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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를 기다리는 세상에서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315 추천 수 0 2018.08.22 12:4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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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1-17 
설교자 : 이익환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텔아비브 욥바교회 설교 2016년 11월 12일 이익환 목사

사복음서 강해 1 메시아를 기다리는 세상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마 1:1,17)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트럼프가 당선됐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n Great Again!)는 구호에 미국 대중들이 반응했다. 그러나 그의 당선은 이민자와 외국인, 소수인종들과 미국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격과 불안을 가져다 주었다. 평소 그가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제시한 방법들이 너무도 무례하고 이기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당선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그룹은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들이었다. 81%가 그를 지지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독이 든 사과보다는 그래도 썩은 사과가 낫다는 이유였다. 민주당의 통치 아래에서 반기독교적인 정책으로 위협받았던 그들로서는 당연한 선택일 수 있다. 물론 트럼프가 미국 사회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를 회복하고 기독교를 보호하겠다는 말은 반갑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말했던 그가 과연 어느 정도 기독교의 가치를 구현해낼지 의구심이 든다. 미국의 로버트 커닝햄 목사는 미국 기독교인들이 트럼프를 지지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기독교가 믿는 바대로 살기를 포기하고 바라는 바대로 살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들이 바라는 바를 구현해 줄 메시아로 트럼프를 선택한 것이다.


정치적 메시아는 역사상 사라지지 않고 늘 존재해왔다. 대중들이 바라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현실이 불안하고 어려울 수록 메시아적인 인물이 나타나 자신들의 현실을 개선해주길 바란다. 1세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도 메시아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었다. 성전세와 헤롯에게 바치는 국가세, 그리고 로마에 내는 세금까지 수입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헬라문화로부터 하나님 신앙을 회복할 사람, 메시아가 나타나길 간절히 원했다. 그러한 열망이 가득할 때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 오셨다.



세리 마태는 특히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오늘부터 사복음서 강해를 시작한다. 사복음서에서 소개되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바라는 메시아의 모습과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메시아와의 모습을 분별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1절을 보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유대인들에게 ‘계보’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톨레돗(계보)’이라는 말이다. 창 2:4,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기서 내력이란 말이 ‘톨레돗(?????????)’이다.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시작에 관한 소개다. 창5:1절에도 계보가 나온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사람이 어떻게 창조되어 그 세대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소개다. 계보란 말이 이렇게 구약에서 세상 창조와 인간 창조를 소개할 때 사용되었다. 그래서 마태가 계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중요한 시작에 대한 기대감을 주는 단어였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이신 예수의 계보에 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예수아 하마시아’다. 예수님의 원래 이름은 ‘예수아’다.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이름에는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담겨 있다. ‘하마시아’는 ‘the anointed one’,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듯이다. 구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위임을 받은 사람이다. 구약의 왕과 제사장이 그 직분에 세워질 때 기름 부음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도 왕과 제사장적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서 언젠가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된 메시아였다.


먼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자.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다. 이것은 혈통적 후손인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따라서 아브라함의 언약은 아브라함 개인이나 유대인에게만 한정되는 축복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이미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에서 열국의 아비라는 뜻으로 바뀐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가 되어 그와 그의 후손을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받기 원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것은 그가 유대 민족만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기 위해 오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이라는 편협한 민족주의에 빠져 아브라함 언약의 의미를 축소했다. 세례 요한은 당시 그렇게 편협한 배타주의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도전했다. 마 3:7-9,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러한 도전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셨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있던 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8:10-12,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원래 유대 민족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 사람들이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에 앉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약속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아브라함이 받았던 모든 언약적 축복을 이루실 메시아로 오셨음을 의미한다. 즉 모든 민족적 이기주의와 배타주의를 뛰어넘어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주시는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자. 마태는 예수님의 계보를 소개할 때 다윗을 기준으로 내세웠다. 마 1: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이것은 마태가 간추린 계보다. 왜 열 네대로 구분했을까? 사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열 네대를 훨씬 넘어선다. 애굽에서 종살이 했던 430년과 사사시대 340년이 빠져 있다. 또한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는 다섯 왕이 생략되어 있다. 족보가 아니라 계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마태는 여기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강조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계보를 뽑은 것이다.


히브리어로 다윗은 다비드(???)다. 각각 4, 6, 4라는 숫자값이 있는데 이것을 더하면 14이다. 세리였던 마태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음을 강조하기 위해 다윗의 숫자값인 열네 대를 기준으로 유대인들이 알기 쉽게 예수님의 계보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 왕조와 메시아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약속하셨다. 삼하 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선지자 예레미야도 장차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게 됨을 예언했다. 렘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이러한 약속의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다윗왕 같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믿음이 있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 시대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했다. 사 35:5-6,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이 세상의 모든 신체적인 불구까지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메시아가 행하는 표적을 보고서 알아보는 것이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통해서 그러한 기적을 행하셨다. 두 맹인은 예수님을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 9:27, 개정)라고 소리쳤다. 또한 예수님이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자 무리가 다 놀라며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마 12:23)고 말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점점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결국 정치적인 힘을 가진 세상 왕으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다. 처음에 기적을 보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바라는대로 움직이지 않으셨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메시아를 거절하게 된다. 그들은 투쟁가인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했고 대신 무력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단지 실패한 메시아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정하신 위대한 승리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골 2:13-15,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인류의 죄가 사해진 것이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정죄하는 문서가 소멸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세상 통치자와 권세들이 무력해진 것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승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죄와 불의, 차별을 무너뜨리는 능력이 된 것이다. 진정한 자유과 해방, 승리가 세상의 권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어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요한은 계시록을 통해 예수님의 증언을 전한다.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던 메시아는 이제 다시 오신다. 다시 오실 때는 일개 나라의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오신다. 오셔서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하시며 세상을 공의로 통치하실 것이다. 그 날을 우리는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많은 공약을 하며 메시아로 자처했던 세상 지도자들의 일어섬과 추락을 보고 있다. 그들이 가진 힘으로 일어섰다면 그들이 사용한 힘만큼 그들은 무너질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 영원하다. 오직 하나님의 통치가 의로우시다. 이 땅을 사는 우리 역시 예수님을 우리가 바라는 메시아로 기대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불편하고 힘든 상황을 해결해주러 오신 해결사가 아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세력이나 환경을 힘으로 제압해서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다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떠한 메시아로 오셨는지 복음서의 말씀을 통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의 바램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이 아니라, 예수님의 바램을 붙들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제자가 될 것이다.


한 개인의 삶, 그 위대함은 개인의 이기주의에 기초할 수 없다. 그것은 기업이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 사회에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그 과정이 편법과 불의, 차별과 증오에 기초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위대한 일일 수 없다. 한 개인이나 국가의 위대한 재건은 결코 힘을 기초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그것이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와 내 국가만 살면 된다는 식은 더더욱 곤란하다.


사단은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 네가 메시아임을 입증하라고 유혹한다. 성전에서 뛰어내려 메시아임을 만방에 알리라고 부추긴다. 천하 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절하면 그것이 네 것이 될 것이라고 유혹한다. 힘을 가진 메시아가 되라는 것이다. 세상은 그런 힘을 가진 메시아를 계속해서 원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너무도 힘없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 예수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진행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예수님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갈 3:29절은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 믿음의 계보는 하나님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가는 믿음의 성도들을 통해 계속된다. 나와 여러분이 그 믿음의 계보에 이어지는 사람들이 되길 예수아 하마시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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