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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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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2장 1절-7절.
1절-5절: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 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 되었더라.
가이사 그 때 당시로 보면 세계 최대 강국 로마. 예, 왜 그 명령을 했을까? 호적 하는 그 속에는 사람의 수를 세는 게 있지요? 그럼 세금이 또 부과 되겠지요? 세금이 부과되면 또 로마 강대국의 보호를 받게 되겠지요? 역사는 그렇습니다. 근데 왜 그 역사를 기록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 주시려고 하시느냐?
오늘날 이방 세상사람들과 기독교 사회에서 교회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예배시간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방 세상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세상을 취하려고 하고, 이 말세의 기독자들은 예수이름 가지고 세상을 취하려고 하니 그 속에 들어있는 중심사상은 똑같다. 이방종교인들도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불러가지고 자기 집에 복이 들어오라고 그렇게 빌고 있지요? 오늘날 기독자들이 예수 왜 믿느냐? 자기 집에 복이 들어오라고 세상 복이 들어오라고. 그러니까 속중심이 똑같다 그 말이요. 구하는 것이 그 질이 똑같다 그 말이요. 그게 이제 누구의 명령이냐? ‘네가 예수 믿으면서 중심사상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으며 어디에 중심사상이 그 입장에 서 있느냐?’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는 그 때 호적을 어디로 하러 가지요 자기 고향? 자기 고향은 어디냐?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 떡집. 예,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사상은 말씀의 집, 그 신앙노선으로 올라가는구나. 오늘날 자기에게 크고 작은 사건이 오면 자기의 생각과 마음이 어디로 가더냐? 그걸 보여준단 말이요.
그래서 자기가 예수를 어떻게 믿었던 무슨 소리를 듣고 예수를 믿었느냐? ‘병 낫는다’ 그 소리 듣고 예수 믿었느냐 세상축복 받는다는 그 소리 듣고 예수 믿었느냐? ‘들어가도 복 나가도 복’이 누가 중심입니까? 누가 들락날락 하는 거요? 사람이 들락날락하지. 사람이 문제지. 나가도 복 사람이 들어와도 복. 사람이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졌다 그 말이요. 그게 그렇게 들어 있잖아요? 근데 물질적 복으로 생각을 하면 그냥 교회 다니는 것. 신비주의 교회 다니든 구복주의 교회 다니든 구국주의 교회 다니든 은둔주의 교회 다니든 세상 속화된 교회 다니든 그냥 교회만 다니면 그냥 복 들어오는 줄 알고 있어요. 세상이 가득 부풀어가지고. 그게 어떻게 복 받을 사람이요?
사람 자체가 인격 면에서 재앙이 들어가 있는데 나가도 재앙 들어와도 재앙. 왜 들어와도 재앙이요? 사람의 성격과 성질이 안 고쳐졌으니까 집에 들어와도 스트레스 나가도 스트레스. 그럼 자기 스트레스 받아줄 사람이 어디 있어? 세상천지에? 그 딴 사람도 다 그 모양이니 맞닿으면 와그락 싸울 거 아니요? 들어와도 싸우고 나가도 싸우고. 맞잖아요? 돈 있으면 기분 좋아하고 돈 없으면 싸우고. 뭐요? 사람이 문제로구나. 이거 사람이 문제로구나.
아합의 집 족속이면 북조로 갈 것이고. 그렇지 않은가 그 말이요? 헤롯의 집 족속이면 에돔으로 올라갈 것이고. 어떤 사건이 오면 그렇다 그 말이요. 자기 속에 들어있는 걸 못 속여요. 그걸 미리 성경으로 가르쳐주고 있으니 너는 이제 다음부터 사건이 오면 어디로 가라?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올라가야 된다. 말씀 붙잡고 올라가야 된다.
