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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2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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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18.2.25 주일예배 설교 여의도순복음교회 |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장 25~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를 돌아볼 때, 우리의 생애를 지배하는 두 가지 사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떤 사상의 멍에를 짊어지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면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것과 죽는 것까지도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인 것입니다. 인간은 존재적 무거운 짐에 눌려 있고 살기 위해 수고롭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욥기 5장 7절에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은 원래 하나님께서 원하신 바는 아니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후에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셨고 그리고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피조물들이 안식을 누리며 살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고난 받고 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수고롭고 무거운 삶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인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는데 그때 처음으로 ‘수고’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 남자에게는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담을 쳐놓고 만나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죄와 더러움과 질병과 가난과 죽음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쉼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평안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짐이 넘치면 침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배입니다. 배에 적재 한계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선을 보고 짐이 한계를 넘지 않았는지 측정합니다. 만약 이 적재 한계선을 무시하고 더 많은 짐을 실으면 결국 배는 바다에 가라앉아 버리고 맙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인생의 짐이 계속 늘어나면 그 무게를 견디다 못하고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어있는 이혼이나 자살도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스트레스라는 마음의 짐이 쌓이고 쌓여 한계를 넘어갈 때, 문제가 터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을 위하여 짐들을 그대로 방치해 놓아서는 안 됩니다.
2.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은 인간의 죄 짐을 대신 지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한 이후,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쉼을 줄 수 없는 곳에 가서 쉼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물 없는 우물가에 가서 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위로를 얻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경치가 좋은 휴양지에 가서 쉼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영원하고 참된 쉼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쉼을 얻을 수 있습니까? 어거스틴은 “주님! 내가 당신의 품에 쉬기까지 나에게 참 안식이 없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은 목마르고 지친 인생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이 여인은 정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삶에 지친 여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장 14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영원한 생명을 얻고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로 잔치를 베풀 때, 친척이나 친구들을 선택해서 초청하는 사람들도 있고, 몇 십 명, 몇 명을 초청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 오라고 합니다. 선택적 초청이 아니라 “다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초청에 믿음으로 응하기만 하면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초청받는 것도 아니고, 가문이 좋기 때문에, 돈이 많기 때문에, 권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도 주님을 바라보고 나가면 무조건 주님이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참된 만족과 쉼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 있는 것입니까?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영혼의 잘됨이 먼저입니다. 영혼의 죄부터 청산해야 그 다음 사업도 건강도 좋은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잘 믿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유일하게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믿으면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10절에 “야훼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고 말씀합니다. 눈동자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눈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3중 보호 장치가 되어 있어요. 첫째로 위험한 순간이 닥치면 자동으로 눈을 감아서 눈꺼풀이 눈을 덮어 보호합니다. 또 눈썹과 속눈썹이 있어서 먼지와 티끌이 들어오지 않도록 막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눈물샘이 있어서 눈에 물질이 들어오면 자동으로 눈물이 나와서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눈동자처럼 여기시고 보호 하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됩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죄의 문제와 티끌이 우리를 삼키지 못합니다.
부모가 있는 자녀들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한복음 14장 1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어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한복음 14장 14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태복음 21장 22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필요한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로 구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필요한 것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시며 뿐만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한 통치자인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립보서 2장 6~7절)”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형체로 오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계획하고 싶은 대로 해봅니다. 하지만 시편 127편 1절에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지 않으시면 모든 수고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하시고 인생의 짐도 대신 짊어져 주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짐승에게 멍에를 메게 해서 짐을 끌 때, 새끼를 어미 밑에 같이 멍에를 메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은 여러분 일생의 짐을 자기가 다 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 짐을 예수님 목에 다 걸쳐놓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의로움이 되시는 것입니다. 죄를 다 대신 짊어지시고 의로움을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시편 68편 19절)”라고 시편기자는 고백합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고 동행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55편 22절에는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고 예수님을 거부할 것입니까? 아니면 손들고 항복하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할 것입니까? 선택은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내가 내 주인으로 살겠는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는가? 우리의 선택입니다. 세상의 멍에를 메면 고통이지만 예수님의 멍에를 매면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사람들이 죄의 짐, 질병의 짐, 가난과 저주의 짐, 그리고 죽음의 짐을 진 채 아무런 소망도 없이 고단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부활의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가 우리를 맑고 밝은 물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참 쉼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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