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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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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19년 설집회 |
설 집회. (19. 2. 6)
1장 20절-2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다섯째 날에는 궁창에는 각종 새가 날게 하셨고, 물에는 각종 물고기가 살도록 하셨다. 새도, 물고기도, 나무도, 채소도 많은 종류가 있고, 동 동류인데도 또 각기 나눠진다. 그래서 동 동류인데도 각기 또 다른 점이 있는데, 이것을 볼 때 ‘이것보다 이것이 더 좋다. 이것보다 저것은 더 나쁘다’ 하고 선택을 하려면 구별 분별이 나와야 함을 알 수 있다. 이 지식이 정확하지 못하면 많은 손해를 본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다 만들어 놓으시고 좋으셨다고 하신 것은 만족성을 말한다. 좋으신 이유는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이룰구원에 인격적인 면에서 깨닫고 만들어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우리의 구원에 좋도록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깨닫고 만들어져야 하는 건데 이런 마음은 없이 자기 위주로 돌아가니 이것이 타락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욕먹을 일을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처럼 영광자 존귀자로 만들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사니 불평불만이 많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우상을 섬기고,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신당을 만들어 놓고 공을 드리고 있다. 그러면 우상을 섬기고 공을 드리면 뭐가 나오는 거냐? 허망한 것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해서 문화 문명이 발전이 된들 뭘 할 거냐?
우상을 섬기는 나라는 미련하다. 그리고 미련한 나라일수록 이기주의가 많다. 인도나 파키스탄이나 중앙아시아 쪽으로 죽 보면 우상이 참 많다. 이런 나라의 왕들은 돈을 몇 조씩 가지고 있고, 비행기로 어디를 가면 금으로 된 의자나 변기 등을 가지고 간다고 한다. 그리고 비행기 바닥을 까는 것도 금으로 됐다고 한다. 이게 사람이냐? 이게 인도자냐? 나라의 지도자가 백성을 사랑한다면 백성의 생활정도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냐? 돈을 가지고 큰소리 치고 있다. 세상은 그렇다.
하나님께서 각종 씨 맺는 채소, 과목, 즉 열매 있는 나무 등을 나게 했는데, 이 채소와 과목들이 바위 위에 심겨져 있느냐, 좋은 땅에 심겨져 있느냐? 이걸 잘 봐라. 씨가 바위 위에 떨어지면 뿌리를 내릴 데가 없다. 씨는 생명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은 땅에 떨어지면 뿌리를 내리게 되어있는 것이 씨다. 이게 이치다. 땅에 뿌리를 안 내리면 죽는 거고 새들이 집어먹는 거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만능이시라. 교인들마다 신앙의 정도의 차원이 좋은 땅도 있고, 가시밭도 있고, 돌짝밭도 있고, 길가 밭도 있다. 같이 여기에 앉아있지만 다 이런 상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신지라 마음바탕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땅으로 되어있으면 생명의 말씀이 씨앗이 되어서 빨리 뿌리를 내리고 빨리 움이 트고 믿음이 빨리 자란다.
다섯째 날에는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했고, 하늘에는 새가 날게 했고,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를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새는 새대로, 물고기는 물고기대로 사는 구역을 정하시고, 그곳에서 각기 활동을 하며 번성을 하도록 해 놨다. ‘살기 싫더라도 그곳에서 살아라’가 아니라 그곳에 살기 좋도록 해 놓은 거다. 그래서 진화론 같은 건 들어갈 수가 없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화론을 무시하고 있다.
새들의 활동무대, 즉 생활무대는 궁창이다. 하늘이라고도 하는데, 이 하늘은 공간이다. 하나님께서 새들이 사는 무대를 이렇게 정해주셨다. 정해주셨다는 것은 그 생물의 생태에 그곳이 딱 맞도록 해 놓았다는 의미다.
그러면 궁창을 만들어 놓고, 공간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새가 날도록 했는데, 높은 공간일수록 큰 새가 날겠느냐, 작은 새가 날겠느냐? 큰 새가 난다. 반면에 작은 새는 작은 공간에서 살도록 활동무대를 만들어 놨다. 마찬가지로 큰 물고기는 깊고 큰 물에서 번성을 하고 활동을 하며 살고, 작은 물고기는 얕은 물, 또는 바위가 많고 해초가 많은 곳에서 번성을 하며 활동을 하게 만들어 놨다.
