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아5:6-9 |
---|---|
설교자 : | 이상호 목사 |
참고 : | 공주세광교회 http://sk8404.or.kr |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아가서 5:6-9
2018. 4. 29, 오전
주중에는 판문점에서 우리 한반도에 아주 큰 역사가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잠시 베트남 다낭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진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특별히 야외나들이도 계획되어 있고 바로 진도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6)
늦게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보니 자기를 기다려줄 것으로 알았던 솔로몬 왕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이 나갔습니다. 혼이 나갔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은혜 받을 만한 때가 있습입니다. 기회가 나를 위해 항상 기다려 주는 것은 아닙니다. 기회가 언제나, 늘, 항상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일생에 기회가 몇 번 주어지는데, 그 기회를 잘 붙들고 선용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고, 목적을 성취할 수 있지만 그 기회를 상실해버리면 찾아온 복을 차 버리는 격이 됩니다. 찾아온 기회를 붙들지 못하여 영원히 실패자가 되어 후회하는 사람이 적잖습니다.
“저희가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호 5:6) 라는 말씀처럼 시간상 너무 늦게 찾아간 겁니다. 양떼와 소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아갔는데 만나지 못한 것은 이미 떠났기 때문입니다. 좀 더 일찍 찾아 가야 되는데, 좀 서둘러야 되는데, 느릿느릿하다가 여호와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 (잠 1:28-30)
이 말씀을 보면, 그 때에, 어느 순간에, 어느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를 것이다. 네가 암만 불러봐라 내가 대답을 하는지, 또 너희가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한다. 왜 만나지 못하고, 왜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아니합니까?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과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책망을 업신여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고 만나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만나주지 않을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이시고,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시는 분임으로 사람이 마음대로 하나님을 조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도서 3장에서 만사에 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 3:1-2)
술람미 여인은 문을 활짝 열어놓았지만 있어야 할 솔로몬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 신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혼이 나갔다고 했습니다. 정신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제서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너무 미적거렸구나! 내가 게으름을 피웠구나! 내가 너무 교만에 빠졌었구나!’하면서 자기 성찰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후회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늦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었습니다. 찾아나갔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찾고 부르는 애타는 심정을 보여 줍니다. 여기 있나 저기 있나 찾아도 만나지 못하였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여보! 여보!, 왕이시여! 사랑하는 자여! 하면서 피가 마르도록 불렀을 것입니다. 큰 소리로 불렀을 것입니다. 그래도 대답이 없습니다. 조금만 일찍 문을 열었으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를 일부러 찾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문만 열어주었으면 기쁨으로 만날 수 있었을 터인데, 문을 열지 아니하였고 교만에 빠져 있다가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뒤늦게 그림자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으로 찾아나갔지만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찾아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실수입니다. 기회를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축복을 스스로 놓쳐버린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시로 은혜 받을 시간과 공간을 주십 니다. 그 은혜 받을 때를 내 때로 만들고, 그 시간을 나의 시간으로 만들면 은혜를 받고 우리가 영적으로 풍성해지고 또 영적으로 성장하여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밀어버리고 그냥 외면해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영적으로 빈사 상태에 빠져 있고, 영적으로 고갈 상태에 빠져있는 참혹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찾아온 기회를 우선에 둬야지 차선에 두고 세상에 분요하면 영적으로 실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릴 때, 열어야 됩니다. 쌍수 들고 환영해야 됩니다.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섬중에서 순찰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가졌도다."(7)
이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불러도 대답은 없고 찾아도 보이지 아니하니 얼마나 기가 막히고 당혹스러웠겠습니까? 찾다가 순찰하는 자들을 만났고, 파수꾼을 만났습니다. 이 술람미 여자는 왕을 잃어버리고 별별 생각을 다 했을 것입니다. “내 교만 때문에 그렇다, 내 게으름 때문에 그렇다, 내가 착각을 했구나, 내가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내가 신랑의 마음을 너무 알아주지 못했구나.” 하고 말입니다.
