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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룻3:1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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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2422)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룻기 3장 16-18절)
<축복을 외면하지 말라 >
한 목회자가 늘 어렵게 살면서 가난을 거룩하게 여겼다. 교인도 대개 비슷하게 생각했다. 한 달 사례비를 최저로 받고 그 적은 사례비로 5명의 자녀를 키우며 극심한 가난 가운데 살았다. 어느 날 한 교인이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고 목회자에게 거액의 수표를 주며 말했다. “목사님! 이것은 목사님에게 개인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그 돈을 받고 양심이 찔리고 죄책감이 생기고 거룩함이 없어질 것 같아서 말했다. “성도님! 감사해요. 그러나 개인적으로 받기 미안하니까 받은 것으로 치고 교회에 헌금하겠습니다.”
그가 헌금함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때 마음이 떨리고 수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이 돈이 있으면 아이들에게 근사한 식사라도 한번 해줄 수 있고 생활 형편이 조금이라도 풀리는데.” 그런 고민을 하다 헌금함에 그 수표를 넣고 그날 위장병에 걸렸다. 병상에서 그는 깊이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가난이 거룩함의 증거란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기도했다. “하나님!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즐겁게 누리는 삶도 배우게 하소서..”
누림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적절하고 지혜롭게 누리는 것도 감사를 아는 삶의 일종이다. 너무 인색하게 살지 말고 편협한 마음을 품지 말라. 가난하게 사는 것을 겸손으로 오해하면서 부정적인 모습으로 겸손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삶을 누리지 않고 축복을 외면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축복을 적절하게 누리며 이웃과 나누려는 것이 진짜 겸손이다.
남의 누림에 대해 시기하거나 불편해하거나 뒤에서 험담하지 말라. 누림 중에는 진실하게 흘린 땀의 대가로서 하나님이 축복하심으로 누리게 된 경우도 있다. 그 사실을 외면하고 겉으로 누리는 모습만 보고 시기하면 안 된다. 영화가 끝날 때쯤에는 대개 주인공이 행복하게 잘사는 모습이 나온다. 그때 전반전의 고생하는 모습은 보지 못한 채 역전승을 이룬 후반전의 누리는 장면만 보고 시기하고 불편해하지 말라.
남의 누림에는 선대의 희생이 씨앗이 된 경우도 많다. 그처럼 선대의 기도와 땀과 희생의 씨를 뿌린 역사를 보지 못하고 현재의 누리는 모습만 보고 비판하는 사람의 말에 무조건 동조해 같이 비판하지 말라. 복된 사람이 현재까지 오게 된 과정의 역사를 사람은 대개 잘 모른다. 그러므로 남의 누림에 사치나 불의나 교만이 있지 않다면 그의 누림을 인정해주고 내게도 은혜와 누림의 때가 오도록 믿음의 준비를 하라.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
룻 얘기는 성경에 나오는 최대 신데델라 스토리다. 룻은 이방인 모압 출신의 젊은 과부로서 베들레헴의 최대 부자인 보아스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마침내 아내가 되었다. 룻이 어떻게 그런 역전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는가? 그녀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어떤 삶인가?
1. 사명적인 삶
자기를 받아달라는 룻의 담대한 요청을 보아스가 받아들였지만 기업을 무를 법적인 요건이 구비되지 않아 함께 지냈던 그 밤에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밤이 지나고 새벽에 돌아온 룻에게 시어머니 나오미가 물었다.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그 구절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내 딸아! 어떤 존재가 되었느냐?”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이다. 나오미는 룻이 보아스의 신부가 되길 원했기에 밤새 눈이 빠지게 룻을 기다리다가 그 질문부터 했다.
그 질문은 지금도 성령님이 성도에게 하는 질문이다. “너는 어떤 존재로 살고 있는가? 진정으로 주님의 신부가 되었느냐?” 하나님은 성도가 주님의 시녀가 아닌 주님의 신부로서 멋지고 자신감 있게 살기를 원하신다.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주님의 신부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사명적인 삶을 살 때 힘든 일도 넉넉히 감당하게 된다. 사람은 힘든 일도 할 줄 알아야 인물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또한 교회생활을 하면서 가끔 생기는 의견 충돌과 갈등 상황을 잘 극복하려면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사명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큰 것은 죽지 않는다는 대마불사란 말이 틀릴 때도 많다. 과거의 대 제국들도 다 사라졌다. 큰 교회는 한때 잘 흔들리지 않는 항공모함인 줄 알았지만 요새는 큰 교회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세습 문제, 재정 문제, 이단 문제 등이 주요 원인이지만 최근에 한 신학자의 말에 의하면 성도의 향수 문제도 큰 원인이라고 했다. 대형 교회에서 오래 봉사하면서 성도의 정체성을 잃은 허탈감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란 주장이다.
