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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용 식탁과 마지막 비밀 레시피 - 김아정
가족들 모두 의자가 되어버렸다. 나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유는 아마 엉덩이 가시 때문일 것이다. 내 엉덩이는 잠시 어디 앉아 있을라치면 그새를 참지 못하고 가시를 곧추세웠으니까.
나는 우리 집 층간소음의 주범이다. 어렸을 적, 할머니는 나에게 방방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방방아, 저녁 먹자. 이리와 앉으렴.” 할머니는 언제나 우리 집 식탁을 책임지곤 했다. 아침 일곱 시가 되면 우린 모두 억지로라도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어야 했고, 저녁 여섯 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집에 와서 저녁을 먹어야 했다. 식탁 앞에서도 나는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탓에 꼿꼿이 서서 밥을 먹어야 했다.
오늘도 그랬다. 혼자 식탁 앞에 서서 직접 요리한 반숙 계란 프라이를 밥에 슥슥 비벼 김에 싸먹었다. 할머니가 알려준 레시피였다. 이제 할머니는 없지만 할머니가 알려준 레시피는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할머니가 떠나고 가족들은 더욱 바빠졌다. 아빠의 건축소 사무실은 매일 야근이 생겼고 중학생이 된 형은 영어 학원을 하나 더 늘렸다. 화장품 가게에 다니던 엄마는 일개 직원에서 매니저로 승진하는 바람에 가게 마감까지 책임져야 했다. 그럼 아무도 없는 빈집은 나의 주방이 된다. 나는 부엌 찬장에 있던 내 전용 앞치마를 꺼내 입는다. 그러고는 할머니가 알려준 레시피를 따라 이런저런 요리 연습을 한다. 한 번은 고난도 국수 삶기를 시전하다가 집에 불을 낼 뻔했다.
나는 요리에 필요한 재료도 직접 기른다. 할머니가 만들어 놓은 베란다 화단에 고추나무와 깻잎, 그리고 상추를 심었다. 가족들끼리 매일 번갈아가며 물을 주기로 약속했는데, 언제부턴가 화단이 마르기 시작했다. 나는 한 번도 내 차례를 거른 적이 없었다. 가족들에게 물으니 가족들은 물 주기는커녕 베란다에 화단이 있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결국 고추나무 하나가 시들었고 이후 내가 줄곧 식물들에게 밥을 주었다.
마지막 밥 한 숟갈을 떠먹던 찰나였다.
“똑, 똑.”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렸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였다. 저녁 하늘은 그새 밤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개수대에 그릇을 정리하고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는 월요일이라 차가 많이 밀린다며, 무서우면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라고 했다. 엄마는 일이 바쁜지, 형은 공부가 바쁜지, 둘 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베란다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아 식물들을 살폈다. 지난주만 해도 깻잎과 상추는 딱 내 손바닥만 했다. 그런데 어느새 내 손바닥보다 더 크게 자라 있었다. 식물들의 자라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도 그다지 무섭지 않아졌다.
아빠는 평소보다 삼십 분 더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여덟 시부터 중요한 야구 중계가 있다며 오 분 안에 샤워하기를 선보였다. 아빠는 머리도 대충 말린 채 목욕가운만 걸치고 텔레비전 앞 가죽 소파에 앉았다. 아직 비누 냄새가 폴폴 나는 아빠의 몸이 푹신한 소파 속에 푹 파묻혔다.
오늘 도덕 시간에 나는 우리 집 가훈에 대해 발표해야 했다. 집에서 벌써 십일 년째 살고 있지만 나는 한 번도 가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선생님은 내 텅 빈 교과서를 들여다보더니 내일까지 가훈을 알아오라는 개인 숙제를 내주셨다. 나는 도덕책을 꺼내 들고 거실로 방방 달려갔다. 아빠에게 가훈이 뭐냐고 물었다. 야구가 막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한번 버럭 소리를 지른 후에야 아빠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
“도덕 숙제예요.”
아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크고 짧게 외쳤다.
“기초부터 탄탄히!”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아빠 건축소 사무실 벽에 붙어 있던 사훈 아녜요?”
“에이, 이거나 그거나.”
“에이, 이거는 이거, 그거는 그거.”
“비켜, 티비 안 보여.”
아빠는 나를 밀쳐내며 소파에 더욱 몸을 깊숙이 박고 텔레비전에 집중했다.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더욱 방방거리며 집안을 돌아다녔다. 한참 심심하던 찰나, 형이 집으로 들어왔다. 형은 아빠를 본체만체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따라 들어가려 하자, 방문을 아예 잠가버렸다. 나는 방문을 두드리며 형을 한참 불렀다.
