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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9:2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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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익환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2월 18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복음서 강해14 일상을 변화시키는 믿음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막9:21-24)
25살 때 드라마 외주제작업체에서 일했던 때가 있었다. 막내 조연출로 고현정, 김민종 주연의 성탄특집드라마 제작에 참여했었다. 말이 조연출이지 그런 3D업종도 없었을 것이다. 촬영일정이 잡히면 소품 준비, 장소 섭외, 촬영장 차량과 인원통제, 배우들 스탠바이 등 모든 것이 가능한 상태로 준비해 놓아야만 했다. 열정페이를 받으며 그래도 꿈이 있었기에 그런 일들에 도전할 수 있었다. 한번은 스탭진들과 식당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성경 말씀이 적힌 표구가 눈에 들어왔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보더니 한 선배 pd가 말했다. ‘야 저거 우리 말인데…’ 그 분은 교회 다니시는 분이 아니었다. 시간 상, 여건 상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놔야 하는 게 당시 조연출들의 일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선배는 그 말씀에 격하게 공감을 표시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그 표구에 씌어져 있던 말씀은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우리는 두 주 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체험을 했던 것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산 위에 초막을 짓고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지속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튿날 산에서 내려와야 했다. 산 아래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간질병 아들을 둔 한 아버지의 우울한 일상이었다. 귀신 때문에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며 발작하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던 그 아버지의 일상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이 아들을 데리고 용한 의사도 찾아가 보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도 찾아가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유대 사회는 그 아들을 고칠 능력이 없었다.
이 아버지는 갈릴리에서 시작된 천국복음으로 귀신들이 떠나가고 병자가 치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희망을 걸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까지 그 아들을 데리고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 예수님과 세 제자들은 산 위에 있었고, 나머지 아홉명의 제자들만이 마을에 남아 있었다. ‘내 아들 좀 고쳐주세요. 귀신을 좀 쫓아주세요’ 이 아버지는 남아 있는 제자들을 붙들고 간청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이미 둘씩 둘씩 파송받으며 이 마을 저 마을 다닐 때 귀신을 쫓아낸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방법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 때 예수님과 세 제자가 산에서 내려와 보니 이 상황 속에서 서기관들과 나머지 아홉명의 제자들이 변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서기관들이 누구인가? 구약의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도록 전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 예루살렘에 있어야할 서기관들이 왜 가이사랴 빌립보에 와 있는 걸까? 당시 이스라엘 국가 최고 의결기관은 산헤드린이었다. 산헤드린 당국자들은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조사단을 꾸리게 된다. 그래서 파견되어 온 것이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들인 것이다. 제자들은 서기관들에 비해 배운 것도 없었고 말발도 딸렸을 것이다. 더군다나 귀신도 쫓아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제자들은 서기관들과의 변론에서 일방적으로 깨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변론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서기관들의 위압적인 반론들을 뒤집을 수 없었다. 귀신 들린 아이 아버지의 우울한 일상 역시 변화시킬 수 없었다. 이 상황을 알게된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탄식하신다. 거기에 있던 서기관들, 군중들, 아이의 아버지, 그리고 제자들까지 ‘믿음이 없는 세대’라는 진단을 받게 된 것이다. 그 세대가 믿음이 없었기에 귀신 들린 아이 하나를 고치지 못하고 논쟁만 하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 아이를 데려오게 하신다. 그리고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며 말씀하신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그러자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떠나가게 된다. 그리고 아이는 온전케 된다.
그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와서 질문한다. ‘우리는 왜 쫓아내지 못하였지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각각 예수님의 대답을 조금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마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막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에서는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말한다. 마가복음에서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은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기적을 행하셨던 것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믿음의 세대를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 기적의 순간 순간마다 기도하셨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풍랑을 잠잠케 했던 기적도, 변화산에서 변형된 기적도 모두 기도하신 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제자들은 어쩌면 귀신을 쫓았던 이전의 경험이 자신들의 능력인 것으로 착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기도조차 하지 않았고, 그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자기 경험의 울타리에 갇혀서 아무 능력도 행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제자들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는 책망을 들어야 했던 것이다.
사실 믿음과 기도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긴밀히 연결된 것이다. 믿음이 없다면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한편 기도하지 않는다면 믿음은 결코 자라지 않는다. 기도할 때 우리는 믿음의 세계를 보게 된다.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문제들을 진단하고 파악할 수 있는 영적 시각을 갖게 된다. 산 아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변론가운데 있게 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믿음이 작기 때문이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신이 강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작은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채널이 열릴 때 비로소 기적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오직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귀신이 들려 발작을 일으키는 아이를 보고 그의 아버지에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신다. 그러자 아버지가 대답한다. 막 9:21-22,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란 표현에서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하는 아버지의 상태를 엿볼 수 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할 수 있거든’이라는 반쪽 짜리 믿음은 엄밀히 말해 믿음이 아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을 그 아버지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막 9: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여기서 이 아버지는 믿음이 작은 자가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믿음의 기도를 하고 있다. 그것은 일단 내가 믿는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아시는 분이다. 그럼에도 도와달라는 그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 안에 겨자씨만한 믿음의 채널이 열리자 당시 유대사회가 고치지 못했던 그 아이의 문제를 고쳐주는 기적을 베푸신다.
세상에서는 남부러울게 없는데 신앙의 세계에서는 자기 믿음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한없이 작아지는 분들이 있다. 수련회를 하거나 부흥회를 하면 은혜 충만했다가도 우리의 일상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여전히 영적으로 무능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당황해한다. 과거 싱글이었을 때 열심히 신앙생활 했지만 결혼하고 매일 반복되는 가사와 육아로 영적으로 뒷걸음만 치는 모습을 확인할 때 우리는 슬퍼진다. 중요한 것은 일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을 내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의 주체로 내가 서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안 계신 순간 산 아래 남아있던 제자들에겐 일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이 필요했다. 그들은 더이상 예수님의 능력에 묻어갈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는 언제까지나 부모님의 신앙에 편승하여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믿음 좋은 아내, 믿음 좋은 남편에게 의지할 수 없는 일이다. 좋은 교회 다니고, 좋은 목사님 만나고, 좋은 설교를 많이 듣는다고 그것이 다 내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믿음을 발휘하여 나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언제까지 마음 한켠에 신앙의 열등감을 느끼며 ‘나는 왜 안되지’라고 한탄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의 이 기도를 겸손히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참된 믿음은 스스로 믿음이 없는 자임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구할 때 시작되는 것이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성경의 원리는 믿음은 그냥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드시 말씀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번에 김대영 목사님 다녀가시면서 믿음 있는 제자가 되기 위해선 훈련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믿음이 자라야만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의 신앙이 자라는 것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다시 고민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은 매순간 믿음이 요구되는 곳이다. 직장생활을 하고, 연구를 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매 순간 세상과 다른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세대는 자기를 믿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도움없이 자기능력으로도 얼마든지 자신만만하게 사는 세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세상도 풀지 못하는 문제들이 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반드시 믿음과 기도로 밖에는 열 수 없는 문제들 앞에 마주할 때가 있다. 나는 여러분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었던 유대사회처럼 영적으로 무능력한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바라기는 우리 스스로의 믿음이 요구될 때 당황하지 않고 믿음을 발휘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 믿음의 기도를 통해 매일 마주하는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켜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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