어릴 때 풍금 앞에서 찬양하며 주일학교를 다녔던 시절에 대한 향수로 인해 나이가 들면서 대형화된 교회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각종 불만과 문제로 분출되는 것이란 주장이다. 성도들이 교회와 교인의 정체성 문제를 본능적으로 되짚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문제도 자꾸만 생겨난다. 그런 마음은 언제 붙잡히는가? 사명감이 뚜렷할 때다. 그때 하나님의 마음도 붙잡을 수 있고 자기 마음도 안정을 찾는다. 정체성이 분명한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만족감과 안정감과 행복감과 성공 가능성이 커진다.
2. 효도하는 삶
나오미의 질문을 받고 룻은 친절히 보아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말씀드렸다. 그리고 보아스가 준 보리 여섯 되가 있는 보따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빈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17절).” 룻과 보아스의 언행을 보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과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본질이 같다는 사실을 느낀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 부모님을 소홀히 하면 사실상 잘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효도도 잘해야 한다.
어떻게 부모를 기쁘게 하는가? 부모님께 집도 사 드리고 용돈도 많이 드리고 여러 필요를 채워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님과 함께 있기를 즐거워하고 사랑의 대화를 많이 하는 것이다. 룻은 자식도 없는 상황에서 남편이 죽었지만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을 부담으로 여기지 않았다. 또한 시어머니가 자기에게 벌어진 일을 묻자 “어머님! 깊이 알 것 없어요. 기도나 해주세요.”라고 하지 않고 상세히 그동안 벌어진 일을 말씀드렸다. 보리 여섯 되 주는 것보다 부모님과 함께 있으면서 대화를 많이 해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야 나도 행복해진다. 많은 돈으로 값비싼 향수를 사주는 삶보다 따뜻한 말로 은은한 향기를 전하는 삶이 더욱 큰 기쁨을 준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면 자주 전화라도 드려야 그 모습을 보면서 자녀도 따라하고 자기 노년도 풍성해진다. 부모에게 불효하면서 자녀로부터 효도 받기를 바랄 수는 없다. 복 받으려고 자녀를 잘 양육하고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가 자녀를 위해 쌓는 덕과 자녀가 부모를 위해 쌓는 덕은 결국 복을 부른다.
3. 드나베의 삶
부모님과 함께 하면서 많은 대화도 해야 하지만 효도가 말로만 끝나면 안 된다. 보아스가 룻에게 보리 여섯 되를 주며 “빈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고 했듯이 부모님께 빈손으로 가지 말고 부모님의 빈손을 채워드리라. 어떻게 보아스가 베들레헴의 최대 부자가 되었는가? 가문이 좋은 이유도 있었겠지만 룻에게 “빈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고 할 정도로 드릴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물질적인 축복의 문이 열렸을 것이다.
자식이 아무리 많은 것을 부모님께 드려도 전체적으로 보면 부모로부터 얻는 것이 훨씬 많다. 그러므로 드릴 때도 생색내지 말고 소리 없이 겸손히 드리라. 하나님께 갈 때도 빈손으로 가지 말고 최선을 다해 마음과 정성과 시간과 물질을 드리라. 하나님께 빈손으로 가면 늘 빈손이지만 하나님께 넉넉한 손으로 가면 더 넉넉하게 채움 받는다. 그런 드림의 삶을 나누고 베푸는 삶으로 확대시킬 때 복의 퍼즐이 완성된다.