“동생이랑 좀 놀아줘라.”
아빠가 언성을 높였다. 형은 그제야 방문을 열어주었다. 형은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상태로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게임을 시작했다. 나는 형의 의자 뒤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형도 말이야, 어렸을 때 도덕 시간에 우리 집 가훈 알아가는 숙제해 봤지?”
“야, 네가 매달리니까 의자가 자꾸 돌아가잖아.”
형은 내 말을 무시한 채 의자를 책상 앞에 바짝 붙였다. 귀찮다는 듯 자꾸 나를 옆으로 밀어냈다. 나는 더욱 형의 의자에 매달렸다.
“잘 좀 기억해봐. 형은 뭐라고 적어 갔어? 기초부터 탄탄히?”
형이 딸깍이던 마우스를 멈추고 나를 슥 노려보더니 답했다.
“너는 네 거 할 일, 나는 내 거 할 일. 응? 그러니까 네 방에나 좀 가.”
내 방? 원래는 여기가 내 방이었다. 분명하게는 형과 나의 방이었다. 나는 지금의 내 방을 좋아하지 않는다. 할머니 냄새가 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그 퀴퀴한 된장 냄새 말이다. 내 방은 원래 할머니 방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할머니가 방에 메주들을 죽 걸어놓고 지냈다. 나는 할머니 냄새가 싫었다. 그래서 잠잘 때를 제외하곤 방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내 방을 갖고 싶어 했던 건 사실이지만 할머니의 빈방이 내 방이 되어버릴 줄은 몰랐다. 일주일 내내 환기를 시켜도 벽지나 커튼에서는 여전히 할머니 냄새가 났다.
“방방이 너, 네 방 갖고 싶어 했잖아.”
“할머니 냄새나서 싫어.”
“뭐? 이 녀석이 버릇없게!”
엄마는 언제나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내가 버릇없는 행동을 하면 그저 오 분 동안 손을 들고 벌을 서게 했다. 그러면 벌을 서는 동안 나는 혼자 툴툴거리곤 했다.
‘할머니 냄새 맡으면, 할머니 생각나니까, 그래서 싫어.’
나는 문턱에 쭈뼛쭈뼛 서서 형을 노려보았다. 게임에 집중하느라 형은 내가 자기를 노려보는지도 몰랐다. 거실에서 아빠의 환호성이 들렸다. 누군가 홈런을 친 모양이었다. 형은 키보드 자판을 탁 때리며 탄식했다. 게임에서 아깝게 진 모양이었다.
빗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나는 조금씩 엄마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우산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엄마가 비에 흠뻑 젖어서 나타났다. 나는 엄마 품에 달려가 안겼다. 엄마는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 중이었다. 나는 엄마가 안방에서 잠옷으로 갈아입는 동안 내내 옆에 매달렸다. 엄마의 오른뺨에 다짜고짜 쪽 소리가 나도록 침을 잔뜩 묻혔다.
“얘가 왜 이래?”
엄마가 뺨을 닦아내며 나를 떼어놓았다. 그러고는 조그마한 나무 화장대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여 앉아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고등학교 동창인 모양이었다. 엄마는 휴대폰을 어깨에 받힌 채 펜과 달력을 꺼내 들었다. 나는 엄마의 다이어리 앞에 내 도덕책을 내밀었다.
“엄마는 우리 집 가훈에 대해 알죠?”
엄마가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더니 날 향해 애써 미소 지었다.
“받아 적으렴, 언제나 웃음을 잃지 말자.”
엄마가 불러준 가훈을 받아 적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말자’는 화장품 가게에서 일개 직원이었던 엄마가 매니저로 승진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건 그냥 엄마의 다짐이잖아?”
엄마는 친구와 만날 약속을 정하는 중이었다. 엄마는 내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고 속삭였다. 나는 도덕책을 치우고 물끄러미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가 달력을 보며 약속 날짜를 잡았다. 다음 주 토요일은 ‘태권도 학원 겨루기 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서슴지 않고 그 날에 빨간 펜으로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나는 엄마의 달력을 빼앗았다.
“이번 태권도 겨루기 대회 할 때는 온다며!”
엄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오전이잖아, 이건 점심 약속이라고.”
내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엄마는 내게서 도로 달력을 빼앗으며 나가라고 손짓했다.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내 방으로 획 들어왔다.
