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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6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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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국교회를 말한다 ⑨소명 없이 목회는 없다
김남준 목사(열린교회·총신대 교수)
참된 목회 소명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 사랑에서 온다
목회의 중심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설교보다 아름다운 삶 살아야
“목사에게 믿음의 은사는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생활을 하게 한다. 제자직의 소명은 십자가의 소명이다. …… 이것은 특히 목사의 삶에서 분명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신의 소명을 점검해 보라.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따라 이미 ‘성령에 매인 바 된 되어’ 주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갈 수 있는가?(행 20:22) 당신은 모든 것을 선뜻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 즐겁게 환란을 당하고 그를 위해 바보가 될 수 있는가?(고전 4:9-13)”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실천신학 교수를 지낸 에드먼드 클라우니(E. Clowney)가 <목회의 소명>이라는 책에서 남긴 말이다. 지난 세기에 그가 했던 지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목회자는 믿음으로써 그리스도께 온전히 자신을 맡긴 헌신의 상태에서만 순수한 복음 사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경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회의 소명을 오해한다. 목회의 소명은 매우 특별해서 평신도들의 소명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다름이 아니라 분량의 문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의 문제다(롬 12:3). 사도 바울의 소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평신도들에게도 이런 소명이 있다. 사도 바울에게 영혼을 돌보는 사명이 주어졌다면 평신도들 중 그 누가 자신은 그 사명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에게는 평신도들은 물론 그의 부르심을 뒤잇는 목회자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분량의 사명이 주어졌다.
목회의 소명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위탁하고, 복음을 전해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과 성경 진리를 가르쳐 그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도록 목양하는 일이 아닌 다른 일에 종사하면 화가 임할 것 같은 신적 강제력에 사로잡히는 것이다(고전 9:16). 그런 점에서 목회의 소명은 본질적으로 평신도들의 소명과 다르지 않지만, 특별하다.
목회자의 소명은 자신이 그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에 대한 신학적 경험을 통해서 현실로 다가온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건이다. 그리고 부활은 하나님이 죽은 예수를 다시 살리신 사건이다. 그런데 이 두 사건 사이에는 신학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명제가 있다. 하나님이 저주하신 분이라면 다시 살리실 리가 없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만큼 의로운 분이라면 저주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신 21:23, 롬 1:4). 이 두 개의 모순된 명제 사이를 메우는 것이 ‘대속’(代贖)의 교리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예수의 저주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저주였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신학적 사실을 깨달으면서 지성에 벼락을 맞는 것 같은 경험을 하였고,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목회자로 부름 받았다(행 9:5, 15).
목회의 소명은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에 대한 현재적 경험을 통하여 대속의 신학적 의미를 깊이 경험함으로써 주어진다.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체험이 있다. 이러한 체험이 없이는 그 누구도 회심한 그리스도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회자의 경우 그 체험의 분량이 평신도들의 그것과는 달라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한 구원 사건을 종자씨로 삼아 인간과 세계와 하나님, 그리고 우주와 역사를 보는 사상이 열리는 신학적 개안(開眼)을 경험해야 한다. 많은 신학생들이 내게 묻는다. “참으로 좋은 목회자가 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 때 내가 들려주는 대답은 이것이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십시오. 둘째로 죽도록 공부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 셋째로 열렬하게 기도하십시오.”
목회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오늘날 ‘목회’(牧會)라는 말처럼 모호한 말도 없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목회’라는 말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고 무분별하게 사용됨으로써 목회 사역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본질적으로 목회는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에 의한,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다. 목회는 그리스도가 시키셨고, 그리스도의 일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이며 탁월한 청교도인 월리엄 퍼킨스(W. Perkins)는 그의 책 <설교의 기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대언하는 것이다. 그의 대언을 듣는 사람들은 설교를 통해서 은혜로써 부름을 받고 은혜 안에서 보호하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께로 오도록 이끄셨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도록 하는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분을 대리하여 백성들에게 간청하는 것이다.”
