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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왕상2: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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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76824 |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성령강림 후 13주, 2018년 8월19일
2:10다윗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워 다윗 성에 장사되니 11.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 동안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다스렸더라 12.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앉으니 그의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
3: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4.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6.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7.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11.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12.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14.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허락해 달라.’고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솔로몬의 지혜에 연관된 유명한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지는 왕상 3:16-28절에 나옵니다. 두 여자 사이에 송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여자들의 직업은 유곽에서 몸을 파는 일이었습니다. 며칠 간격을 두고 이 여자들은 각각 아들을 낳았습니다. 한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바꿔치기했다느니 아니니 하는 논란이 벌어진 겁니다. 지금처럼 유전자 감식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재판장인 솔로몬은 살아있는 아이를 반으로 잘라서 각각 나눠주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한 여자는 아이를 죽이지 말고 다른 여자에게 주라고 했고, 다른 여자는 임금의 명령대로 반으로 잘라 누구의 것도 되지 않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의 판결이 내려집니다. 아이를 양보한 여자가 진짜 엄마입니다.
문제적 인간 솔로몬
솔로몬의 지혜에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인 왕상 3:3-14절에 나옵니다. 당시는 솔로몬의 집권 초기라 솔로몬의 권력 기반이 약했습니다. 솔로몬의 나이가 어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집권 과정에도 하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다윗에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 압살롬은 오래 전에 반역을 일으켰다가 현장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왕위 계승의 다음 차례는 아도니야입니다. 아도니야에 대해서 왕상 1:6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아도니야는 다윗이 늙자 왕위를 물려받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여러 동생 왕자들과 장군들과 선지자와 제사장과 귀족 등, 여러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여기에 제외된 이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나단과 동생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와 배다른 형제로서 마지막까지 다윗의 사랑을 잃지 않았던 밧세바라는 여자의 아들입니다. 나단은 밧세바를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대처방법을 알립니다. 일종의 궁중 권력 투쟁이 시작된 겁니다. 밧세바와 나단의 승리로 끝납니다. 솔로몬이 다윗을 이어서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는 어떤 사건을 꼬투리삼아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그 뒤로 차례대로 아도니아 쪽에 줄을 댔던 사람들을 처단합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기는 했으나 종교적 정치적 정당성은 허약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우선 신적인 권위가 담보되어야합니다. 솔로몬의 왕위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은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갔습니다. 기브온에는 큰 산당이 있었습니다. 산당은 원래 가나안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우상을 제사하던 곳입니다. 그런 산당이 가나안의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당시는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기 전이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존의 산당을 이용했습니다. 솔로몬은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소나 양을 일천 마리 바쳤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솔로몬의 마음이 지극 정성이었다는 것을 과장해서 그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솔로몬은 기브온에서 하룻밤 지내다가 꿈에 여호와를 만납니다. 꿈에서 신을 만난다는 이야기는 고대 이집트나 다른 문명권의 왕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보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솔로몬은 재판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정확한 워딩은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길게 이어집니다.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한 장수나 부를 구하지 않고 백성들의 송사를 위한 지혜를 구했으니 지혜를 줄 뿐만 아니라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도 주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선왕 다윗처럼 믿음을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지혜와 부귀와 영광과 장수를 허락하겠다는 여호와의 약속은 솔로몬에게 실현되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은 바로 솔로몬 시대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었고 궁궐도 건축되었습니다. 국력이 강할 때라서 이런 대형 토목건축 사업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성전은 7년에 걸쳐서, 왕궁은 13년에 걸쳐서 완공했습니다. 그가 지혜롭다는 소문은 다른 나라에까지 파다했습니다. 왕상 10장에는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서 한 수 배우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솔로몬의 인생은 그야말로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로 성공적이었습니다.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13)는 여호와의 말씀이 그의 인생에 그대로 실현된 것이니까요.
한 인간의 삶에 대한 평가는 인생 전체를 놓고 내려져야합니다. 그 말은 인생의 마지막이 중요한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의 말년은 여러 가지 점에서 좋지 않았습니다. 겉으로야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중에서 핵심은 그가 여호와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왕상 11:4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 솔로몬이 우상숭배에 떨어졌다는 겁니다. 성경기자들의 비판 중에서 이것보다 더 준엄한 것은 없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면 여호와를 더 성실하게 섬겨야 할 텐데, 솔로몬은 오히려 거꾸로 갔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외적인 축복을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다는 걸 솔로몬의 인생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귀와 영화는 그게 없을 때나 소중하지 주어지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화려하게 보이던 것들이 상투성으로 떨어집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도 그것만으로는 인생을 생명 충만하게 살 수 없습니다. 거기에 매달리면 늪에서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 듯이 상투성의 늪 안으로 더 깊이 빠져듭니다. 그 상투성이 곧 지옥의 특징입니다.