‘겨루기 대회 끝나면 나도 점심 먹어야 하는데, 쳇.’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 매트리스 위에서 방방 뛰었다. 기분이 상할 때 이렇게 방방 뛰고 나면 기분이 좀 나아졌다. 물론 조금 있다가 엄마에게 이불이 왜 이 모양이냐는 꾸중을 듣겠지마는 말이다.
다시 도덕책을 펼쳐놓고 나는 가족들의 세 의견 중 무엇을 답란에 적어 넣어야 하나 고민했다. 아무리 다들 따로따로 지낸다지만 이렇게 가훈마저 따로따로 챙기는 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할머니가 쓰던 흔들의자에 살짝 걸터앉아 우리 집 가훈에 대해 고민했다. 바로 그때, 천둥 번개가 쳤다. 깜짝 놀란 엉덩이 가시가 뾰족하게 곧추섰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천둥 번개가 잇달아 몰아치면서 갑자기 정전이 일어났다. 온 사방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잔뜩 웅크린 몸으로 책상 서랍에서 손전등을 꺼냈다.
“아빠, 엄마, 형.”
방을 나와 손전등으로 주변을 비추며 차례로 가족들을 불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집 가족들은 큰 목소리로 두 번 정도 말해야 알아들었다.
“아빠! 엄마! 형!”
엄마의 전화통화 소리도, 형의 탄식도, 아빠의 환호성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킨 뒤, 거실로 방방 달려갔다.
손전등으로 아빠가 앉아 있던 소파를 비췄다. 샤워라도 했는지 가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좀 전까지 아빠가 입고 있던 목욕가운이 소파에 걸쳐져 있고 불룩 솟은 방석 부분은 마치 아빠의 늘어진 뱃살 같았다. 손전등으로 거실을 죽 비췄다. 아무도 없었다. 텔레비전만 까맣게 죽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형의 방으로 갔다. 방 안을 이리저리 손전등으로 비춰 보는데 별안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형의 컴퓨터 책상 의자가 형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어깨에 와이셔츠와 조끼를 걸친 채 다리에 벨트를 풀어헤친 교복 바지를 껴입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천천히 형의 의자로 다가갔다. 바닥에 축 늘어진 형의 와이셔츠 소매를 가만히 집어 들었다. 어디선가 형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의자에서 나는 소리였다. 화들짝 놀란 나는 안방으로 방방 뛰었다. 엄마의 자그마한 나무 화장대 의자 위에 엄마의 잠옷과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휴대폰에서 여보세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나는 문지방에 서서 엄마를 불렀다. 손전등을 비춰 침대와 장롱을 확인했다. 아까 같이 장롱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침대 위에는 엄마의 외투가 벗겨져 있었다. 그 순간, 화장대 의자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옆으로 조금 움직였다. 나는 들고 있던 손전등을 놓치며 그대로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잠시 잊고 있던 빗소리가 점점 또렷이 들려왔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그만 뒤로 꽈당 하고 넘어졌다. 엉덩이 가시가 우지끈, 부러지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뜨니 방 안이 환했다. 비는 밤새 그친 모양인지 고요했다. 어젯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흔들의자에 앉아 벌벌 떨다가 잠이 들었었다. 엉덩방아를 찧는 바람에 엉덩이 가시가 다 부러졌는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엉덩이가 근질근질하지 않았다. 시계를 확인했다. 곧 아침 먹을 시간이었다. 방을 나와 제일 가까운 거실부터 가보았다. 방방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사뿐사뿐 걸음을 떼었다.
‘그냥 악몽을 꿨을 뿐인 거야.’
나는 두 손을 꼭 모은 채 집안을 조심스레 돌아다녔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빠는 소파 의자가 되어버렸고 형은 책상 의자가 되어버렸고 엄마는 화장대 의자가 되어버렸다. 만날 그 자리에 그렇게 꼭 붙어 앉더니 결국 다들 의자가 되어버린 거였다.
“똑, 똑.”
또 비가 오나 싶어 창밖을 확인했다. 잘못 들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는데 또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 아침부터 대체 누가 찾아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여 인터폰을 확인했다. 노크를 할 때 대부분 사람들은 보통 인터폰 벨을 눌렀다. 직접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 침대에 누워 할머니랑 같이 자던 날 밤이었다. 할머니는 나더러 백 년 후에나 다시 만나자고 했다. 다음 날이 되자 할머니의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아직 백 년이 지나지 않았는걸.’