하나님께서 지구를 왜 둥글게 만든 것일까? 지도를 보면 둥근 지구의 한 쪽 옆에 대한민국이 달려있는데, 지도대로 본다면 우리가 지금 옆으로 앉아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방이 궁창이기 때문에 하늘이 보이는 거다. 참 신비롭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더운 물은 위로 올라가고, 찬 물은 아래로 내려오도록 자연법칙을 만드셨기 때문에 대류가 계속 회전을 하되 다른 천체의 자연법칙들도 만드셔서 사시사철이 생기도록 하셨고, 이로 인해 바다에는 조류가 생기게 되고, 고기들은 이 조류를 타고 자기가 살기에 맞는 온도를 찾아서 살고 있다. 참 신비롭다. 강물도 보면 찬 곳이 있고, 더운 곳이 있어서 강에서 사는 물고기들도 생태적으로 자기에게 맞는 곳을 찾아서 살도록 해 놨다.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물고기의 형태를 보면 그 모양새가 천차만별이다. 입이 아주 큰 고래가 있는데, 입이 크면 큰 고기를 잡아먹어야 할 텐데 세우 떼들이 많은 곳에 가서 물을 마시면 그 큰 입으로 물을 따라 새우가 들어오면 아가미에서 걸러서 먹는다. 이 큰 고래는 입이 얼마나 큰지 한 번 들이마시면 바닷물에 구멍이 난 것처럼 쑥 들어가 버린다. 만일 그 큰 입을 가지고 새우를 한 마리씩 잡아먹도록 지었다면 어떻게 먹고 살겠느냐?
그리고 주둥이가 긴 고기도 있다. 또 혹이 달린 생선도 있다. 또 발이 달린 생선도 있다. 또 입이 옆으로 달린 생선도 있다. 전기를 내는 생선도 있다. 날아다니는 생선도 있다. 인간들은 이런 것들을 보고 물 위를 가고 싶어서 배를 만든 거다. 또 해초 사이에 사는 고기도 있다. 시골바다에서 사는 고기도 있고, 도시근방에 사는 고기도 있다. 더운 바다나 찬 바다에 사는 고기도 있고, 물을 따라다니면서 사는 고기도 있고, 혼자서 사는 게 아니라 동 종류들끼리 떼를 지어서 사는 것도 있다.
우리 기독자들은 이런 것을 보면서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사는 게 좋다. 범위를 더 넓혀서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안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들끼리’ 이런 게 있는 거다. 자기 혼자 따로 있으면 믿음의 살이 찌는 게 아니라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긴다. 물고기들의 생태계를 보고 우리의 신앙 면에 깨달을 게 많다.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새도 종류대로 모양과 색상과 크기가 다 다르다. 사는 곳도 다르고, 기후에 따라 다르고, 큰 광야에 사는 새도 있고, 높은 산이나 밀림지대에 사는 새도 있고, 야산이나 강가나 혹은 벼랑 끝이나 처마 밑이나 혹은 동굴 속 등 사는 곳이 각기 다르다. 그리고 사는 행태도 갖가지다. 떼를 지어서 살기도 하고, 낮에만 활동하는 새가 있는가 하면 밤에만 활동하는 새도 있다. 보통의 새들은 낮에 활동을 하는데 밤에만 활동을 하는 새는 밤이 되어야 눈이 밝으니까 밤에 사냥을 한다. 그러니까 새의 종류에 따라 삶의 터가 다르더라.
넓은 광야에는 주로 어떤 새가 사느냐? 독수리다. 높은 산에는 큰 새들이 살고, 밀림지대에 사는 새도 있고, 낮은 야산이나 강가에 사는 새들도 있다. 강가에서 사는 새는 물고기를 잡아먹으려는 거다. 새의 종류에 따라 삶의 터가 다 다르다.
그리고 새의 종류에 따라 먹이가 다르다. 산 것을 잡아먹는 새가 있고, 죽은 시체를 먹는 새가 있다. 죽은 시체를 먹는 새는? 독수리다. 신앙적으로 보면 마귀가 산 것을 먹느냐, 죽은 것을 먹느냐? 죽은 것을 먹는다. 그러니까 죽은 신앙을 가지면 마귀이 밥이 되는 거다. 죽은 신앙이란 교회에 안 다닌다는 게 아니라, 예수를 안 믿는다는 게 아니라 믿기는 믿는데 세상을 목적하고 있다면 그 신앙은 죽은 거다.
그리고 시골에서 사는 새도 있는데, 이런 새는 주로 곡식을 먹는다. 벼랑에 사는 새도 있는데, 뱀 같은 걸 피하려고 그런 곳에 사는 거다. 이게 다 살기 위한 수단이다. 또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새도 있는데, 타조가 날지는 못해도 뛰는 건 잘 한다.
