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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2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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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2장 24절-25절.
24절: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어린 반구는 곧 비둘기 새끼를 말하는 겁니다. 비둘기 새끼는 잡기도 쉽지만 값이나 나가겠느냐? 가난한 사람은 소나 양이나 드릴 수 없어서 비둘기 새끼로 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써 주시는지, 그리고 요셉 가정이 얼마나 또 가난했는지 하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예, 요셉의 가정이 얼마나 가난했을까? 그렇게 가난한 가정에 어떻게 여자들 시집가고 싶어요? 비교로 따져서 믿음은 요셉처럼 없어도 요셉보다 절반이나 더 부자면 어떻게 가려고 그러겠나? 그것도 힘들 거다. 엄청나게 부자고 믿음도 좋다 그랬을 때에 과연 믿음 보고 갈까? 부자 보고 가지. 안 그래요? 물질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줄 알고 그런 생각을 하지 ‘신앙 믿음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까’ 그런 생각은 잘 안 할 거라.
그 뉴스에 나오는 배우들 아주 갑부 집에 시집갑니까? 갑부 집에 가서 얼마 못 살고 왜 헤어지지요? 왜 헤어져요? 어디 여자분들, 대답 좀 해봐요. 아가씨들, 왜 헤어지는 것 같아요? 그 비결을 알아야지. 성격 성질이 이게 서로가 안 맞아서 헤어진다. 두 번째 문제.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라서 헤어졌다. 믿는 입장에서 그 원인은 어디서 캐내야 돼요? 성격 성질이 안 맞아서? 성격 성질이 맞으면 행복할 것 같아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휘 저어 버리면 끝나는 건데?
그래, 처음에 성격 성질이 좋다. 살아갈수록 이게 그대로 좋겠냐 살아갈수록 벌어지겠냐? 또 신앙 믿음이 의사단일성이다 하면 이게 믿어갈수록 더 진해지겠는지 이게 더 벌어지겠는지? 근데 사람들은 그걸 잘 생각을 못하는구나.
제 입장에서 보면 참 그 헤어진 목사님들 가정이 많아요. 내가 알기로 상당히 많아요. 그거 왜 그럴까? 왜 그런 거 같아요? 그런 피해를 입었으면 자타가 몰라서 피해를 입었으면 자녀들에게는 ‘우리들은 이렇게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니 이게 피해가 막심하더라.’ 좀 그걸 가르쳐줄 수가 없는가? 자녀들에게도 여전히, 오히려 어떻게 보면 부모생각이 더 세상 쪽으로 나가가지고 이러니. 이게 참 사람이 어디서 넘어졌다 그러면 왜 그걸 안 가르쳐주지? 왜 안 가르쳐주고 그대로 그냥 자녀들에게 후손들에게 그 피해가 그대로 가도록 만들까?
그래서 가만 보면 다 집에 자녀들 있으니까 신경들 쓸 거예요. 결혼에. 우리 집 자녀들도 넷이나 있으니까. 이 가만 보면 일반도 안 되는 그런 말을 하는구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남편으로부터 피해를 봐놓고 어떻게 또 그럴 수가 있을까? 이건 정말 악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일반 눈을 가지고 또 자기처럼 또 피해를 보게 만들까? 이건 흉악범이다. 이건. 일반사람보다도 더 못한 얘기가 내 귀에 들리니 이거 참 이게 사람이냐? 이게 교회직분을 가진 사람이냐?
안 믿는 사람들도 얼마나 따지는데. 안 믿는 사람을요 그 갑부 집 엄청나게 따져요. 아무리 예뻐도. 시집가면 또 그 집 뭐요? 문물을 다 배워요. 손님들이 워낙 많이 왔다 갔다 하고 높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니까 배우지 못하고 교양이 없고 말도 함부로 하고 어른 앞에 휙휙. 어떻게 그거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더 엄하다고요. 근데 기독교 가정에서는 인간의 자유에서 이게 교양과 덕망을 잘 닦아놓으면 그게 괴로운 게 아니라고요.