위대한 청교도가 제시하는 목회자의 소명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명확한가.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가 맡기신 일이며, 그리스도의 일이며,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목회의 소명이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신학적 체험에 매이는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고(故) 방지일 목사님께서 어느 선교사집회에서 백세의 노구를 이끌고 오셔서 남긴 한 마디의 설교는 우리의 마음을 찌른다. “오늘날 설교에는 예수님의 피가 없어요. 목사들의 설교에서 예수님의 피 냄새가 안 나요.”
이것은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지적인가. 목회자의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냄새가 사라졌다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능력 있고 감동적으로 선포되고, 그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젊은이들이 많은 교회는 미래 조국교회를 위한 파릇파릇한 모판이다. 성도들이 조국교회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 본받으며 가는 소명의 길
오늘날 널리 유행하는 말 중에 ‘멘토링’(mentoring)이라는 말이 있다. ‘스승’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멘토’(mentor)로부터 ‘멘티’(mentee) 곧 제자가 폭넓은 가르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목회자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그리스도로 묶는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바울의 가르침을 받았던 고린도 교회의 바울과 성도들과의 관계는 ‘본받음의 관계’였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고, 성도들은 바울의 인격과 삶에 의해 체화(體化)되어 나타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초대교회의 교부이자 오리겐의 스승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T. F. Clemens)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참된 삶의 모본을 보이시고 당신 안에 있는 자들을 훈련하신다. 그리스도는 명령을 내리시고 그것들을 몸소 구체적으로 실천하시는데, 그 실천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명령을 다른 사람들이 실천하도록 돕게 하기 위함이다.”
목회의 소명은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도록 명령하고 그분을 따라 살도록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목회의 소명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이 아직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일을 뒤잇는 것이다. 그래서 충성스럽고 유능한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일수록 목회자는 잊혀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기려지기 마련이다. 18세기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G. Whitefield)도 말한다. “사람들이 나 휫필드의 이름을 잊게 하라. 오직 그가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만을 기억하게 하라.”
목회는 들리는 말씀과 보이는 말씀의 섬김이다. 들리는 말씀은 성경과 신학으로써, 보이는 말씀은 인격과 삶으로써 성도들에게 유익을 준다. 목회의 길이 어려운 것은 단지 설교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목회자가 끊임없이 자신의 삶과 인격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번 본 영화를 수십 번 반복해서 보면 싫증을 느끼지 않을 관객이 어디 있겠는가? 성도들은 목회자의 인격과 삶 안에서 끊임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여기에서 목회자의 끊임없는 ‘자기 죽음’이 요구된다(빌 1:21). 성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때문에 그러하다.
목회자는 끊임없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지식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벧전 3:18). 그래서 예수와 다른 모습으로 살게 하는 옛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 안에서 죽어가고, 예수와 같은 모습으로 살게 하는 새 사람은 부활의 경험 안에서 현재적으로 살아나야 한다. 이처럼 목회자는 날마다 예수와 함께 죽는 자기 깨어진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목회의 길을 걸었던 바울도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는가?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하)
설교보다 아름다운 삶
기독교 역사에서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만큼 위대한 지성의 업적을 남긴 인물도 없을 것이다. 신약성경의 절반 가량을 저술한 바울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그만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이 없다. 그는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 서양 사상의 바다로 나가는 수문의 역할을 하였다. 칼라마의 주교였던 포시디우스(Possidius of Calama)는 목회자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얻은 사람은 그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던 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 가운데 보였던 그의 삶의 특징을 어느 정도라도 접해 본 사람들이 그 유익을 누렸을 것입니다.”
참된 목회의 소명의 기원은 목회의 성공이나 비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양떼들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온다. 그는 십자가 아래서 죽고 다시 태어남으로써 목회의 길을 간다. 고백해 본다. “하나님, 제가 목회자입니다.” 언젠가 이 고단한 목회 사역을 마치고 눈을 감은 후에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묘비에 새겨진 글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소명을 따라 그리스도를 선포했던 설교자, 그러나 설교보다 삶이 아름답던 사람 여기 잠들다.”
김남준 목사 ekd@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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