물고기나 새들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것도 보면 참 여러 가지다. 손톱을 청소해 주고 먹고 사는 사람도 있고, 깎아주고 먹고 사는 사람도 있고, 때려서 먹고 사는 사람도 있다. 전문이 있어서 다 그 면으로 먹고 산다. 이처럼 세상에 수많은 직종들이 있지만 전부는 사람을 위해서 있다.
물고기이던 새이던 이것들에게 무슨 복이 주어졌느냐?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이들의 복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복관을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는 짐승과 다를 게 없는 거다. 일반 자연은총적인 복을 참 복으로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짐승과 다를 게 없다. 사람의 복은 다른 거다.
새들은 ‘번성할지어다’ 하고 축복을 안 해도 자연섭리에 의해서 번성이 되는 거다. 축복을 안 해도 하나님의 복으로 잘 산다. 그런데 사람은 복을 빌어줘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니까 새들에게 하는 축복과, 성도들에게 하시는 축복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복이다.
일반 자연축복은 짐승들도,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다 받는 거다. 그런데 짐승들이 자연혜택의 복을 받는 것은 성도들 때문이다. 인간들 때문에 그걸 내리시는 거다. 인간들 중에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는 것인데, 영적인 면의 복을 받을 줄 모르면 물질적인 것도 거두어 가버린다. 주는 것도 못 받는다.
사람은 영적인 복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게 원칙인데, 타락된 인간들은 영적인 복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물질의 복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다. 최고의 복인 영적인 복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거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영적인 복은 돈을 주고 사는 물질적인 것보다 더 좋은 거다. 영적인 복은 받을 줄 알기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거저 받는 거다.
다섯째 날에 강과 바다에 사는 모든 생물들을 만드셨는데, 이 생물들 속에는 각종 해초들도 포함이 되는 거다. 바다를 보면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또 지중해, 북해, 북해를 북빙양이라도 한다. 그리고 남극은 대륙으로 되어있고. 지중해를 타고 들어가면 흑해가 있다. 이런 세계 각지에 있는 어느 바다 어느 강물에 사는 생물이던 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받았다.
23절: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사계절 안에 밤과 낮이 있으니 각종 채소나 나무에게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로 다 밤과 낮이 있는 거다. 그래서 인간 편에서 보면 채소나 나무가 마치 밤과 낮을 아는 것처럼 밤과 낮에 맞춰서 살아가고 있다. 새와 물고기도 인간이 보기에는 이들이 밤과 낮을 아는 것처럼 밤과 낮에 맞춰서 살고 있다. 그리고 새나 물고기들이 살기 위한 방편으로 떼로 모여서 사는 것을 보면 자기들끼리 서로 아니까 그렇게 사는 게 아니겠느냐? 하나님께서 자기들끼리 알도록 만들어 놓은 거다.
그리고 새를 향해 총을 쏘면 도망을 가는 것을 보면 작은 새에게도 귀가 있는 게 아니겠느냐? 아니면 듣지는 못해도 총을 쏘면 소리나 또는 총알이 나가면서 생기는 파동에 반응이 되어서 도망을 가는 거냐? 작은 새들이 상대의 새가 우는 작은 소리를 듣고 다가가서 짝을 찾는 것을 보면 귀가 있다는 증거 같다.
사람의 경우에는 어떤 짐승들이 우는 소리는 듣지를 못하는데, 이는 사람이 듣는 소리의 범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주 높은 소리나 아주 낮은 소리는 듣지를 못한다. 그런데 만일 사람이 어떤 짐승만이 들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소리까지 다 듣는다고 하면 요즘 세상에서는 살기가 굉장히 힘이 들 것 같다. 아파트의 1층에서부터 맨 위층에서 나는 소리까지 다 들린다면 어떻게 아파트에서 살겠느냐?
새와 물고기가 마치 밤과 낮을 아는 것처럼 살고 있는데, 낮에 해가 넘어가서 밤이 되면 새들은 둥지로 돌아가서 잠을 자고, 물고기들이 나타나서 물 위에서 놀기도 한다. 밤에 활동을 하는 물고기들은 낮에 생선을 잡아먹는 새들이 둥지로 돌아가는 밤이 되면 나와서 활동을 한다.