이 참 성격 성질마저 안 된데다가, 물론 우리 애들도 그래요. 가만 보면. 그나마도 살림살이에 반찬도 못 하지 간장도 못 담그지 된장도 못 담그지 밑반찬도 못 하지 성격도 참 세상말로 지랄 같은데다가. 사람들 그러지. 안 믿는 사람들. 그럼 가만 생각을 해봐요. 신앙 믿음도 없는데다가 이거 어떻게 하면 좋겠냐? 사회 나가서 고생하다 보면 이게 다 이겨나간다? 남이 그것도 말을 해줘야지 자기 스스로 그 말을 하니 이게 뭐 말에 힘이 있어야지. 이 참 문제가 크다. ‘사건 환경적으로 얼마나 얻어맞아야 정신이 들까?’ 그런 느낌. 말해서 안 듣는 건 사건이 와가지고 한 번 뒤집어놔야 돼요. 그러면 사건이 그런 거 어떻게 하겠어요?
요셉가정이 참 가난했던 모양이요. 부자면 믿음 없고 가난하면 믿음 있는 겁니까? 가난하면 진리 길 갈 수 있고 부자면 못 가는 거요? 가난했을 때 진리 길 못 가고 부자 됐을 때 진리 길 못 간다면 이건 가난한 사람이 부자 되면 진리 길 가겠어요? 그리고 부자 되어있을 때에 시간 많고 물질 있을 때 배울 시간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 하고 있다면 가난하면 믿음 기르고 가겠어요? 이래도 못 가고 저래도 못 가는 거라. 그거. 자기 시간낭비 젊음낭비 다 해버렸는데 어떻게 믿음의 길로 가겠어? 못 가는 거요.
믿음의 길 가려면 옳은 말씀을 받을 때부터 이게 마음이 결심이 서야 돼. 말하자면 옳은 열매가 영글어져야 돼.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열매도 열매 나름이지요? 맛있는 열매 있지요? 비가 오면 이게 뭐요? 복숭아 참외 또 수박, 요새는 또 하우스 안에서 키우니까 잘 키운 것은 어제 고창수박 먹으니까 맛있더라며? 껍데기까지 다 먹었다면서?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모르고 아무 집이고 태어난다고 한 것이 우리처럼 생각한다면 재수 더럽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겠느냐 그 말이요, 예수님이? 예수님이 오실 때에 마리아 태중에 태어나려고 이렇게 보실 때에 예수님이 사람을 보고 상황을 보고 다 안 보겠어요? 안 그래요? 우리 인간들 편에서 보면 ‘몰랐는데 시집을 가놓고 보니 그 집 가정이 정말 아무 것도 없고 뭐 어쩌고 뭐 어쩌고’ 그런 소리 간혹 들을 수 있거든. 예수님이 태어나서 보니 ‘아, 우리 집이 가난하구나.’ 그 때서 알까요? 보는 눈.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선재적 그리스도로 보는 눈. 아무리 가난해도 예수님께서 보시는 눈. 인간처럼 생각을 한다면 ‘내가 이 가정에 가서 이 마리아의 가정에 요셉의 가정에 영원토록 영원토록 천국의 부요자로 이름 있는 영광의 집으로 내가 만들어줘야 되겠다’ 그런 거 있을 수 있지요? 인간 편에서 한 번 생각을 해보면. 그래, 그런 성도를 보고 하나님께서 역사로 임하셔서 그 성도를 영광스럽게 만들어줘야 되겠다고 하는 당신이 보시는 그 눈. 신앙으로 보는 눈.