그 모압 족속 모압 암몬 족속 이 룻이 어려운 일이 왔을 때에 시어머니가 ‘네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랬지요? 근데 동서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 룻은 어디로 올라오는 거요? 베들레헴으로. 베들레헴으로 올라오는 룻의 그 발걸음이 생애의 그 발걸음이 그냥 ‘베들레헴 고향 갔다. 다윗의 고향 찾아올라왔다. 며느리로서’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니고 다윗의 고향으로 올라오면 이방여자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 베들레헴 사람들에게서 무슨 말이 안 튀어 나오겠냐? ‘시아버지 잡아먹은 며느리라. 남편 잡아먹고.’ 또 누구 잡아먹었어? 지금도 그런 가정이 없나요? ‘며느리가 뭐 잡아먹었다. 뭐 잡아먹었다. 재수 없다’ 이러고. 그런 가정이 많다. 그 각오하고 올라오는 거요. 돌을 던지더라도 각오하고 올라오고. 그 가정에 기둥이란 기둥은 다 죽어버렸어. 어디로 올라가야 되느냐? 참 그런 신앙이 쉬운 것 같으나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이니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는 동리로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그 한 사건에서 신앙의 본질을 생각하는 겁니다. 신앙의 본질. 어려운 일이 온다고 하는 것은 다른 각도로 보면 영의 눈으로 보면 ‘그래, 네 신앙의 근본을 밝혀라.’ 사건이 와서 ‘어디로 갈 거냐? 네 출처를 밝혀라. 너의 소속과 입장을 밝혀라’ 그러면 자기 속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그 사상대로 간다는 말이요. 이건 못 속인다. 잘 믿는 척해도 못 속인다. 그건 나중에 드러난다. 사건이 없을 때는 다 잘 믿는 것 같고 해도 보통 보면 자기의 육신의 세상살이 이것을 따지면서 찾아간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요셉은 다윗의 집 자손인고로 하나님의 약속의 범위 안에 즉 자손인고로, ‘자손’ 그러니까 다윗에게 한 약속의 범위 안에 들었다 그 말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집 베들레헴, 떡집이니까 베들레헴이 떡을 많이 팔았나? 역사적으로 떡집이 많았었나? 예, 이름의 의미가 떡집이라. 그 말씀의 집, 다윗의 고향 다윗의 신앙노선을 찾아간다는 말입니다.
헤롯의 난을 만나서 애굽으로 도망갈 때에 밤중에 일어나서 애굽으로 도망갈 때에 요셉과 마리아가 어린 핏덩어리를 안고 밤중에 애굽으로 도망갈 때에 애굽으로 가면 코브라도 많고 악어가 많잖아요? 그 험난한 길을 그 말이요. 누구의 신앙을 생각하면서 갔을까요? 신약시대 요셉이 구약시대 형제들에게 팔려가는 누구의 신앙사상을 생각하면서 갔겠느냐 그 말이요. 요셉. 신약시대 요셉이 구약시대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가는 그 요셉의 그 신앙사상.
그런데 그런 사상을 갖기를 원하는데 문제는 현실에서 사건 환경과 인인관계성에서 이게 잘못된 것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거기에서 착각들을 하면 안 된다. 믿는 자로서의 인인관계 성도끼리의 인인관계 성도가 그 누구에게 은혜를 많이 입었으면 생각을 해야 된다. ‘이스라엘아’ 그 뭐요? 에돔 길을 갈 때 하나님이 뭐라 그랬어요? ‘에돔을 쳐서 없이하라’ 그러면서 갔어요? 뭐라 그랬어요? 혜택을 입은 곳에는 하나님께서 치지 말아라.
그런데 신앙으로 되어져야 할 그 인인관계성에서 혜택을 받고 신앙으로 인인관계성으로 되어져야 할 그 면에서 일반적 은혜를 받았으면, 일반적 은혜도 알아야 합니다. 이 성경에 있단 말이요. 그런데 그걸 모르고 탁탁 끊어놓으면 자기가 나중에 어려울 때에 어디 가서 도움을 받겠느냐? 생활의 분야별에서 이렇게 가만히 생각을 해봐라. 이를테면 도와줄 만도 한데 왜 안 도와주려고 그러느냐? 왜 그랬냐? 그 원인은 어디 있느냐 그 말이요? 그래서 나가도 복 들어와도 복이란 그 말이 어디서 나오는 소리냐? 자기가 잘못 깨닫고 믿음 신앙하는 것은 좋은데 그 믿음 신앙하는 것이 인인관계 속으로 들어가도 있는 거다. 말만이 아니다. 말만이. 옛말이 있지요? 사람이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고 그럽디다. 말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들고 풀어지게도 만들고.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 된다. 자기 고집만 하면 안 된다.
