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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5: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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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92368 |
게네사렛 어부들 이야기
눅 5:1-11, 주현절 후 넷째 주일, 2019년 2월3일
1.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게네사렛 호수
예수님의 3년 공생애 중에서 가장 오래 머물면서 활동한 곳은 게네사렛 호수 인근입니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로도 불립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도 그리 멀지 않습니다. 예루살렘까지는 끝에서 끝이라고 할 정도로 멉니다.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이 웬만해서는 남쪽의 예루살렘을 방문하기가 어렵습니다. 오지인 셈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이 지역은 특별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전하면서 갈릴리를 언급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자들에게 천사가 부활의 예수님이 먼저 갈릴리로 가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게네사렛, 즉 갈릴리 호숫가에서 처음 하신 일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설교 본문인 눅 5:1-11절이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호숫가에 서 계셨습니다. 가버나움으로 추정됩니다. 가버나움은 평범한 어촌입니다. 이 호수의 둘레는 50킬로미터이고, 남북 길이가 21킬로미터, 동서 길이가 11킬로미터입니다. 남쪽 끝에서 북쪽 끝은 잘 보이지 않을 거 같습니다. 전체 넓이는 대략 대구광역시의 6분의1입니다. 호숫가에 두 척의 배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고기 잡는 배입니다. 어부들은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풍경은 어촌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평화스러운 풍경입니다. 예수님은 모여든 사람들이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 한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장면을 머리에 그려보십시오. 사람들은 앉거나 서서 호수 쪽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배에서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설교하고 여러분이 설교를 듣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설교를 마치고 배 주인인 시몬에게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십시오.’ 이미 고기 잡는 시간이 지나서 어부들은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겁니다. 어부들은 뜬금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어부들이 프로입니다. 언제 고기가 몰려오고 언제 흩어지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고기잡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낯선 남자가 설교한 뒤에 갑자기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갑니다. 더구나 고기잡이에 나섰던 시몬과 그의 동료 어부들은 이미 밤새도록 허탕을 쳤습니다. 이제 빨리 그물 손질을 마친 뒤에 집에 가서 모자란 잠을 자고 다시 고기잡이에 나설 준비를 하는 게 최선입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집에서 가족들이 기다린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고,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기에 다시 그물을 던질 힘이 남아있지 않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았지만 어부 시몬은 오늘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당연합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에게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입니다. 가버나움에 예수님의 집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연배로 비슷하니 예수님과 베드로 두 사람이 이미 이웃처럼 잘 알고 지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 부담 없이 시몬의 배에 오르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시몬의 배에 오르신 적이 여러 번 있었겠지요. 평소에 존경했고 오늘 배에서 행하신 설교도 감동적이어서 시몬은 그물을 깊은 곳에 던져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의 대답이 5절에 나옵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그물에 잡힌 고기가 너무 많아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대박’이 났습니다. 시몬은 다른 배의 동료를 불러서 힘을 합해서 그물에 잡힌 고기를 건져 올렸습니다. 두 배에 고기가 가득 차고 넘쳐서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시몬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시몬도 놀라고, 그와 함께 이번 작업에 참여한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습니다. 시몬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시몬이 너무 충격적인 일을 만났기 때문에 이런 발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받은 충격은 고기를 예상 외로 많이 잡았다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는 자신의 실존이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시몬의 경험을 예를 들어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갔다고 합시다. 그 경험은 우리의 일상과 완전히 다른 겁니다. 하늘과 산과 자신만 그 순간에 모든 것입니다. 거기서 연봉을 생각한다거나 드라마를 생각할 사람은 없습니다. 또는 잠을 자다가 불현 듯 깨는 순간이 있습니다. 암흑입니다. 침묵이고 고독입니다. 자기가 누군지가 확실해지지 않는 당혹스러운 경험입니다. 이럴 때 사업 구상을 한다거나 어느 누군가에게 앙갚음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시몬은 그 순간에 예수님을 절대적인 존재로 경험했기에 자기를 떠나달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병행구인 막 1:17절에는 우리에게 더 익숙한 표현이 나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시몬 베드로는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라는 소명을 받은 겁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은 어부였습니다. 그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먹여 살려야 할 가족도 있고, 고기 잡는 어부로 사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그걸 포기하고 이제부터 전혀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건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자세하게 말하지 않지만 시몬 베드로는 오래 심사숙고했을 겁니다. 자기 아내와도 의논해야 합니다. 부모의 생각도 들어야겠지요. 결국 그는 예수의 제자로 살겠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시몬 베드로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함께 결단했습니다. 그 장면을 본문은 11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렇게 이야기는 끝납니다. 본문에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가 나오지 않지만 병행구인 마 4:18절과 막 1:16절에는 안드레가 나옵니다. 이들 네 명은 12제자 집단에 속하는 사람이 되었고 이후로 유랑 전도생활을 했습니다. 어부들이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어부로 평생을 보냈다면 평범한 인생이었겠지만 전도자가 되어서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누가복음을 비롯해서 공관복음 기자들이 이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는 이 이야기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두 단어로 집약됩니다. 하나는 ‘소명’이고, 다른 하나는 ‘버림’입니다.