엘리멜렉의 가정에 시집을 와가지고 어린 룻이 ‘이 가정에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진 것을 내가 풀어드려야 되겠다.’ 그 결심 각오를 하고 올라가는 거지요? 그 한 번 생각을 해봐요. 처음부터 그런 눈 가지고 시집. ‘아이고, 내가 저 집에 가서 일으켜야 되겠다’ 그런 며느리들이 좀 힘들 거야. 아마 참 귀할 거야. 그런데 이게 그만 어떻게 하다가 잘못 가가지고 시아버지 노름빚 아들이 갚고 아들이 그 빚 못 갚고 죽었고 며느리가 시아버지 노름빚 갚느라고 이게 죽을 맛을 사는, 참말로 그 어찌 그럴까? 참 세상에서 그런 걸 가만 보면 잘 났네 못 났네 그게 문제가 아니고 이 신앙 믿음의 지혜. 첫째는 하나님 모르는 것. 두 번째는 역사 속에서 구원을 모르는 것.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이 구원이에요. 그러니 현실에서 넘어지고 현실을 이길 수가 없어서 자살을 하고.
그래,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능의 능력으로 내가 부자로 만들어줘야지’ 하고 부자로 만들어서 살았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큰 부자로? ‘동네사람들아, 냇가에서 맨질맨질한 돌 다 주워 방안에 가득 채워놓아라. 산에 가서 까실까실한 돌도 주워서 방안에 가득 채워놓으면 내가 기도를 해 주마.’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일종의 그런 요행. ‘아침에 문 열면 맨질맨질한 돌은 찰떡이 돼 있을 것이고 까실까실한 그런 돌은 시루떡이 돼있을 것이다.’ 왜 아멘 안 해요? 허허허. 꼭 그런 사고방식. 세상 속화된 믿음은 그래요. 참 어리석고 미련하고 이치도 안 맞는.
자, 이렇게 되면 그 말에 ‘아멘’ 하고 돌아가면 몇째 시험에 걸려 넘어질까요? 그건? 오늘날 마귀 앞잡이 거짓 종들은 예수이름으로 부자 되게 만들어 달라고 가르치고 있지요? 그 마귀소리. 세상과 세상 것이 불어난 것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원 축복인양 간증하고 자랑하고 다니는 건 이건 마귀의 꼭두각시인줄 알아야 된다. 마귀의 끄나풀이다. 이건.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나신 것은 갈라디아서 4:4로 보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고.’ 그래서 율법 아래 태어났다 그 말이요. 다시 말씀드리면 물에 빠진 자를 건지려면 물에 뛰어들어야지. 실력 있는 자가 물에 뛰어들어야지 실력도 없이 왜 물에 뛰어드냐? 그러면 그건 다 죽는 거다. 그거는. 맞지요?
신문에 엊그제 났지요? 어디서 애가 물놀이하는데, 어디서 그랬다나? 물에 막 떠내려가고 있는데 엄마도 뛰어들고 이모도 뛰어들고 죽었데요. 애는 다른 사람의 손에 구원을 받고.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자기애가 떠내려간다. 엄마로서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핸드폰 다 가지고 있지요? 어떻게 머리를 쓸까? 어떻게 좀 머리를 써야 되겠는데. 가령 떠내려간다고 자기 눈앞에 그걸 상상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래, 만일 집사님이 들어갔으면 그냥 죽는 거요. 실력이 없으면 그냥 죽는 거란 말이요.
그리고 그런데 간다고 해서 ‘죄다. 아이고, 세상 속화됐다’ 절대로 그러지 말아요. 생각을 그리 가지면 안 돼요. 저는 좀 그래요. 고행주의로 나가고 은둔주의로 나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보고 ‘타락됐다. 세상 속화됐다’ 혹 그럴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런데 잘 매이지 않아요. 제 믿음은.
그러면 바다에는 옷 벗고 들어가니 그렇다면 그럼 비행기 타는 건? 떨어지면 어쩌려고. 비행기 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타요? 중동에 순례여행 하는 그런 사람들 많이 타잖아요? 우리는 산에 가더라도 절간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거고. 중들이 좋아하는 그런 곳으로 갈 필요는 없어. 저 밑에 내장산인가? 그 쑥 들어가니까 목탁소리가 나고, 하여튼 불교냄새가 확 나더라고요. 앞에 가서 안으로 안 들어가요. 뭐 하러 가. 돈 내고 들어가지요? 돈 안 내고 밑이 다 보이는 저 위로 올라가면 다 보이잖아요.
