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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1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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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십대 때 성당에 다니면서 수도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집안이 모두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신부가 허락하지 않아 되지 못했다. 그래서 평생에 수도회에 대하여 관심을 많았다. 그래서 강문호 목사가 봉쇄수도원을 시작한다는 기사가 실려서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댓글까지 모두 흥미 있게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강 목사의 봉쇄수도원 계획에 존중과 성원을 보낸다. 강 목사는 개신교 목사로서는 좀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도원에 대하여 오래 동안 연구와 준비를 해왔다.
▲ 토마스 머튼 |
수도자는 길을 찾는 사람들이다. 20 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적 스승인 토마스 머튼은 젊어서부터 길을 찾다가 수도자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불교적 수행 방법을 배워서 가톨릭과 불교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몸은 까다롭고 독선적이고 답답한 가톨릭 제도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도 가장 폐쇄적인 트라피스트 수도원 안에 있으면서도 생각은 무한히 자유로웠다.
물론 1948년도, 내가 태어나던 해 출판한 자전적 일기인 ‘칠층산’을 보면 토마스 머튼도 시대의 아들이라서 무식이 하늘을 찌르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있지만 그가 추구하는 구도의 길은 무서울 정도이다. 하여튼 머튼은 철저히 갇힌 세계에서 갇히지 않은 정신을 보여 준다.
머튼은 껍질을 깨고 본질을 밝혀 '거짓 영성’이라는 어떤 것인가를 깨우치게 만들었던 20 세기 영성의 대가였다. 머튼에 의하면 명상과 기도를 통하여 점잖게 내적 평안이나 갈등 해결을 추구하는 것은 초보적 수준이다. 신앙으로 평온을 찾는 것은 고작해야 영적 게으름에 빠지는 것이다. 신앙은 평화의 원리이기 이전에 갈등과 정화의 원리이다.
진정한 기도는 자기만 알거나 느끼는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사물과 세상을 명료하게 보는 것이다. 머튼은 ‘내적인 흥미와 자신의 영적 회복에만 집착’ 하는 것을 ‘영적인 정욕’이라고 부른다. 심지어는 ‘자신들이야말로 거룩한 사람’이라고 믿지만 ‘가장 비열하고 사악한 사람들’이라고 비판한다.
거짓된 수도는 수도자를 영적 누에고치 속에 고립 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 공통의 고뇌와 갈등으로부터 물러서게 할 뿐 아니라 의식을 둔화 시켜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진정한 영성은 세상의 고통에 대한 민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에 앉아 있으면서도 세계를 향하여 월남전의 참상을 고발 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많이 실행되는 ‘사랑, 은혜, 평화’ 등등의 표현이 상투적으로 사용되는 ‘경배와 찬양’ 스타일은 마취, 자기도취의 모습으로 보일 때가 있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경배와 찬양의 가사들은 사람들을 무뇌아적인 기독교인으로 만들기에 참으로 딱 알맞은 가사들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대부분의 상황에는 그런 단어가 해당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고 설령 나는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잠시 이웃의 고통을 잊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은 현실을 망각하거나 호도하는 ‘개념 없음’의 상징일 뿐이다. 수도원은 영과 육의 전쟁터이지 이런 종류의 감상적인 신앙으로 유지될 수 없다. .
나는 살면서 이루지 못한 목표 때문에 수도자 혹은 수도자였던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내가 직접 수도원생활을 해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을 통하여 간접 경험한 수도 생활은 매우 힘들다. 한 마디로 신앙은 둘째이고 수도원 생활이 체질에 맞아야 한다. 수도 생활은 멋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야만 한다.
나는 종교적으로 거룩하게 치장이 된 건물이나 물건을 보면 경건한 마음이 들기 보다는 장난감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삶의 실재에서 영성을 찾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 네바다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라스베가스로 가는 길에 있는 사막에서 한 시간 정도 머물러 기도를 했다. 모래와 바람뿐인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 절대적 존재와 나만의 대화에 충실할 수 있었다. 사막의 바람 소리는 어떤 장엄한 파이프 올간 소리 보다 거룩했고 모래는 어떤 찬송 보다 감동적 이었다. 뽕짝이나 찬송가나 감정을 움직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막의 모래는 감정이 아니라 혼을 깨운다. 그런 까닭에 교회사에서도 사막의 교부들의 영성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21 세기 한국 교회에 과연 봉쇄수도원이 필요한 것일까? 마땅히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강 목사가 추진하는 봉쇄 수도원의 앞으로의 행로에서 우리는 그 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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