바른 편에 서는 삶을 기본 바탕으로 힘없는 사람 편에 서주려고 하라. 힘 있는 사람이 늘 성찰해야 할 질문은 “내가 힘없는 사람 편에 잘 서주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힘 있는 자의 편에 설 때가 많지만 기록과 역사는 힘없는 사람 편에 서서 반전의 역사를 만들어낼 때가 많다. 하나님의 역사와 심판은 더욱 힘없는 자의 편에 선다. 단기간에는 힘이 정의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많지만 멀리 보고 역사를 보고 사후까지 보면 힘보다는 진실과 사랑이 정의가 된다. 힘이 있으면 힘을 나눌 생각부터 하라.
쓸 때는 기쁘게 쓰라. 자녀를 키우면서 을처럼 느껴지면 그때 “부모라서 죄인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비슷한 개념으로 돈을 많이 벌었으면 을의 느낌을 가지고 “돈이 많아서 죄인이다.”라는 의식이 생길 정도로 돈을 잘 쓰라. 물론 돈 많은 것이 죄는 아니다. 잘 쓰면 돈은 선의 재료가 된다. 돈 많은 것이 죄가 안 되도록 겸손하게 잘 쓰면 된다. 교회에서도 헌금을 많이 할수록 더 겸손해지면 그의 가치는 더욱 빛나게 된다.
한 부자는 교회 헌금의 약 40%를 감당하면서도 늘 겸손하다. 그 전에 헌금을 많이 하면서 마음이 높아져 목회자도 은근히 조종했다가 아픔을 당하고 교회를 옮긴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섬기며 교인들의 사랑과 존중을 받던 교회를 옮기면서 영적인 고독과 상처를 체험했기에 그 후에는 헌금을 많이 해도 마음과 소리를 힘써 낮추자고 다짐했다. 그 다짐대로 살았기에 새로운 교회에서는 더 존중을 받았다. 하나님은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삶을 통해 돈을 잘 쓰려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축복의 문을 열어주신다.
4. 기다리는 삶
룻의 말을 듣고 나오미는 보아스의 행동이 룻을 아내로 맞으려는 행동임을 알고 흥분하기보다 차분하게 말했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18절).” 나오미는 보아스가 동분서주하며 룻을 자기 아내로 맞이하려고 정지작업을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에 더 이상 다른 방법을 찾거나 다른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그저 앉아 기다리라고 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삶에 탁월해야 한다. 내가 할 일을 다 한 후에 안달하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다리면 하나님이 가장 선한 길을 열어주신다. 기다림은 믿음의 최고봉이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을 가지고 평안 가운데 기다리라. 많은 사람을 만나 많은 말을 하려고 하지 말라. 많은 만남과 많은 말이 인생을 앞서게 할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그것 때문에 오히려 흠과 가십거리가 많아질 수 있다.
1976년 2월의 추울 때 청년 A와 B가 그해 1기로 방위 훈련소에 입소했다. 주일이 되어 첫 예배를 드릴 때 둘이 포함된 4명이 훈련소 교회에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란 특송을 불렀다. 예배 후 4명은 기념사진을 찍고 3명이 사진 값을 걷어 A에게 주었다. 그 후 A는 사진을 보내주지 않았다. 후일에 A와 B 모두 목회자가 되었다. 그 중에 A는 초대형 교회 담임목사가 된 후 갈등의 한 복판에 섰다. 다른 B목사가 최근에 말했다. “교회 내부사정은 잘 몰라도 저는 A 목사를 40년 전에 내 사진 값 떼어먹은 사람으로만 기억해요.”
사람을 많이 만나고 유명해지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40여 년 전에 사진 값 떼어먹는 일까지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많은 만남보다 진실한 소수와의 만남이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함을 나이가 들면서 체감할 때가 많다. 많은 만남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 내 뒤에서 내 인격과 체면을 구기는 어떤 말과 행동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남을 너무 많이 가지는 것이나 말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이 나중에 흠이 될 때도 많다. 세월이 흐를수록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성경 말씀이 더 귀하게 실감되는 것 같다.
폭풍우 치는 배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배는 대형 크루즈가 아닌 작은 배였다. 그런 배에서 예수님이 너무 편하게 주무시니까 제자들이 흔들어 깨워야 할 정도였다. 그때 예수님이 일어나 폭풍에게 말씀했다. “잠잠하라!” 그때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졌다. 하나님은 폭풍우가 없게 하기보다 폭풍우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나님 되어주심으로 깊은 평안과 축복을 주신다. 늘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며 역전 인생의 스토리를 만들어가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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