혹시 뭐 물을 거 있어요? 상식적인 거. 그 면에 있어서 물으라. 얼른 ‘물으라’ 그럴 때 물어요. 집에 가서 전화로 물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께 율법 아래 나신 것은 뭐라고요? 예수님이 물속에 들어가신 것은 뭐라고요? 예를 비유를 든 겁니다. 누구 살리려고? 예수님 목욕하려고? 누구 살리려고요? 죄악세상이라고 하는 물에 빠진 우리를 살려주시려고. 그 참 죄악의 물에, 세상 물 죄악의 물 유혹의 물. 그 물질에 빠지면 죽어요. 그거 분명히 알아야 한다. 신앙 믿음이 죽어버려요. 이치를 알아라. 육신이 안 죽으니까 뭐 아이고 그냥 안 죽은 것처럼 별로 못 느낄 거요. 아니요. 신앙정신 면에서 죽어버리면 그 사람은 그냥 내리막길이에요. 모든 사고방식이 내리막길이에요. 진리 붙잡지 못하면 못 올라와요 자기 스스로 못 올라와요.
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개인적 위로가 아닌 이스라엘의 위로가 무엇이냐? 말하자면 지금 본문이 이스라엘이 어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에 처해져 있기에 위로자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냐 그 말이요? 그 가만히 읽어보면 자기 개인 위로 그것보다도 이스라엘의 위로. 참 이게 이 사람이 애국자요. 시므온이 애국자요. 천국애국자요.
이스라엘의 슬픔과 고통은? 첫째로 로마강대국의 속국이 된 것이 슬프다. 두 번째는 유대종교 지도자들도 로마를 왕으로 삼고 있는 것이 슬픈 일이다. 참 슬픈 일이요. 예, 오늘날 이게 목사님들이 세상이라고 하는 거기에 속화된 것 참 슬픈 일이요. 그 다음 세 번째.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참 왕이 없다는 것이 참 슬픈 일입니다.
이스라엘 전체 위로자를 기다리는 시므온의 신앙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의 애국자입니다. 참 애국자요.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애국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자기 동족 천국의 동족을 생각하는 그런 애국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예수이름 이용하여 자기 재산으로 긁어모아 자기 노후대책 세우거나 예수이름으로 한다고 해도 비 복음이고 복음이 아닌 세상을 위한 것에 종노릇 하다가 이룰구원이 없이 이룬 구원이 없이 헛살고 가는 불쌍하고 처절한 종들이 아닌 종들이 얼마나 많을까?
시므온은 평소에 어디서 살았습니까? 어디서 살았다고 그러지요? 25절에 나와 있잖아요? 누구를 기다리느라고 그렇게 그 곳에서 살았느냐 그 말이요? 살기 좋아 살았느냐? 인정정실에 살았느냐? 올 데 갈 데가 없어서 거기서 살았느냐? 누구를 기다리느라고 누구의 위로를 기다리느라고 거기서 살았느냐 그 말이요?
그렇게 사는 자 위에 무엇이 계시느냐? 무엇이 계시지요?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이더라. 참 이거 성령이 거하는 신앙사상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같이 거하는 신앙사상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뭐 ‘귀신이나 마귀나 악령이나 거하는 신앙사상은 어떤 거다’ 하고 금방 알아지는 거지요. 그거는. 하나님의 본질에서 보는 진리생명의 정신으로서 모든 언행심사가 의롭습니다.
‘경건하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사는 사람이요. 경건한 사람이라. 성령의 사람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진리통치를 원하는 사람이요. 그게 성령의 사람이라. 성경과 오늘날 이게 ‘성령 받았네. 어쩌네. 뭐 성령 달라’ 이거 하고는 질이 전혀 딴판이요.
성령의 역사가 아닌 자들은 이런 정신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정신이냐? 어찌하든지 자기 생활위주로 돈 끌어 모으고 ‘돈 돈.’ 돈 있는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별별 수단을 다 부리고. 이게 거짓 종들의 형태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성령의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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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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