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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6:17-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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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2017.9.17 희망의교회 http://hopech.kr |
복 있는 사람(1)
눅6:17-26
얼마 전 새 정부의 각료와 참모진의 재산이 공개되었습니다. 재산이 가장 많은 사람이 93억, 그 다음이 50억, 전체 평균이 20억 정도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머리도 좋고, 돈도 많고, 이미 출세한 사람들인데 더 높고 영향력 있는 고위직에 임명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인물도 좋고, 머리도 좋고, 부모도 잘 만나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런 사람들은 참 복도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보시기에도 이런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화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살펴봅시다.
평지 수훈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열 두 제자를 택하신 후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산 아래에는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온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17절)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린 자들과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누가복음 6:20-49 말씀은 마태복음 5-7장의 말씀과 비슷합니다. 마태복음 5-7장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가르치신 말씀이기 때문에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6:20-49은 산에서 내려와 가르치신 말씀이기 때문에 ‘평지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팔복이 나오는데, 누가복음에는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화가 나옵니다. 이 차이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이런 내용의 말씀을 자주 가르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는 그런 주제의 말씀을 정리하여 한 군데에 모아 기록했습니다. 반면에 누가는 여러 곳에서 반복하여 기록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
마태는 복 있는 사람을 여덟 가지로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누가는 ‘가난 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인자로 말미암아 미움을 받는 자’ 네 가지를 기록했습니다. 팔복에 대해서 하나씩 자세히 공부하면 좋지만, 누가가 기록한 네 가지만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20절) 이 말씀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복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기록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심령의 가난은 하나님의 엄청난 영광과 거룩하심을 보면서, 그 앞에서 나의 죄와 비천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나는 오직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절실히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마음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조국을 사랑했던 젊은 이사야는 성전에 올라갔다가 놀랍게도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가장 존귀한 천사들이 하나님을 옹위하며 찬양했습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와 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사6:3-4)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일입니까?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을 뵙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6:5)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고 나자, 이사야는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것, 즉 가난한 마음입니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더니 엄청난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 놀라운 이적을 경험한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 앞에서 자신은 심판과 진노를 당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 이처럼 자신이 소망 없는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인정하는 마음이 바로 심령의 가난입니다.
하나님만 의존하는 마음
가난한 마음은 자신의 죄와 무능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보며 사죄의 은총을 감사하며 사는 마음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열망,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한순간도 살 수 없겠다는 절박감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42:1-2)
가난한 마음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런 소망이 없는 죄인임을 철저히 깨달아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만심과 자기의존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의 존전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의식하는 것이며,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깨닫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소망 없는 죄인임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은혜와 긍휼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이렇게 심령이 가난해지면 주님의 은혜를 힘입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런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20하)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만 바라보며 은혜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천국의 모든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주린 자
예수님께서는 주린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21상) 마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모든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맘껏 힘입고자 갈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죄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보좌 앞에서 밀려난 것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합니다. 그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며, 죄를 지으려는 욕망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더 나아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곧 성화에 대한 강한 갈망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주님 닮기를 간절히 사모하십니까? 거듭난 사람, 성령의 역사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예수님 닮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예를 들어봅시다. 사도 바울은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거의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율법과 헬라 철학, 그리고 언어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스펙이 훌륭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회심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
바울의 고백에서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왜 바울은 모든 것, 과거의 훌륭한 스펙들을 다 해로 여겼을까요? 그런 것들을 가지고는 구원 받을 수 없으며, 죄를 이길 수도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가질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들은 바울에게 참된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만을 소원하고 추구했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28) 이들이 얼마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주리고 목마른 것은 육체적으로 주리고 목마른 것과 같아서 그 욕구가 채워지기까지는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배가 고픈 사람은 음식을 먹기 전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목이 마른 사람도 물을 마시기 전에는 결코 갈증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힘입기 전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주리거나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으며,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이 없고, 영적인 것들에 대한 목마름이 없는 사람은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의 감화에 대해서도 전혀 무감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잃어버린다면, 우리의 마음은 죄 때문에 강퍅해지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의 좋은 것을 다 가졌다 해도, 결코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곧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큰 욕망은 사랑하는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인데, 그것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 채울 수 없는 갈망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못하면 나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이러한 갈급함이 있습니까? “주의 날개 아래 거하는 것 주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 나의 가장 큰 소망 나의 큰 은혜 주와 함께 동행하는 일”
