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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룻 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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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83582 |
나오미와 룻
룻기 1:1-18, 창조절 10주, 2018년 11월4일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6.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5.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신구약 성경 66권 중에서 여성 이름을 딴 성경이 구약에 두 권 나옵니다. 룻과 에스더입니다. 룻은 에스더보다 비중이 높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의 증조할머니로서 예수님의 족보에도 나옵니다. 마 1:5b-6a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니 룻은 곧 예수님의 조상에 속합니다. 룻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는 점에서도 특이합니다.
룻 이야기
룻 이야기는 유다 지방에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으로 시작됩니다. 사해 서편 지역인 베들레헴에 사는 어떤 사람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사해 동편 지역인 모압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이런 일들은 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 중에서도 먹고살기 힘들어질 때 압록강을 건너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중국에 사는 조선족입니다. 북한의 경제 사정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중국과의 국경선을 넘은 북한 주민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모압으로 간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고, 그의 아내 이름은 나오미이며, 두 아들은 각각 말론과 기룐입니다. 그 집의 가장인 엘리멜렉이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 과부가 된 나오미는 혼자서 두 아들을 키웠습니다. 생활력이 강한 여자였는지 어려운 형편에서도 나오미는 두 아들을 장가보낼 수 있었습니다. 신부는 모압 여자였습니다.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바이고, 다른 여자의 이름은 룻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입니다. 10년 뒤에 두 아들까지 죽었습니다. 그 집안의 남자들이 다 죽은 겁니다. 이미 오래 전에 과부가 된 나오미와 새로 과부가 된 두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나오미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당시에 가장 가련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살아갔을 겁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중에 나오미는 고향에서 새로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극심한 기근이 끝나고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해졌다는 소식입니다. 나오미는 귀향을 결심했습니다. 우리나라가 가난하던 1960-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교포들이 다시 역이민을 오는 거와 비슷합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두 명과 함께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중에 며느리들의 입장을 역지사지로 돌아봤습니다. 자신은 고향으로 가는 거지만 며느리들은 모든 게 낯선 타국으로 가는 거였습니다. 며느리들은 남편도 없습니다. 홀로 된 시어머니만 믿고 베들레헴으로 간다는 게 얼마나 불안하고 가슴 답답한 일인지를 나오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며느리들에게 8,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꼭 안아주었습니다. 며느리들은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두 며느리들인 오르바와 룻은 10절에서 나오미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며느리들의 생각이 정 이렇다면 못이기는 척하면서 데리고 갈 수도 있었지만 나오미는 다시 며느리들을 설득합니다. 함께 갈 수 없는 좀더 현실적인 이유를 댑니다. 핵심은 나오미가 아들을 낳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에는 ‘형사취수제도’가 있었습니다. 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후손을 잇는 제도입니다. 후손을 잇는 것이 최선인 시대였기에 이런 제도가 당시에는 자연스러웠습니다. 나오미는 과부가 되었으니 자식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 재혼을 한다고 해도 아들을 낳아서 키우려면 세월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13절에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나오미는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이 치신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며느리들까지 자신의 저주스러운 운명 안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습니다. 나오미의 말이 떨어지자 며느리들은 다시 대성통곡을 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관계가 이보다 더 감동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여러 인간관계를 맺습니다. 가깝게는 가족이고, 친구나 직장 동료 관계도 있습니다. 순전히 취미생활을 함께 하는 관계도 있습니다. 사제관계도 중요합니다. 요즘은 ‘갑을 관계’라는 말이 두드러지는 세대입니다. 교수와 조교들 사이가, 담임 목사와 부목사의 관계가 갑을이 되기도 합니다. 진실한 사랑의 관계로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은 현대인들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들이 처한 상황은 열악했지만 행복 지수는 높다고 봐야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룻기를 읽으면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절감했을 겁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그들과 동일한 감동을 받습니다.
룻의 노래
두 며느리 중에서 큰 며느리로 보이는 오르바가 나오미에게 절을 하고 먼저 떠났습니다. 둘째인 룻은 꿈쩍하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다시 ‘네 동서를 따라서 너도 돌아가라.’고 타일렀습니다. 룻은 자신의 결심을 길게 설명합니다. 16절과 17절입니다. 다른 본문은 산문으로 되어 있지만 이 구절만은 시가(詩歌)입니다. 이 노래가 고대 유대 사회에서 민간 사이에서 일종의 민요처럼 불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운율이 따르는 시로 느끼면서 들어보십시오.
저에게 어머님을 버려두고 혼자 돌아가라고 너무 성화하시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겠으며,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어머님이 눈 감으시는 곳에서 저도 눈을 감고 어머님 곁에 같이 묻히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됩니다. 죽음밖에는 아무도 저를 어머님에게서 떼어내지 못합니다.