다윗의 신앙사상을 가진 후손은 베들레헴을 찾습니다. 말씀의 집을 찾는다 그 말이요. 거짓 종들이 많고 이단자들이 많은 이때에 말씀의 집을 찾아간다 그 말이요. 근데 보통 보면 건물을 보고 들어가고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들어가고 일가친척 부모형제 인정정실로 찾아가고 자기의 장기 풀어먹으려고 찾아가고 취미생활로 찾아가고 자기의 업을 벌릴 곳으로 찾아가고. 식당업이나 교인 많은 데로 찾아가야지? 그 업을 하는 사람들은? 맞잖아요? 다단계판매 하는 사람은 사람이 많은 데로 찾아가야지. 맞잖아요? 보험아줌마도 사람이 많은 데로 가야지? 그럼 어느 곳으로 가든지 장사가 자기 딱 하나밖에 없어요? 크면 큰 데로 수없이 많고. 그럼 서로 잡아당기는 거요. 서로 잡아당기는 것. 교회가 그 판이 돼버렸어. 말씀과는 상관이 없어.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에 보면 바벨론 이 큰 성 안에 바벨론이 심판을 받았어. 이게 교회를 말하는 거요. 큰 심판을 받아서 불에 타지니까 금은보화 장사꾼들이 앉아서 대성통곡을 하고 울어요. 왜 우느냐? 불에 타져서 자기가 장사할 그게 없어졌단 말이요. 그래서 ‘어찌 살까’ 하고 우는 거요. 오늘날 교회가 그 판이 돼버렸어.
여기 우리교회 옷 장사는 없나? 사람이 많다 보면 교인들끼리 모이면 큰 집 한 채 지어요. 그 안에 별별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러면 식당업을 하는 사람들은 음식 팔아가지고 헌금내서 쓰고 보험아줌마들은 각 곳으로 다니면서 ‘보험 들어라’ 그래가지고 또 돈 가지고 와서. 그럼 한 번 생각을 해봐요. 재밌겠지요. 그런 머리를 목사가 또 쓰고. 안 쓸 줄 알아요? 어느 교회단체는 그 신협인가? 그 어디서 하는 거요? 구원파에서 하는 거요? 또 어느 교단에서는 신문사 하고. 뭐 한두 개가 아니다. 이단자들도 그런 수를 다 쓰는 거다.
자식의 학교성적을 위해서는 죽으라고 신경을 쓰면서 영원히 가는 신앙실력을 걱정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아이가 장차 자라면서 주님이 보내신 평신도든 직을 가졌든 목사든 아니든 간에 이 언행심사로서 많은 사람이 주님을 맞을 수 있도록 누가 그렇게 키울까? 누가 그렇게 키울까?
자기 속에서 가이사의 명령을 따라가면 자기의 일생 삶의 전폭은 가이사 사상에게 노예가 되는 것이고 생명말씀을 생명의 떡을 먹으면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이 되고 영능의 실력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부모부터 생명의 말씀을 먹지 못하고 있다면 부모가 그 자식을 어디로 인도하겠느냐? 집에서부터 가이사의 부모다. 벌써. 안 그렇겠느냐 그 말이요. 가이사의 사상을 가지고 가르치고 있으니까. 다윗의 사상을 가지고 가르치느냐? 그건 아니다. 다윗의 사상 속에는 어떤 사상이요? 전부가? 세상을 탁탁 끊는 초절주의 사상이요? 하나님께 대한 본질적인 신앙사상으로 적중성으로 들어가지 않는 신앙사상은요 그 자유 같으나 가만히 보면 탁탁 막혀있어요. 탁탁 막혀있어요.