성경기자는 솔로몬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왕상 11:3절에 따르면 솔로몬의 후궁이 칠백 명이고, 첩이 삼백 명이라고 합니다. 이 여자들이 왕의 마음을 여호와로부터 돌아서게 했습니다. 당시에는 외교 정책적으로 외국 공주들을 왕비나 후궁으로 맞아들이곤 했지만 솔로몬의 경우는 정책적인 것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이방 여자들을 아내로 맞은 겁니다. 이 여자들은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 몰록 등의 우상을 끌고 왔습니다. 솔로몬은 이런 신들을 위한 산당을 예루살렘 앞에 지었습니다. 우상을 향해 마음이 기울어진 솔로몬은 내우외환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로보암 장군이 모반하려는 낌새를 알아챈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고, 여로보암은 이집트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국내외 정세가 어수선한 상황에서 솔로몬은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르호보암 시대에 나라는 남북으로 나뉩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솔로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기자들이 솔로몬에게 내린 평가입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
저는 솔로몬을 생각할 때마다 복잡한 마음이 듭니다. 성경기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집권 초기에 솔로몬은 여호와를 사랑하고 다윗의 법도를 충실히 따랐습니다. 왕이 된 데에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일단 왕이 된 다음에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능력은 인정받아야 합니다. 더구나 아버지 다윗의 숙원사업이었던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가 말년에 이방 여인들로 인해서 여호와를 멀리했다는 게 말이 되나요? 솔로몬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한 그가 왜 딴 사람이 되었는지를 우리는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솔로몬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부분적으로 바뀔 수는 있으나 중심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애국운동을 하다가 나중에 친일로 돌아선 이들이 있고, 운동권에서 활동하다가 정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선 이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상황에 따라서 변했다기보다는 원래의 모습이 숨어 있다가 나중에 나타난 것이라고 봅니다.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이 꿈에 여호와를 만나서 요청한 것은 지혜였습니다. 그 대목을 정확하게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그가 원한 것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걸 사람들은 보통 지혜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두 이걸 좋다고 여깁니다. 성경에는 이와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창 2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자라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먹어도 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멀지 말라.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뱀이 여자를 유혹할 때 이렇게 유혹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소위 선악과 설화에서는 선과 악을 인식하는 것이 죄로 규정됩니다. 왜냐하면 선악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배타적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좋은 뜻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달라고 했겠지만 그 능력은 우리를 파멸시킵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죄입니다.
선악의 분별 능력이 왜 죄일까요? 그냥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선한지 악한지를 실제로 알 수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교우들 관계도 그렇습니다. 김 집사가 겉으로는 믿음이 좋은 거 같지만 실제로는 믿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차라리 모르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그걸 알면 굉장히 불편한 관계가 됩니다. 두 시간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미리 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큰 병에 걸린다는 것을 미리 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걸 알면 죽어야 합니다. 죽은 사람만이 생명의 실체를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한 선악을 분별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재판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법정은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해서 논쟁을 벌이는 곳입니다. 어느 정도는 실체적 진실을 가릴 수 있을지 몰라도 완벽하게 가릴 수는 없습니다. 솔로몬의 법정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아기를 둘로 잘라서 각각 나눠주라는 방식은 오늘날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습니다. 검사나 변호사, 판사 모두 선악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다만 법이 정해놓은 범주 안에서 그걸 찾아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법의 문구가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집니다. 현실 세계에서 법과 재판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최대한 실체적 진실을, 즉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도록 법정과 강의실에서, 그리고 삶 한가운데서 논쟁해야 하고, 이에 따른 법체계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간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 둘 사이에 긴장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을 실현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부귀와 백합화
저는 솔로몬을 평가할만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평가가 설교의 목표도 아닙니다. 성경기자들이 솔로몬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가 핵심입니다. 그는 당대의 역사에서 나름으로 할 만큼 했습니다. 다윗 왕의 마음을 얻은 밧세바를 어머니로 두었고, 권력 암투가 벌어지는 궁궐 상황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린 나단 선지자 덕분으로 당시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왕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크게 키운 건 잘한 일입니다. 왕상 4:20절의 표현에 따르면 당시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늘었고, 모두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했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주변 여러 나라들이 조공을 바쳤습니다. 이런 시절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솔로몬 시대가 유일무이했습니다. 태평성대를 솔로몬이 이룬 겁니다. 그러나 성경기자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솔로몬을 칭송만하지 않습니다. 앞의 모든 업적이 쓰레기처럼 보일 정도로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솔로몬은 말년에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으나 결국은 믿음에서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좌절입니다. 그의 시행착오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의 참된 인생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와 권력과 장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에 서는 것이 가장 복된 인생이라는 게 그 대답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는 답입니다. 알지만 우리의 마음은 습관적으로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로 돌아갑니다. 기도할 때는 솔로몬의 지혜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뒤로 따라오는 부귀와 영화를 갈망합니다. 만약 지혜를 선택할래, 부귀와 영화를 선택할래 하면 지혜는 쏙 들어가겠지요. 이런 선택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일단 세상에서 가난하고 힘이 없어 불행하게 사는 것보다는 솔로몬처럼 화려하게 사는 게 낫겠지요. 현실 세상에서 그걸 부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가 바람이나 구름처럼 그냥 지나가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저자가 솔로몬으로 알려진 전도서에는 자신을 이스라엘 왕이라고 표현한 사람의 말이 나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살펴보니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더라.’고(전 1:14) 했습니다. 인생이 화려할수록 삶이 헛되다는 사실에 앞에서 더 심각하게 좌절합니다. 그래도 솔로몬처럼 부귀와 영광을 손에 넣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예수님은 구약 인물을 자주 거론하지 않으셨습니다. 솔로몬은 드문 경우에 속합니다. 마 6:28,29절에 솔로몬이 언급됩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솔로몬의 부귀와 영광을 백합화에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백합화는 단돈 몇 푼으로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지만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삶을 정확하게 뚫어보는 사람은 푼돈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백합화가 백배 천배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여기 모인 분들 중에서 삶의 여유가 있는 분들도 있고 없는 분들도 있겠으나 그런 차이는 정말 미미합니다.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의 담임 목사와 백 명이 채 안 되는 대구샘터교회의 담임 목사 사이에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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