룻의 결심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죽음밖에는 아무도 자신을 시어머니에게서 떼어내지 못한다고 외쳤습니다. 대단한 결기입니다. 룻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십시오. 청상과부에게는 좋지 않은 소문이 따라다닙니다. 먹고살 길도 막막합니다. 이방인들을 낮춰보는 유대인들 마을에서 살려면 몸도 고생이고 마음도 고생입니다. 고향에 남아 있으면 친정 식구들이 있으니 어느 정도 새 출발할 기회가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마음 아파하고 있으니 시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모압 땅으로 돌아가는 게 바른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룻은 무서울 게 없다는 식으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오미는 룻의 결심을 꺾지 못했습니다. 결국 쌍과부라 할 나오미와 룻은 베들레헴으로 함께 갔습니다. 이들 앞에 어떤 인생이 펼쳐질지 보장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오미와 룻 이야기는 구약 신앙의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이 이야기를 읽거나 들으면서 그런 신앙 전통을 되새겼을 겁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을 믿고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간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단초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우리에게는 뻔한 스토리이겠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의 모든 운명을 거는 모험이자 결단이었습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며, 다른 하나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만 주어졌지 아무 것도 보장된 것은 없었습니다. 문화와 관습이 완전히 다른 가나안 토착민들과 어울려 산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섭리하시며 보호하신다는 믿음에 의지해서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세월이 흐른 뒤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집단적 경험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출애굽 사건입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랜 세월 살았던 이집트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것도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이집트를 떠난 뒤의 미래는 확실하게 보장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은 아직 손에 잡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광야 40년을 거치면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실망하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간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광야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든지 출애굽 당시에 20살 이상 된 남자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을 믿고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신앙전통을 아는 사람들은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에서 똑같이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을 겁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그들과 다릅니다. 성경 이야기가 아무리 감동적이라고 해도 거리가 멀게 들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들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집트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라는 여호와의 명령과 약속도 우리에게는 거리가 멉니다. 나오미와 룻 이야기는 가깝게 느끼기가 더 곤란합니다. 그녀들이 모압에 머물 것인지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것인지의 선택은 그들의 문제이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모압은 무엇이며, 베들레헴은 무엇일까요? 손에 딱 잡히지 않습니다. 제가 목사로 살기로 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목사가 아닌 방식으로 살았다고 해도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이나 아니냐 하는 기준으로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의 아내나 남편과 결혼한 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일까요? 아닐까요?
섭리 신앙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에 간 뒤에 어떤 일들이 그녀에게 일어났는지는 룻 2장부터 자세하게 나옵니다. 눈물겹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고, 낭만적이기도 한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룻기의 마지막 대목인 4:18-22절은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족보 이야기입니다. 룻은 여차여차하여 베들레헴의 유지에 속하는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오벳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나오미는 아기 오벳을 맡아 키웁니다. 오벳은 훗날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았습니다. 즉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급기야 마 1:5절에 그 이름이 올랐습니다. 만약 나오미의 두 아들이 모압에서 죽지 않았다면, 그리고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또한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설득당하여 고향 모압으로 돌아갔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개인도 그렇고 인류도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원칙적으로는 그게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꿀 수 없습니다. 빙하기의 도래를 우리가 막을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복지의 완전한 구현으로 사람들의 종교심이 줄어든다면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한다고 해도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줄어들 것이며, 교회는 내리막을 걷게 될 것입니다. 거꾸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로 인해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교회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개인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고, 어쩌다가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건강하게 태어난 사람도 있고, 병약하게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어떤 이는 가난한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납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운명과 사건과 역사가 우리를 엄습합니다. 그렇다면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일종의 숙명주의에 떨어져서 살아도 된다는 말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을 받아들이는 신앙은 훨씬 더 역동적입니다. 이 신앙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과 역사에 대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입니다. 인류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개인의 차원에서도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더 정확하게는 우리와 지구의 미래가 열려 있으니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개인의 실존이 우주 전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각자 숨을 쉽니다. 우리가 들이키는 숨은 태평양 무인도에서 온 것일 수도 있고, 몽고 초원이나 알라스카에서 불어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숨은 어떤 식물의 탄소동화 작용을 돕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숨조차도 지구와 우주 전체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도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브라질, 베트남, 콜롬비아 등, 가난한 농부들의 땀에 배어있습니다. 이 모든 유기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들은 종종 하나님을 가리켜 알파와 오메가라고, 즉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지난 수요 공부모임에서 읽은 사 48:12절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서 벌어지는 유기적인 생명 현상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러니 매 순간을 생명 경외의 심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영혼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나오미와 룻을 다시 보십시오. 그녀들은 가장 불행한 처지에 떨어진 사람들에 속했습니다.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손으로 자기를 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거칠게 저항했던 욥의 처지와 같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하나님의 섭리를 내다보았기에 절박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따금 흔들리기는 했겠지만, 방향만을 잃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운명을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오미와 룻처럼 비루한 처지로 떨어질까 노심초사하십니까? 예수님처럼 십자가 운명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십니까? 그런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저도 비슷합니다. 물신숭배의 이 시대가 이전투구와 같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설교자로서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현실(reality)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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