그리고 물고기는 죽어도 눈을 감지 않는데, 이걸 보고 우리가 신앙 면에서 깨달을 게 뭐냐? 영이 중생한 성도는 몸이 잠을 잘지라도 그 영은 깨어있다. 그러면 육신이 잠을 잘 때 영이 깨어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꿈에 기도하고 전도를 하면 이게 영이 깨어있는 거냐? 신앙 면에서 생각해 보면 성도가 육신의 잠을 자고 있을 때 만일 주님께서 나팔을 불며 재림을 하신다면 성도들의 영은 깨어있기 때문에 그 나팔소리를 듣고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주님의 재림나팔 소리에 자기 이름이 들어있는 거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셨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기르고 계시는데, 믿는 우리로서 이걸 믿음으로 생각할 게 없는 거냐? 세상만물을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이것들이 누구의 말을 듣겠느냐? 하나님의 말을 듣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모든 것을 다 만들었으니, 기후도 하나님이 만들었다. 따라서 이 기후가 식물들에게 온기나 찬기로 부딪히게 되면 자기가 살 온도가 되면 깨어나거나 자라지 않느냐?
나무들을 보면 따뜻한 것을 좋아하는 게 있고, 약간 추운 것을 좋아하는 나무도 있다. 그래서 매화처럼 쌀쌀할 때 꽃이 피는 나무는 그 때가 자기에게 좋은 시절이다. 매화가 피는 걸 보면 하얀색깔이 싱그럽고 청순한 느낌이 든다. 그냥 따뜻한 기운에서 피는 꽃과는 그 느낌이 다르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하나님의 말을 듣는구나.
성경에 요나를 집어삼킨 고기가 나오는데, 이 고기가 입이 큰 고래인지 무슨 고기인지는 몰라도 이 큰 고기가 누구의 말을 듣고 요나를 삼키는 거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삼키는 거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서 다시스로 도망을 가다가 지중해에서 풍랑을 만나서 바다에 던져져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는데, 사실 사람을 집어 삼킬 정도의 큰 고기는 대서양보다 더 크고 깊은 태평양 바다에 산다.
그렇다면 사람이 물에 빠져서 숨을 안 쉬면 보통 1분에서 3분 정도면 죽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물에 빠진 요나가 죽기 전에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려면 태평양 바다에서 3분 안에 지중해까지 도착을 해야 할 테니 큰 물고기가 ‘지중해로 달려가서 요나가 죽기 전에 씹지 말고 산 채로 삼켜라’ 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얼마나 빨리 달려왔을까? 초속으로는 안 되고 광속의 속도로 달려와야 할 거다. 큰 물고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서 냅다 달리고 있는데 다른 작은 고기들이 그 옆에 있다가는 치어 죽을 것 같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을 때도 그물에 걸린 고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요나를 집어삼키려면 하나님의 특명을 받은 그 큰 물고기만이라야 된다. 다른 어떤 고기가 ‘내가 네 대신 갈께’ 이건 안 된다. 이걸 신앙 면에서 보면 어떤 사건인지는 몰라도 나를 삼킬 듯한 큰 무엇이 다가올 때 이것을 감당하고 그 가운데서 구원을 이뤄가야 할 사람은 남이 아닌 바로 나다. 나의 구원을 위해 동원된 사건 환경은 나만이 감당을 해서 나의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거다.
모든 성경이 비유와 상징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말을 하는 것이 성경에 있는 그대로를 놓고 말을 하면서 비유와 상징이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가 그것을 풀어낸다는 의미에서 비유와 상징이라고 하는 건지? 성경은 비유와 상징이 맞기는 한데, 거기에서 이룰구원의 이치와 도리가 나와야 비유와 상징을 푸는 거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져서 물고기를 153마리를 잡았는데, 이것을 ‘그 때 당시의 보통의 고깃배들의 크기가 얼마 정도 되니까 이 배에 153마리의 물고기를 실었을 때 이 배가 거의 가라앉을 정도라면 어느 종류의 고기이며, 어느 정도 크기의 고기일 것이다’ 라는 등의 말을 하며, 이것이 비유와 상징을 푸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이룰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거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물고기들도 자기가 죽는 일임에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그물에 걸렸 들었는데 오늘날 예수 믿는 우리가 자기를 살려주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왜 그렇게 불순종을 하는 것이지를 깨닫는다면 이 사람은 비유와 상징을 푼 게 되는 거다. 하나님의 특수목적에 의한 특수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만들어서 구원해 주시고, 그 나라에 가서 영광중에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왜 그렇게 어기며 살고 있는 건지? 짐승 중에 고집이 센 짐승이 어떤 짐승이냐? 염소가 아닌지? 우리들은 이 염소보다 고집이 더 세지는 않은지?
(19년 설 집회 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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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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