지금 천하인간이 세상이라는 가이사의 명령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자기는 어떤 명령을 따라 살고 있어요? 교회 다니니까 그냥 ‘예수 믿고 산다’ 그러지요? 자기 속에 그 정신과 사상이 있는데 그게 누구를 따르고 있느냐? 세상을 따르고 있느냐 마귀를 따르고 있느냐?
광야교회에서 무엇을 따라서 밤이고 낮이고 갔습니까? 낮에는 무슨 기둥?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그걸 따라간다. 우리에게 말하자면 다른 각도로 말하자면 진리와 영감으로. 모세라고 하는 종은 하나님의 말씀성을 가르치고 인간은 구름과 불기둥으로 보호를 입으면서 그 인도를 따라가는 거다.
자기 스스로 가만 생각을 해봐요. 자기 속의 좁은 두뇌 속에 생각 마음 이해타산 취미 추구성 그것이 질이 있는데 자기 속에 있는 그것이 안 믿는 사람의 것으로 많이 들어가 있는 건지 예수님의 것으로 많이 들어가 있는 건지 그 알 수 있잖아요? 예수 믿으면 제발 좀 머리통 속을 심사를 해라.
다윗의 집 자손은 요셉을 따라 유대 안으로 베들레헴으로 가더라. 신앙사상이 그렇다는 말이요. 이제 베들레헴으로 두 부부가 호적 하러 갑니다. 같은 소원목적이니 같이 올라가지요? 같은 소원목적이니 같이 올라간다. 근데 이 세상살이를 가만 보면 같은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들 싸웁니까? 그렇게들 싸워요. 옳은 진리로 같이 안 간다면 너는 불 보듯 뻔하다. 맞잖아요? 진리로 하나 되지 못하는데 딴 것으로 하나 되냐? 아니요. 그건 하나가 아니고 조건부로 들어가 있는 하나처럼 보이는 거다. 환경에 따라서 서로가 자기 마음에 맞으니 좋은 것을 생각을 하나 그 조건부는 전부 다 세상바람 불면 이게 변질되고 변화되는 거다. 변질성으로 변화돼버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특히 교회 인도자의 부부, 예수님은 같이 믿는다 하면서도 소원목적 하는 것은 전혀 길이 다른 것을 볼 수가 있더라. 이래가지고 자녀 속에 신앙사상이 어떻게 바로 들어가겠느냐? 안 들어간다. 못 들어간다. 그러니까 몸은 하나라도 자녀 속에 생각이 싸우는 거요.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호적 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어. 하나님 앞에 처녀는 어떤 것이 처녀냐? 일반적으로 처녀는 어떤 것이 처녀요? 아직 결혼하지 않은 것. 시집가지 않은 것. 애인은 있더라도 겉보기에는 처녀지. 근데 마음속에는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증거가 되는 것이지요.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근데 문제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느냐? 그게 또 문제요. 사랑도 질이 있어요. 물도 좋은 물이 있고 썩은 물이 있어. 썩은 물에는 모든 벌레들이 일어. 정신 속에 그 사랑이라고 하는 더러운 것으로 질이 되어있다면 그 속에는 오만 벌레가 일고 있다. 사람을 못 견디게 만드는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일을 저질러 놓는 그런 벌레들이 안에 들어있다.
겉으로 보면 처녀인데 세상의 소원목적이 잔뜩 들어있는 처녀라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중심으로 보시는 그 눈을 가지고 보면 이건 처녀가 아니다. 세상하고 시집가 버렸어. 마음이 세상을 품고 있거든? 진짜 처녀는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처녀는 속에 아무 것도 없다?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잉태되어 있다.
그래, 이게 옷 얘기가 났으니까 자기가 높은 사람 만나러 갈 때에 입는 자세가 있잖아요? 그 있잖아요? 그런 마음을 가져야지. 요즘 이게 젊은 애들은 특히 가만 보면 솔직히 말해서 여자들이 안방에서 입을 옷을 바깥으로 입고 나와요. 참 이거 내가 칠십 년을 살아오면서 느낀 대로 말하자면 여자들이 몸이 자꾸 이렇게 살이 나오면 특히 여름날 살이 나오면 사람이 더워요. 알겠어요? 보는 사람이 덥고요. 그 전철 간에서 사람이 많아가지고 이렇게 닿으면 기분이 나빠요. 어떻게 기분이 나쁘냐? 뱀 껍데기 만지면 찐득하게 들어오는 그런 느낌이 있어요, 그리고 죽은 송장을 만지면 끈적끈적한 그 느낌이 있어요. 되게 기분 나빠요. 그리고 햇빛 났다고 벗어버리면 사람이 살이 타고 그 더 더워요. 옷을 입어야 된다.
