겨 있이 책은 예수님을 따르는 여섯 가지의 삶 시리즈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일상 속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리스도인의 우선순위, 시간관리, 물질관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헌신에 대해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쁜 마음으로 추천합니다. -주님의교회 한용일 목사
<꾸민순서>
1부.예수님을 따르는 삶
2부.하나님께 충성하는 삶
3부.기도하는 삶
4부.빛나는 삶
5부.행동하는 삶
6부.예배드리는 삶
<내용 맛보기>
1. 예수님을 따르는 삶
예수를 믿는 그리스인이 된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개혁교회의 신조인 웨스트민트 소요리 문답 제1문항은
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1)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요11:4, 고전10:31, 계4:11)
(2)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시73:25,26, 요17:22-24)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인들에게 헌법 제1장 제1조와 같은 매우 중요한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욕 먹이는 시대가 또 있었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더 이상 나의 생각이나 나의 삶의 방식이나 세상 정신을 따라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삶을 영위 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만이 내 삶의 원리와 척도이며,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라면 손해도 기꺼이 감수하며, 그렇게 행동하며 살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나에게 있는 재물이나, 나에게 있는 시간, 재능, 권세, 이 모든 것을 엄격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겠다는 고백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2.이중적인 삶
많은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면 참으로 괴이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분명히 기독교인인데 교회 밖에서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천사’인데 교회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천사 가면’을 벗어서 가방에 넣고 원래 마귀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떤 기독교인은 직장에서 자신의 기독교인 신분을 철저하게 숨깁니다. 마치 비밀 첩보원 같습니다. 비신자들이 기독교를 까면 오히려 더 많은 팩트(?)를 가지고 함께 기독교를 깝니다. 그냥 침묵하는 사람은 그나마 눈꼽만큼이라도 양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최소한 자신의 신분을 감추지는 않더라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삶의 방식,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 방식, 문제 앞에서 염려하고 근심하는 방식, 오락을 탐닉하고 세상 즐거움을 추구하는 방식, 일을 대하는 방식이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아서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독교인인 듯 아닌 듯 정체가 모호한 사람들이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초신자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참으로 지혜롭고 고상하고 높은 차원의 삶입니다. 이 땅에서 하늘의 영광을 맛보면서 사는 삶이며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삶 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이중적인 불신앙의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독교가 교회 안은 천국이고 교회 밖은 세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아는데, 교회 밖 세상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결국 이중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3.이분법적 사고
교회의 ‘이분법적 사고’란 교회와 세상, 현세와 내세, 신앙의 영역과 비신앙의 영역을 쫙! 나누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목회자와 평신도를 나누고, 목사를 ‘성직자’라 하여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신격화 합니다. 천주교가 그런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참다못한 개혁자들이 ‘만인제사장설’을 들고 일어나 종교개혁을 했건만 어느새 한국교회는 목회는 ‘성직(聖職)’이라며 종교개혁 이전의 천주교로 돌아갔습니다.
일제 침략기 한국 기독교는 국민의 0.5%도 안 되는 교인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가는 강력한 힘이 있었습니다. 일제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작업을 합니다. 마침 한국에 진출하려는 미국 급진주의 선교사들과 마음이 맞아 ‘평양대부흥운동’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일으키며 기독교를 교회 내부적으로 묶어버렸고 그 현상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면서 한국 기독교는 정부에 부역하는 친 보수 정권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떠들어대는 ‘평양대부흥운동은’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사회적 기능을 없애버리고 기독교가 회개나 하면서 교회 내부에 머무르게 하는 개인주의적 종교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일제의 세뇌를 받은 목회자들은 지금도 부도덕한 정부나, 퇴폐적인 사회 현상에 대해 기독교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가만 있으라’ 합니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이분법적 사고는 기독교의 사회성을 퇴화시켜 교인들이 세상 가운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들의 올바른 역할과 위치를 알지 못하고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그저 전도를 하거나, 선교에 필요한 물질을 얻는 피상적인 목적 이상의 어떤 것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4.예배보다 더 중요한 일
신약성경 어디를 읽어 봐도 오늘날 교회에서 드리는 것 같은 형식으로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기록은 매우 빈약합니다. (혹시 구약의 ‘제사’를 예배로 착각한다면 예배의 기초부터 다시 공부해야 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렸던 120명의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오셨던 사건을 예배의 시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로마가 기독교를 인정하기 전인 3세기 까지 사실상 예배는 아무 형식도 없는 ‘원시형태’의 모임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부터 비로소 어떤 형식의 예배(미사)가 시작되었는데,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순서들이 수없이 늘어났으며 다른 종교의 의식들까지 기독교 예배 안에 흘러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예배(미사)의 남발과 남용이 극에 달할 무렵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예배 예식은 극도로 간소화 되어 오늘날 교회에서 드리는 것 같은 형식을 띠기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기록은 성경의 각 페이지 구석구석에 깨알같이 박혀 있습니다.