배부름
주님께서는 이렇게 주린 자는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21상) 하나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만족한 은혜를 주십니다. 시편 기자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채워주시는 축복에 대해서 자주 말했습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9).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34:10) 시편 23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이처럼 배부르게 됩니다.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이 세상과 하늘나라에서 복을 받습니다. 밤이 새도록 주의 사자와 씨름한 야곱은 에서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늘 주의 계명과 율례를 사모하며 지키기를 힘썼던 다윗은 가장 훌륭한 왕이 되었으며, 넘치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일천 번제를 드렸던 솔로몬은 그가 원했던 지혜뿐만 아니라 모든 축복을 받았습니다. 평생 성전에서 주야로 기도하던 여선지자 안나는 마침내 아기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결사적으로 주님을 불렀던 소경 바디매오는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수도원에서 의를 갈망하던 루터는 마침내 구원의 확신에 이르렀고, 위대한 종교개혁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성도는 만족한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은혜 받는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진정 의에 주리고 목마릅니까? 그렇다면 사모하는 마음으로 모든 예배에 나오십시오. 금요 심야기도회에도 힘써 참석하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새벽에도 열심히 나와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말씀 묵상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심으로 당신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인물도 좋고 머리도 좋고 돈도 많고 출세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일까요? 역사상 최고의 영웅은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이라고 합니다. 그는 유럽까지 정복하여 광활한 제국을 세웠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칭기즈칸에게 견줄만한 인물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리스의 알렉산더나 로마의 카이사르 같은 사람들도 불세출의 영웅으로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돈이 가장 많다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일까요?
이 사람들은 잘 해야 70세 정도를 살았습니다. 알렉산더는 32세에 요절했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짧은 생애도 수많은 전쟁과 갈등과 고생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죽은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중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섬기지도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권력과 재물과 명예와 장수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을 복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만 온전히 바라보며 의지하는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나님을 갈망하며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뵙게 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풍성하게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며 동행한다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그가 과거에 소중히 여기고 자랑하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외에는 그 무엇도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주시는 은혜를 맘껏 힘입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난 후에는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 그토록 사모하던 주님을 뵙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오직 악하고 추한 죄인일 뿐임을 분명히 깨닫고 있습니까?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 소망도 없음을 절감하고, 하나님을 갈망하며 주시는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은혜 받을 기회를 사모하며 놓치지 않고 있습니까?
우는 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 있는 자에 대해서 본문을 계속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21하) 마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이것은 영적인 애통인데,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박한 것을 느낀 나머지 가슴을 치며 통회자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롬7:19,24에서 바울의 애통해 하는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선을 행하고 싶어도 행할 능력이 없으며, 실제로 행하는 것은 죄뿐인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내 안에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성이 자리 잡고서 그것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고 있음을 실감할 때 절망하며 애통하게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같은 체험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왜 나는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가? 순종하기는커녕 왜 불순종하며 늘 죄를 짓는가? 나는 왜 그렇게 화를 잘 내는가? 왜 성질이 이렇게 못되었을까? 왜 나는 이렇게 참지를 못할까? 왜 나는 이렇게 불친절할까? 나는 왜 늘 악하고 추한 생각을 품고 있을까? 왜 나는 항상 교만할까? 나는 왜 번번이 넘어질까? … 이러한 것들과의 치열한 싸움이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고, 그러한 죄들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속상하고 안타까워 그것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함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 찔리고 괴롭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죄를 덮어 버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합리화시키고 변명함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속이는 어리석은 자요, 애통할 줄을 모르는 자이기 때문에 결코 참된 위로와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충성된 부하였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있던 우리야를 불러 특별 휴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충성된 우리야는 자기 집, 자기 아내에게 가서 휴가를 즐기지 않았습니다. 죄를 은폐하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다윗은 요압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렇게 간음과 살인죄를 범했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애통하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1-4)
시6:6에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얼마나 울었으면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운다고 했겠습니까? 이 시에서 우리는 다윗이 얼마나 자신의 범죄를 슬퍼하며 괴로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눈물로, 이 애통으로 다윗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렇게 찬송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다윗은 자기가 범한 추악하고 뻔뻔한 죄를 애통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시고 큰 복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죄 때문에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핍박을 받는 자
예수님께서는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22-23절)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칭찬과 갈채를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오히려 미움과 박해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핍박을 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믿어도 그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고난이 결코 저주나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23절)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인자(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구절에 주의해야 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신 것과 같은 삶을 살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핍박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해 핍박받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일 때문에 핍박받는 것은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고난이 아니며,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고난당한 성도들의 예를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벨은 의로운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수모와 수치와 고난과 슬픔을 당했습니다.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무릅썼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것은 의에 대한 핍박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핍박은 불가피하게 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며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최종적인 증거를 얻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 고난 뒤에는 반드시 승리와 영광이 있습니다. 천국에서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고난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천국에서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이 핍박을 기쁘게 감당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화 있는 사람