여인은 자기 신랑을 잃어버리고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마음이 불안하여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으면 또 오겠지 하는 태연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찾아 나섰습니다. 그 분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분이 없다면 행복도 없고, 살맛도 없고, 살 이유도 없고, 헛된 인생이 될 것만 같아 찾아 나섰습니다.
찾아 나섰다가 순찰하는 자들을 만났는데, 이 순찰하는 자들이 자기를 쳐서 상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매를 맞고 몸까지 상했습니다. 그리고 파수꾼을 만났는데, 이 파수꾼이 길을 찾아주거나 사람을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웃옷을 벗겨 가버렸습니다. 이 여자는 뜻밖에 치욕을 당한 것입니다. 아마도 솔로몬 왕을 찾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고, 옷을 벗고 잠자리 준비를 하다 신랑이 없는 것을 알고 찾아 나선 것이니 옷이나 제대로 입었겠습니까? 그런 꼴로 실성한 여자처럼 사방을 헤집고 다니니 아마 미친 여자로 봤을 겁니다. 그러니 때리기도 하고 걸쳤던 옷까지 뺏어가 버렸나봅니다.
영적인 뜻을 찾는다면 주님을 잃고 살 때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비극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에게 얼마나 곤고함이 있고 비참한 상태에 빠지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잃고 살면 자유스러울 것 같아도, 이미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유가 있다 해도 행복한 자유가 아닙니다. 그 자유는 나에게 번뇌와 고뇌를 주는 자유입니다. 예수 없는 자유는 불행한 자유가 될 뿐입니다. 고장 난 브레이크를 모르고 질주하는 자동차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살 나던 해에 예루살렘으로 유월절을 지키러 갔었습니다. 절기가 끝나고 분주하게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 부모들은 아들 예수님을 잃어버린 줄 알았습니다. 얼굴이 사색이 되었습니다. 부랴부랴 잃은 예수를 찾기 위해 서둘렀습니다. 힘들게 사흘 길을 걸어온 것이 무효가 되었고, 애를 태우는 정신적 고통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예수 없는 인생은 성공 같아도 실패요 아무리 많이 달려간 것 같아도 원점일 뿐입니다. 하나님 없이 쌓았던 바벨탑은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지금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공든 탑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없이 세워진 탑, 세워진 문화는 결국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힘없이 주저앉아 버린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 문화가 찬란해 보여도 예수 없는 문화의 끝은 망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나는 그 찬란했던 로마의 폼페이가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현장을 보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보는 듯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사흘길 간 것이 헛걸음이 되었고 허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은 큰 근심과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아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헤아려보십시오. 그런가하면 사흘 동안 더 먹고 더 자고 얼마나 물질적인 낭비가 컸을까도 생각해봅니다. 이와 같이 잃어버려서는 안 될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니까 찾아온 것은 불행, 손해, 고통뿐이었습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모시고, 내 주인이 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인도자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보배가 되어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성도는 예수 없이는 아무런 회망도 기대도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떠나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멋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미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을 때 행복하지 예수님 떠나게 되면 비극의 시작일 뿐입니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흉년을 피해보겠다고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이주했던 나오미는 거기서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또한 아들 기론과 말론이 죽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나오미는 흉년을 피해 갔지만 결국 더 큰 흉년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땅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던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웃이 누군가에 대하여 설명을 하시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지만 영적으로 이해를 해본다면 예루살렘을 버리고 여리고로 내려가는 것은 강도를 만나 인격적으로, 물질적으로 손해를 볼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떠나 애급으로 내려갔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 아내를 아내라 하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아내를 누이라하여 왕에게 진상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떠나서는 안 될 땅이 있습니다. 버려서는 안 될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찾아온 신랑을 버림으로, 즉 찾아온 주님을 버림으로, 매를 맞고 치욕을 당하고 옷까지 빼앗기는 억울함을 당하게 됩니다.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할 때 진정한 행복인 줄 믿습니다. 주님을 버리고는 되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잃으면 영적 강도인 마귀를 만나 그 마귀가 우리를 노리개감으로 삼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셔서 나의 주님이 되어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지, 주님을 버리면 마귀가 나의 주인이 됩니다. 마귀는 속성상 아무리 자기에게 속했다 하더라도 축복을 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망하게 합니다. 또한 주님을 잃으면 우리에게 거짓 선지자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성도를 미혹하여 잘못된 길로 끌고 갑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두드릴 때에 주저하지 말고 그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살렙 딸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8)