그리고 교회 오실 때는 아무렴 남자들은 정장 있으면 장가갈 때만 입으려고 하지 말고 이미 장가간 사람은 결혼 때 입었잖아. 놔둬봐야 소용없어. 장가가면 이제 조금 있으면 옷을 다시 해야 돼. 몸이 불어나든지 아니면 살이 빠지든지 하니까 괜히 옷 놔두고 생생한 옷 버리지 말라고요.
내가 해미에서 목회할 때에 양복을 해서 입었는데 버린 지 몇 달 안 됐지? 그 몇 년 동안 입은 거요? 한 삼십 년 거의 양복을 그렇게 입었어. 이제 나이가 드니까 배가 이렇게 조금 나와요. 복부에 살이 차더라고. 나이 들면 다 그런가? 내가 비정상인가? 27을 입었는데 28, 30. 지금 32를 입어요. 보기는 이래도 내 허리가 이렇게 굵은가? 내가 볼 때는 거울 앞에서 날씬해 보이는데 32요. 우리 이OO목사님, 허리둘레 몇 인치요? 34? 나도 곧 따라가겠구먼. 그래, 그 바지를 최대한 늘리니까 뒤에서 실밥이 터지는 거요. 그래서 아깝지만 내버렸어.
어쨌든 신발 옷 입는 거 확실히 달라요. 정장한 거 하고요 교회 오면서 슬리퍼 끌고 런닝 팔 없는 거 입는 거 하고 한 번 생각해 봐요. 그 예비군 훈련 받을 때 예비군 군복 입잖아요? 그럼 그 전 그런 게 나오는 거라. 예비군 옷을 입으면 이상하게 그거. 그리고 예비군들 모인 사람들이 그래요. 옛날 군대시절 그런 게 들어있어서 그런 게 나와요. 신사복 입으면 그럴 수가 없는 거거든. 이게 뭘 말해주는 거냐? 기독교인이 참 진리의 예수님의 옷을 입으면 품행이 단정해진다. 틀림이 없다.
우리 남자들 옷 입고 아무데고 푹푹 앉아요? 앉아도 불고 앉고, 무릎 나올까 상당히 신경 쓰지요. 근데 옷을 이상하게 입으면 이건 그냥 함부로야. 런닝 같은 거 입지 말아요. 어디 들판이나 그냥 집안에서 입는 정도지 방에서 누가 정장 입고 있는 사람 없잖아요? 조심해요.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그 사람의 옷 입는 태도를 보아서 그 사람의 정신이 드러난다. 못 속인다. ‘안 그렇다’ 그러지 말아라.
많은 사람이 있을 때에, 잠자리에 있을 때에, 일할 때에 그 여러 가지 옷이 있잖아요? 근데 없다면 말 안 하겠지만 지금은 웬만하면 그렇게 옷 못 입을 정도로 못 사는 건 아니더라. 자기 품위가 드러나는 거다. 품위가. 아가씨가 아닌 말로 정장을 딱 하고 걸음걸이도 예쁘게, 이 신발 신는 것도 구부려 신어서 달달달달 끌고 이렇게 하면 참 보기 흉하다. 신발이 나쁘면 발도 이상해져 버려요? 오래 신으려고 큰 신발 사지 말고. 사람 이상해져 버려. 옛날하고 달라. 하도 옛날에는 없었으니까 그랬지만 지금은 자기 몸에 맞게.