우리는 앞에서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볼 때 당신은 복 있는 사람입니까? 당신은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죄에 대해 애통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 믿음으로 살기 위해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까? 그것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당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화 있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가 화 있는 자들입니다. 화 있는 자들은 복 있는 자들의 반대입니다. 이들은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무엇이나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며, 오직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돈과 권력과 자기 자신만을 의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세상에서 모든 위로와 만족과 칭찬을 받았기 때문이며,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받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심판뿐입니다.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24절) 가난하다고 해서 누구나 심령이 가난한 것은 아니며, 반대로 부자라고 해서 반드시 교만하여 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화 있다고 책망과 경고를 받고 있는 ‘부요한 자’는 세상 재물과 권력으로 만족하며 교만해진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죄를 회개하지도 않으며,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하여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지 않으며,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맘껏 즐기며 사는 것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부요한 자들은 세상에서 이미 위로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내세의 영원한 영광과 축복을 버리고 현세의 육신적인 만족을 선택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목적과 만족을 두기 때문에 재물을 더 얻기 위해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착취하는 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천국에 서 더 이상 받을 것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땅의 것으로 만족하며, 오직 그것들을 얻는 데만 몰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배부른 자와 웃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25절) 배부른 자는 세상 것들을 좋아하며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재물을 방탕하게 사용하며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일시적인 것이며,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참된 만족이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세상 것들만 추구하며 그것으로 만족을 삼은 자들은 영원한 내세에서 아무것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웃는 자’도 ‘배부른 자’와 비슷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세상 쾌락과 만족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 쾌락을 추구합니까? 그들은 그렇게 맘껏 세상을 즐기며 사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서 잠시 죄악된 쾌락을 누리며 즐거워하다가 무서운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며 울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화 있는 자들입니다.
칭찬을 받는 자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는 자가 복 있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26절)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이 다 화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위해 핍박 받는 것과 반대되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위해,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핍박과 욕을 당하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주님께서 큰 상으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기 위해 타협하거나 믿음을 포기한다면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며,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사야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선지자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나무 톱으로 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다가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기까지 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인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순교한 선지자들보다 권력자들에게 아첨한 거짓 선지자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들은 왕과 고관들에게 아첨했으며, 백성들에게도 듣기 좋은 말만 하면서 자기들의 이익을 챙겼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보았다고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13:16)
지금도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위로와 축복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그런 메시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죄를 책망하고 경고하는 말씀도 많습니다. 심판과 지옥에 관한 말씀도 자주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메시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바쁘고 피곤해도 말씀묵상과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한다고 다그치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메시지를 전하기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목사는 성도들의 목사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종입니다. 성도들이 어떤 메시지를 원하는가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무엇을 전하라고 하시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설교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좋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설교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을 잘못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 강단에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메시지만 선포되어야 합니다. 부담스럽고 찔리는 말씀을 기꺼이 듣고 순종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말씀묵상과 기도에 힘쓰라는 권면도 기쁘게 듣고 힘써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 시민의 새로운 윤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으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고, 죄 때문에 애통해하며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만 받으려 하는 자는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세상적인 기준과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며 추구하는 것을 따라가면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에 집착하고, 그것들을 추구하며,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은혜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보물을 쌓을 줄 모르며, 천국 소망을 바라보면서 내세를 준비할 줄 모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얻은 모든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잠시 누렸던 쾌락과 만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는 소망 없는 죄인일 뿐임을 깊이 깨닫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아무 소망도 없으며, 한순간도 살 수 없다는 갈급한 마음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를 힘쓰십시오. 내 안에 있는 죄와 매일 넘어지며 범하는 죄 때문에 애통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손해와 핍박과 희생을 당한다 해도 생명을 바쳐 믿음을 지키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며, 영원한 본향 천국에 들어가 큰 상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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