아가서 2장 5절에도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이미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므로 병이 날 정도라면 그 사랑의 강도가 얼마나 높은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 로 병이 날 정도로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술람미 여자가 솔로몬 왕을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기다리다가 떠난 신랑을 만나기 위해서 불러도 보고, 찾아도 보고, 이 길 저 길 헤매다가 순찰자도 만나고, 파수꾼도 만나고, 찾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봅니다. 찾다가 예루살렘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너희에게 진심으로 부탁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 분을 너희들이 혹시 만나거든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병이 났다고 얘기 좀 해다오.” 하면서 애절한 부탁을 합니다. 술람미 여자는 솔로몬 왕이 너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심정을 솔직히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사랑하여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여인을 보면서 우리는 주님에 대하여 이렇게 뜨겁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살과 피를 다 주시기까지 사랑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전부를 주면서 사랑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놓고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얻기 위해 보이는 세상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우리는 전부를 다 내놓고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믿음이 없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에 대하여 큰 사랑, 깊은 사랑, 둘도 없는 사랑, 다시없는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해서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내 전부를 드려 주님을 위해 살아가렵니다.” 이런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 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녀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9)
8절에서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들한테 정말로 부탁한다. 내 사랑하는 자 만나거든, 내 신랑 만나거든, 나의 그이 만나거든, 내가 너무너무 사랑해서 병이 났다고 애기 좀 해줘” 그러니까 이 여자들이 뭐라고 얘기하느냐.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왜 우리에게 부탁을 하는가?" 라고 말합니다. 즉 그 남자가 다른 남자와 비교해서 뭐가 그렇게 좋아서 사랑에 열병을 앓고 푹 빠졌느냐? 는 것입니다. 그 여자가 뭐가 그렇게 좋아서 그 여자 아니면 못살겠다고 안달을 하느냐? 그 남자가 뭐가 그리 좋아서 그 남자 아니면 시집 못가겠다고 앙탈을 부리며 독약까지 먹어가며 난리를 피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 남자 아니면 나는 죽어도 시집안가!, 그 여자 아니면 나는 죽어도 결혼 안 해!" 하면서 쥐약도 먹고, 수면제도 먹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상대에게 완전히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취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제 삼자가 볼 때는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긴 것도 그렇고 몸매도 그렇고, 배운 것도 그렇고, 도저히 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자기 둘은 죽고 못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이 우리를 볼 때는 다 미친 사람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교회에 빠져 있느냐? 왜 그렇게 예수에 미쳤느냐? 하면서 비난을 하면서 믿는 사람들을 이해를 못합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회에 참여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새벽기도를 늘 하여 습관이 된 사람은 안하는 게 더 힘듭니다. 기도의 맛을 본 사람이나 맛을 아는 사람은 그 시간이 가장 즐거운 시간이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주일 낮에도 나가고, 주일 밤에도 나가고, 수요일 밤에도 나가고, 금요 구역에도 나가고 집안일은 언제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의 질문입니다. 예배의 축복, 예배의 행복을 아는 사람은 아무리 바빠도 그 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그 말에 귀를 막고,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쳐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나는 한시도 못 산다는 신부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너희들이 어찌 우리를 알랴. 너희들이 어찌 이 깊은 속마음을 알랴. 나는 누가 뭐래도 주님 없이 는 살 수 없다” 이런 믿음의 고백과 함께 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