그리고 참 여자분들, 공통인지 아닌지 그건 모르겠어요. 뚱뚱한 사람일수록 이게 날씬하게 보이려고 옷을 꽉 조이니 살이 어디로 튀어나가겠어요? 어디로 튀어나가겠어요? 더 사람이 우스꽝스러워지는구나. 그러지 말고 자기 몸이 뚱뚱하면 뚱뚱한데로 할랑하게 입고, 그리고 이 젓가락 같은 사람이 자기 날씬한 것을 드러내려고 이게 내복도 아니고 착 들어붙는 것을 입어놓으면 그게 사람으로 보일까요 미이라로 보일까요? 그 왜 그렇게 힘들게 다니는지? 다른 것보다 청바지 꽉 낀 거요 안 들어가는 거 펄쩍펄쩍 뛰면서 입었다 합시다. 벗을 때 그게 그냥 쑥 벗어지는지 알아요? 얼마나 애를 먹는지. 반대편에서 한 사람이 잡아 빼야 돼. 더더군다나 청바지에 물까지 묻어 봐요. 정말 잘 안 빠져요. 약간 바람이 통하면 시원하고 겨울에는 훈훈하고. 더운 바람이 속에서 돌기 때문에. 날씬하게 보이려고 착착 붙여놓으면 얼마나 추운지 몰라요.
옷 입는 거 신경을 잘 쓰세요. 하나님 앞에 마음을 바로 가져야지. 어디 가서 뭐 하나님이 제일 귀하시고 은혜 받는 마음 바탕. 그리고 이게 뒤가 잘 덮여질 수 있도록 옷을 그렇게 입고. 여자들이 배꼽 나오고 이게 히프 나오면 참 보기 흉해요. 그거 다 안방에서 해. 사람이 거울 볼 때에 뭘 보는 거요? 외모 외형. 뭐 묻었나? 안 묻었다. 바로 되었나? 이런 거 보는 거지요. 성경은 왜 보는 거지요? 마음이 바로 되었나? 정신이 바로 되었나? 그게 있지. 제발 좀 일찍 일어나서 머리 감고 확 말려가지고 오고. 냄새 나게 오지 말고. 그런 게 다 예수 믿는 바로 믿고 잘 믿는 그게 안에 다 들어있는 거요. 안 그러면 나처럼 (머리를)이렇게 다 깎아버리든지.
6절-7절: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맏아들을 낳아 어디에 뉘였느냐? ‘맏아들’ 하는 거 보니까 또 그 다음 아들을 연상할 수 있는 말 아닌가요? 그렇지요? 맏아들 이게 참 사람들은 굉장히 귀하게 여기지요? 굉장히 귀하게 여겨요. 대우를 많이 하고. 없이 사는 가정에서 옛날에는 어머니와 딸들은 순 보리밥이나 비지밥이나 콩밥이나 먹어도 그 아들은 쌀밥 이렇게 해서 아버지하고 같이 주지요? 그렇게 기른 아들 지금 어찌 다 되었는지?
구유에 눕힌 것은 사관에 있을 곳이 없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보니까. 그 사관이 여관 아니요? 있을 곳이 없다? 그 말이 돼요? 첫째는 장소적으로 있을 곳이 없었다는 겁니다. 모든 손님들이 방을 다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하룻밤 인생이지만 더 편하게 즐겁게 지내다 가나?’ 웃돈을 더 주고서라도 손님이 많으니까 이제 좋고 편안한 방을 차지하는 것이더라.
여관집 주인에게 요셉이 마리아를 데리고 가서 산통이 오는 것을 보여주면서 사정을 안 했겠느냐?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돈이 없어 보이거든. 방이 없다고 합니다. 방이 있는데도 없다고 했는지? 그리고 그 방안으로 들락거리는 손님들은 이 요셉과 마리아, 산통이 오는 이 마리아 모습을 안 보았겠느냐 그 말이요. ‘나는 아무데서나 자도 좋으니 내 방을 쓰십시오.’ 궁극교회 교인들이 그 때 있었더라면 다 그랬을 거야. 안 그랬을까요?