그 의미는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를 한번 드려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교회에서 흔히 강조하는 ‘교회 중심’신앙의 영향인 듯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어찌 ‘교회 중심’으로만 살아야 합니까? ‘세상에서도 중심’으로 살아야 이 세상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죠.
5.구원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
거의 성자(聖者)와 같은 목사님이 한분 계십니다. 마을에 가게가 두 곳 있습니다. 한 곳은 조금 큰 슈퍼인데 주인이 교회 집사입니다. 다른 한 가게는 절에 열심히 다니는 할머니가 주인인 작은 구멍가게입니다. 목사님은 작은 구멍가게를 주로 이용합니다.
다 같이 먹고 살아야 하는데 큰 슈퍼에는 사람들이 많이 가지만 구멍가게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할머니가 목사님의 행동에 감격하여 교회에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님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실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장원을 하는 집사님이 어느 날 아침부터 중이 가게로 시주를 와서 화가 나 소금을 뿌려버렸다는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기에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고 잘 대접해서 보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또 중이 가게 문 밖에서 목탁을 두드리는데 내 말이 생각나서 그분을 안으로 모셔 차(茶)도 대접하고 겨울에는 산속의 절간이 춥지 않냐고 물어도 보고 잘 대접해서 보냈더니 머리를 하러 와서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어떤 아주머니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역시 다르다’고 하더랍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참으로 지혜롭고 고상하고 높은 차원의 삶입니다. 이 땅에서 하늘의 영광을 맛보면서 사는 삶이며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삶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들은 세상 사람들의 행동보다 훨씬 수준 높고 멋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 자기 부인, 심령의 가난함, 이웃 사랑 같은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삶이라면 우리는 진정으로 구원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6.두 가지 다른 해석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와 교회 밖에서 완전 다른 두 얼굴로 살아가는 이유는 교회가 ‘교회 중심’으로 사는 법만 가르치고, 교회 밖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가르치지 못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4)
1.그동안 교회에서는 그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뭐냐 하면 열심히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성경 읽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옛날에는 직장도 버리고 심지어 가정도 버리고 교회 안에서 밤낮 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이단 사교들의 특징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을 자기들 단체에 충성 봉사하는 것이라고 세뇌시킵니다.
2.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앞뒤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마태복음6:27-34 전체와 연결해서 보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재물 때문에 염려하는 일’과 연결됨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재물을 얻기 위해 직장에 다니며 얼마나 아니꼽고 힘든 일을 많이 당합니까?
이 세상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가 절대로 녹록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야’하면서 세상에 무릎 꿇고 굴복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분의 의로우심(義 righteousness)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목구멍’ 하나쯤은 얼마든지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7.온 세상의 하나님
창조주의(創造主義, Creationism)는 인간, 삶, 지구, 우주가 신의 개입에 의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일 수도 있고, 빅뱅이론처럼 이전에 있던 혼돈(카오스)에 질서를 부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근본주의 기독교는 창조를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세상은 완전한 상태로 창조되었으며 완성되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완성형 창조론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철학적, 역사적, 과학적 문제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창조를 진화론과 현대과학과 접목하여 ‘진화적 유신론’이라는 관점으로 보는 시각이 대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아담(인간)들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구속의 하나님, 나를 구원만 해 주시는 하나님, 나의 내면, 나의 개인적인 삶, 나의 가족에게만 관심을 갖는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세계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24:1).