소명
도대체 소명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원래의 직업을 포기하고 목사나 선교사로 부름 받는 것을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물론 소명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소명은 아닙니다. 소명은 모든 직업과 인생살이에 해당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부분을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당시 가톨릭이 지배하던 중세기 유럽에는 성직과 세속직이 엄밀하게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루터는 그걸 부정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직업이 거룩한 소명이라고 보았습니다. 독일어로 직업을 Beruf(베루프)라고 합니다. 처음 만나서 인사를 나누면서 ‘당신 직업이 뭔가요?’라고 물을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사명, 소명, 천직, 직업 등등의 뜻이 있는 단어입니다. 어근은 부른다는 뜻의 동사 ‘rufen’(루펜)입니다. 루터는 모든 직업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부나 목사직만이 거룩한 게 아니라 구두 수선공, 학교선생, 굴뚝 청소부의 일이 거룩하다는 말이 됩니다. 직업의 의미가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칼빈도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직업은 서로 다를지라도 영적인 의미는 똑같습니다.
직업을 소명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직업을 돈의 교환가치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직업이 하나님과 관계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한 분이며 지금도 생명을 보존하는 분이기에 하나님과 관계 된 것은 돈으로 계량화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흡할 공기를 주시고 실체로 존재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허락하습니다. 그것은 돈으로 계산될 수 없는 것들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이 하나님의 소명에 의한 것이라면 돈으로 계산될 수 없습니다. 가정을 생각해봅시다. 전업주부가 자신의 노동에 대한 가치를 보장받기 위해서 남편에게 월급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집안 청소를 했다고 해서 돈을 받는 건 아닙니다. 가정 구성원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가정에 결속시키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소명의식과 관계없이 돌아갑니다. 직업과 노동이 순전히 재화로만 평가됩니다. 일 년 전부터 우리나라는 최저임금제로 인해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대다수 보수언론과 경제지는 급속한 최저임금 상승으로 대한민국 경제가 파탄에 떨어지는 중이라고 부풀려서 말합니다. 노동 제도를 바꿔가는 과정에서는 시행착오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한 제도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평가는 최소한 수년을 지난 다음에 내려야 합니다. 토요 휴무제가 도입될 때도 한국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준다고 불평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정착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논쟁과 알력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에너지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나라 경우에는 인간 삶에 대한 존엄성을 외면한 채 경제성장 지상주의에 치우침으로써 사회적 비용이 과도하게 들어가는 게 문제입니다. 최저임금에 대한 과도한 논란으로 인해서 노동의 본질은 훼손되고, 노동의 상품화가 심해집니다. 노동 자체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시간과 돈의 역학관계만 생각하는 방식의 삶이 고착되는 겁니다. 노동자나 기업주나 똑같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될 뿐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제가 공부한 성경과 기독교 신앙의 전통에 따르면 우리는 직업과 노동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를 소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도 비슷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야하기에 재화와 경제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논리를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매몰된다면 굳이 기독교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공연히 마음만 불편해집니다. 차라기 세속의 원리에 기민하게 반응하면서 사는 게 덜 피곤할 겁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기에 평생에 걸쳐서 우리의 삶을 소명의 차원에서 받아들입니다. 소명의 차원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삶을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런 점에서 모범이 될 만합니다. 고전 2:15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한 마디로,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 겁니다. 삶을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런 점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능력이 있고, 가장 헌신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런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버림
우리의 삶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기는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저도 설교만 그럴듯하게 할 뿐이지 소명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살지를 못합니다. 소명을 실제로 경험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이전에 소중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버려야하기 때문입니다. 시몬 베드로를 비롯한 게네사렛 어부들은 배와 배에 속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이 ‘버림’이 제자들에게 일관되게 나타나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버림이 아니라 오히려 집착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설령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세상에서 살기에 이런 버림의 영성은 공허하게 들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두 가지 관점만 짚겠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합니다.
우선 ‘버림’은 버려야할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태도입니다. 어떤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을 발견했다는 뜻입니다. ‘밭에 묻힌 보화’ 비유가 마 13:44절 이하에 나옵니다. 밭에 묻힌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삽니다.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삽니다. 더 소중한 것을 발견했기에 그 이전의 것을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소중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끌어안고 사는지 모릅니다. 지금 제가 무소유를 찬양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을 실제로 당장 포기해야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저에게도 은행통장과 신용카드가 있고, 책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상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즉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에 필요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오늘 본문의 시몬 베드로 일행에게서 보듯이 모든 것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미 버려서 소유하지 않은 것처럼 현재를 살아갈 것입니다.
두 번째 관점은 궁극적으로 우리는 곧 모든 것을 버릴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좀 웃기는 시추에이션입니다. 우리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계속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게 명백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에 목숨을 거는 태도로 삽니다. 그 이유는 생존에 대한 불안에 있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력하기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는 전혀 새로운 태도로 세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운 삶의 태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는 제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가 판단해야합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여러분에게 다음의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말씀드릴 뿐입니다. 게네사렛 어부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소명과 버림의 영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실제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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