여관집 주인의 머리통 속에는 ‘큰 방은 몇 명 들어가고 작은 방은 몇 명 들어간다. 1층 몇 호실은 몇 명 2층 몇 호실은 몇 명.’ 사람의 머리수와 돈 계산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 요셉과 마리아의 마음속에는 어떤 반응이 일어났을까? 주인이 그런 것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 주판 갖고 돈 계산하고 요셉과 마리아가 사정하는 소리는 듣는 척 마는 척 하면서 그 말이요. 요셉은 마리아를 원망 안 했을까요? ‘이상한 여자가 어디 가서 애기를 배어 와서 사람 생고생 시킨다’고 안 그럴까요? ‘하필이면 이 때 아기를 밸 것이 뭐냐’고 그러지 않겠냐? ‘나의 아기도 아닌데 내가 왜 이 고생하나?’
아닌 말로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정말 말씀이 잉태된 것이 아니란다면 나 같으면 내버리겠어. 뭘 괜히 남의 여자를 내가 왜 데리고 다녀. 남의 애기를 배고. 안 그렇겠느냐 그 말이요? 마리아는 그 원망불평 소리를 듣고 하는 말이 ‘성령께서 날 잉태시켰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소?’ 허허. ‘돈도 못 버는 목수인 주제에 돈이 없으니까 나를 이 고생시키지. 남자라고 원’ 하면서 혀를 차고 돌아가면 이게 어찌 됐겠나? 그런 장면에서. 마리아는 요셉을 보고 ‘내가 그래도 당신을 구제해준 줄 알아라’ 그러고 또 요셉은 애기 밴 마리아를 ‘내 애기도 아닌데 내가 당신을 구제했어. 누가 당신을 데리고 살겠냐?’ 또 이러고. 그러면 이게 어찌 되겠나? 그게. 요셉은 마리아를 마리아는 요셉을 원망불평, 또 하나님을 원망불평, 또 세상을 원망불평, 또 여관집 주인과 그 손님들을 원망불평 할 만하지 않을까? 사람의 그 마음을 이렇게 가만히 본다면.
애기는 곧 나오려고 하니 찾은 곳이 마구간이더라. 마구간으로 가니 말이 고개를 숙이면서 ‘어서 오십시오.’ 사람들은 못 알아보았지만 짐승은 본능적으로 알아보겠지요? 그래, 짐승이 말은 못하고 그래도 마른 지푸라기 있는 그 자리를 쓱 비켜주면서 짐승은 자기는 똥 눈 자리로 가고. 그 참 감격스럽지 않을까? 정말 그런 장면이 있다면.
왜 사관에 있을 곳이 없었느냐? 신앙 사상적으로 말하자면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두 세상소원 목적적으로 사느라고 그 정신 사상 틈으로 사람들마다 전부 세상정신 부자 소원목적으로 세상이 잔뜩 들어있지. 그래서 그 틈으로 생명이신 진리가 들어갈 틈이 없구나. 그런 면도 보이는 거다. 자기 머리통 속에 진리가 안 들어오지요? 진리 들어올 틈이 없지요? 그런 느낌도 안 듭니까? 도시사람 시골사람 그 머리통 속에는 가이사의 소원목적이 꽉 들어차 있더라.
신앙사상과 인인관계성으로 보자면 여관집 주인이나 손님들이 예수님과 연관관계를 잘 맺었습니까 못 맺었습니까? 여관집 주인과 그 손님들이 구주 예수님과 연관관계를 잘 맺은 거요 못 맺은 거요? 못 맺었어. 어떻게 못 맺었느냐? 진리를 버리고 사람을 취했으니. 맞잖아요? 구원을 버리고 돈을 취했으니 생명은 내어버리고 세상 옛사람은 살찌우고. 그러니까 그들 모두 다 가치판단 평가를 잘 한 셈입니까 잘못한 셈입니까? 잘못했지요? 자기의 구원을 개개인적으로 보면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자기의 구원을 자기를 구원하러 온 그 주님인데 자기의 구원을 마구간에다가 버린 셈이다. 영의 눈이 어두우면 사건 상황에서 자기의 구원자를 버리게 된다고 하는 것도 알아야 된다. 이렇게 되면 믿는 자기의 상급은 없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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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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