나는 문을 열었다. 할머니가 가만히 문을 닫고 들어왔다. 밤새 비를 맞았는지 입고 있던 옷이 젖어 있었다. 비에 흠뻑 젖어서도 할머니에게선 여전히 된장 냄새가 났다. 나는 울먹임을 참고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방방이, 잘 지내고 있었어?”
나는 조심스레 할머니에게 가족들의 소식을 전했다.
“인석들, 누가 우리 방방이만 혼자 남겨두래!”
할머니가 까끌까끌 주름진 손으로 내 뺨에 젖은 눈물을 슥 닦아주었다. 등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마지막 레시피를 깜빡하고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 생각나서 급하게 내려왔다고 했다. 어디서 내려왔느냐는 나의 물음에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할머니의 마지막 레시피는 된장찌개와 겉절이 콤비였다. 할머니가 밥을 짓는 동안 나는 베란다 화단에서 자라고 있던 채소들을 수확했다. 구부정한 허리로 싱크대 앞에 서 있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할머니가 예전처럼 다시 요리를 하고 있었다.
겉절이의 비법은 고춧가루 세 숟갈, 참기름 한 스푼, 참깨 한 주먹이었다. 비닐장갑을 끼고 깻잎과 상추가 상하지 않도록 살살 무쳐주면 됐다.
“우리 방방이, 깻잎이랑 상추, 잘 길렀구나.”
“그렇지도 않아요, 고추나무 하나가 결국은 시들고 말았는걸요?”
할머니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눈웃음을 지었다. 할머니는 고추나무를 만났다고 했다. 고추나무가 들려주는 우리 가족들 소식을 들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했다.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고추를 한 줌 꺼냈다. 고추나무가 우리 집 화단에서 맺지 못한 열매를 하늘에서 대신 맺었다고 했다.
“이게 그 고추나무 열매란다.”
된장찌개의 비밀 레시피는 고추였다. 된장을 풀어 감자와 양파를 넣고 끓이다가 마지막에 매운 고추를 송송송 썰어서 오 분 정도 졸여주면 완성이었다.
“뭐하고 있어. 가서 식구들 데려와. 같이 밥 먹자.”
나는 거실로 가서 소파 의자가 된 아빠를 데려와 식탁 앞에 앉혔다. 책상 의자가 된 형도, 화장대 의자가 된 엄마도 데려와 앉혔다. 나는 수저 놓는 일과 밑반찬 놓는 일을 도왔다. 마지막으로 마실 물까지 준비한 뒤, 내 자리에 앉았다. 식탁 가운데 할머니가 찌개를 놓았다.
“할머니, 할머니도 빨리 앉아요.”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오래도록 비워두었던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이제야 오인용 식탁의 의자들이 다 채워졌다. 구수한 된장 냄새 사이로 알큰한 매운 향이 풍겼다. 다들 할머니가 끓인 찌개가 먹고 싶어서라도 슬슬 일어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때였다. 아빠의 소파 의자가 움찔거렸다. 아빠의 목욕가운에서 갑자기 팔다리가 쑥 튀어나오더니 마지막으로 얼굴까지 쑥 솟아났다. 형도, 엄마도 의자에서 다시 사람으로 천천히 되돌아왔다. 가족들은 기지개를 쭉 켜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엄마가 나를 발견하곤 꼭 끌어안았다. 내 왼뺨에 다짜고짜 쪽 소리가 나도록 침을 잔뜩 묻혔다.
“우리 방방이, 혼자 남겨둬서 엄마가 미안해.”
아빠도, 형도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엄마 품을 비집고 나와 할머니를 가리켰다.
“할머니가 엄마랑 아빠랑, 형을 다 구해준 거야.”
가족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할머니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우리 방방이, 할머니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빠가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죽 둘러보았다.
“이건 다 누가 차린 거야? 밤새 누가 왔다 갔어?”
“할머니가 가르쳐준 마지막 레시피예요.”
가족들이 숟가락을 들고 저마다 된장찌개를 맛보았다. 너무 맛있는 나머지 눈물이 날 정도였다.
‘백 년 후는 아직 멀었는걸.’
나는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때 형이 부엌 벽에 걸린 액자를 가리켰다. 삐뚤빼뚤한 내 글씨였다.
‘아침밥부터 다 같이!’
어젯밤 도덕 숙제를 하다가 내가 새로 만들어낸 가훈이었다. 가족들 모두 새로 생긴 가훈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었다. 다들 내 의견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잠자코 가족들의 얘기를 듣던 나는 깔끔하게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럼 이제 더 이상 따로따로 가훈은 없는 걸로? 오케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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