하나님은 단지 지구에 있는 예수 믿는 몇 사람들만 상관하는 작은 분이 아니라, 전 세계와 우주와 삼라만상을 통치하십니다. 고로 기독교인들은 역사와 사회에 대해 무관심하면 안 됩니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면 안 되는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물질’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역사(시간)’와 ‘구조’ 까지도 창조하셨기 때문에 특히 선택받은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을 ‘보기에 참 좋게 창조’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8.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
기독론(基督論 Christology)은 기독교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것을 다루는 기독교 교의학의 한 부분입니다.
기독론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속죄 제물로 삼으셨다.’로 요약되며 요한복음3:16절이 핵심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그런데 잘 보면 하나님이 사랑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세상’입니다. 인간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세상을 미워합니까?
성(聖)과 속(俗)을 나누는 불교식 이원론의 개념이 기독교 안으로 들어와 ‘교회 안은 거룩하고 교회 밖 세상은 나쁘다’로 구별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몸, 세상이란 저주스럽고 더러운 것이어서 벗어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의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산 속으로 들어가는 종교이고, 기독교는 더러운 세상으로 오히려 걸어 나오는 종교입니다. 구원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 어디 먼 곳에 있는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 속으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이 세상 사람들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자연 환경을 보호하며, 더불어 구원을 이루어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9.하나님은 어느 쪽에
구원론(救援論 soteriology)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어떻게 인간에게 적용되는가?’를 논하는 기독론의 한 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구원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카톨릭은 -구원의 권한은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확실한 구원은 하느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다. 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믿고, 하느님과 자신을 단절시키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믿음과 실천적 행위 양면에서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기독교는 -구원의 여부가 이미 예정되어 있다.(장 칼뱅의 이중예정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바울의 ‘이신칭의(以信稱義)’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으며, 어떤 형태든 사람들의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카톨릭과 기독교의 구원론은 서로 다른 구원론이 아니라 성경을 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카톨릭은 ‘구원을 인간 중심으로 보아’ 이 땅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관점으로 보았고, 기독교는 ‘구원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아’ 사후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관점으로 본 것입니다.
그 결과로 카톨릭은 이 세상 현실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현실참여’가 매우 활발합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든 상관없고 오직 ‘예수 천당 불신 지옥’만 주구장창 외치고 있지요. 그 결과 기독교는 개인구원의 중요성에는 민감하지만, 공동체적, 사회적 구원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두 구원론을 절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도 구원을 받고 저 세상에서도 구원을 받을 것 같습니다.
10.세상으로 보냄 받는 교회
교회론은(敎會論 ecclesiolosy)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합니다.
우리는 교회라 하면 보통 건물을 생각하나 성경에는 건물을 교회라고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건물은 ‘교회당’ 또는 ‘예배당’입니다. 흔히 예배당을 ‘성전(聖殿)’이라고 하는데 이 말도 틀린 말입니다.
성전은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한 예언입니다. 즉, 예수님이 성전입니다. 아마도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해야 뭔가 구별된 것 같고 폼나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세상으로부터 불러낸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케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17:18)
From the World, In Jesus Christ, Into the World.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서,(전도)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다가,(양육) 세계 속으로 보내라!(파송)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교회 안에서 끼리끼리 모인 사람들만 잘 먹고 잘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역사 속으로, 세계 속으로, 현실 속으로 보내십니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agent 즉 하나님의 일을 하는 대행자로 묘사합니다. 교회는 자꾸 교회 밖으로 교인들을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전도를 해서 교회 안으로 모은 다음 그냥 교회 밖으로 못나가게 하니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교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니까 교회 밖에서 일하는 선교단체(paro-church)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가 할 일을 선교단체들이 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선교단체도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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