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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5:1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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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2505) |
주님 뜻대로 사는 길 (누가복음 5장 12-16절)
1. 주님의 뜻에 맡기라
어느 날 온 몸에 나병 들린 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구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12절).” 이 고백은 “흉측한 나 같은 사람도 깨끗하게 하길 원하십니까?”라는 의심의 고백보다는 주님의 뜻에 자신의 치유를 온전히 맡기는 믿음이 내포된 고백에 가깝다. 그처럼 기도 응답은 물론 모든 일에서 겸손하게 주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믿음을 가지라.
살다 보면 무엇인가를 잃기도 한다. 그때 너무 상실감에 젖지 말고 그 상황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라. “하나님! 원하시면 제 것을 가져가세요.” 그 고백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많은 것이 없어져도 다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믿음과 함께 심력과 실력을 준비하라. 나를 계속 준비시키면 무엇인가를 잃고 누군가 떠나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더 나은 내일을 펼쳐갈 수 있다.
이별의 아픔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더 나를 준비시키라. 내가 떠나야 할 상황도 하나님이 있게 하셨다. 그때 새로운 차원과 환경에서 남은 생애를 멋지게 불태우면 약전 인생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남이 나를 떠나면 잠시 상처가 되지만 그것도 나를 좋게 하려고 하나님이 있게 하신 상황이다. 그때도 사명의 길을 꾸준히 가고 새로운 만남을 통해 새로운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면 된다. 남이 나를 떠나면 그것은 그가 자기 복을 차는 것이라는 배포와 자신감을 가지고 그를 축복해주며 깨끗이 잊으라.
복의 근원이 되는 준비를 하면 길이 막힌 상황을 더 나은 진보 상황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남이 나를 버리고 떠날 때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큰 상처를 입지만 준비된 사람은 큰 상처를 입지 않는다. 심력과 실력을 준비하라. 그 중에서 가장 잘 준비해야 할 것은 “이 상황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진 상황이다.”라는 믿음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뤄졌다고 믿고 과거를 잊고 새로운 내일을 향해 나아가면 내 미래는 과거보다 더욱 찬란할 것이다.
2. 비천한 자를 존중하라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고백에서 믿음을 보시고 즉시 깊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댔다(13절). 당시에 접촉하지 말아야 할 존재로 격리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댄 것은 엄청난 성육신의 사랑과 공감적인 사랑이 담긴 행위였다. 그 손길로 인해 나병환자는 육신이 치유되기 전에 마음부터 치유되었을 것이다. 그때 예수님이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자 즉시 나병이 떠나갔다.
치유의 역사는 강자의 손을 잡을 때보다 약자의 손을 잡아줄 때 더 생긴다.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그 은혜를 약자의 손을 잡아주라는 소명으로 여기라. 혼자만 행복해지려고 하는 삶은 신기루에 가깝다. 약자를 외면하고 얻는 웃음은 조만간 울음으로 변한다. 비천한 자를 외면하고 얻는 것은 무엇이든지 깊은 행복과 보람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행복의 문을 여는 비밀 코드는 강자와의 만남보다 약자와의 만남을 통해 얻어진다.
무조건 약자 편에 서라는 말은 아니다. 불의하고 비겁하고 게으른 약자도 많다. 그런 약자 편에 섰다가 이용만 당할 경우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자로부터 당한 배신과 실망을 통해 인내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아무개야! 그래도 약자에 대해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겠느냐?”는 시험이다. 약자로부터 배신과 실망을 많이 당했어도 기본적으로 약자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의 바탕만은 흔들리지 말라.
비천한 자를 우습게 여기지 말라. 그를 볼 때마다 그에게 예수님이 친구처럼 다가가 손을 내미는 상상을 하고 그에게 물질이나 다른 무엇을 나눠주기 전에 그의 영혼을 힘써 존중해주라. 그 영혼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과 예수님의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월적인 비교의식을 버리고 근신하는 마음을 가지면 내 삶의 근심도 사라진다. 근신이 근심을 사라지게 하는 비결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근신하면서 힘써 덜어내고 내려놓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의 뜻은 그를 통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3. 능력을 자랑하지 말라
어떤 치유 부흥사들은 치유가 확인도 안 된 사람을 믿음으로 치유 받았다면서 마이크를 대서 억지로 치유 고백을 시킨다. 그런 거짓 치유 사역자에게 순진한 사람이 거짓의 동조자가 되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인식도 못한 채 따라가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하나님은 거짓을 통해 역사하는 법이 없다. 예수님은 확실히 치유 받은 나병환자에게 오늘날 마이크를 대는 식으로 선전하기보다 오히려 치유 사실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했다(14절).
사람들은 영혼 구원 및 영혼 변화보다 신기하고 화려한 능력을 보여주는 영적인 아이돌에게 몰려들 때가 많다. 그런 심리를 이용해 영혼과 돈을 빼앗는 거짓 치유사들의 작전을 예견하시고 예수님은 치유 선전을 금하라고 하셨다. 다만 나병환자가 공동체로 복귀하려면 제사장에게 가서 치유 사실을 알려야 했기에 나병환자가 자기의 깨끗해진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게는 하셨다(14절). 그러나 자신의 능력 과시를 위해 치유 사실을 알리게 하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이 영성과 능력이 있다고 선전할수록 예수님의 뜻과는 더 멀어지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는 치유가 더 멀어진다. 결국 내 영혼의 행복과 참된 치유를 위해 가장 멀리해야 할 사람은 치유의 은사와 능력을 선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면 자랑을 힘써 삼가되 영성과 영적인 능력에 대한 자랑은 더 삼가야 한다. 또한 리더의 능력 자랑만큼 주의해야 할 것이 팔로워의 자기 최면이다.
왜 가짜 치유사의 거짓 능력 행각이 지속되는가? 팔로워가 그를 따르는 삶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그의 치유 능력은 진짜다.”라고 자기 최면을 걸며 따르기 때문이다. 거짓과 과장 선전이 잦은 이단 교주에게 자기 최면에 빠져 속는 것은 자기 영혼에 대한 무책임이다. 이단 교주가 거짓말을 잘하면 그가 내세우는 새로운 교리도 당연히 거짓이다. 자기 최면에 빠지지 않으면 명백한 거짓과 과장 선전은 금방 분별된다. 자기 최면에 빠지지 말고 바른 리더와 상식적인 성도의 말도 잘 귀담아 들어야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할 가능성을 크게 줄일 수 있다.
4. 하나님과 깊이 만나라
예수님이 치유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엄히 경고했어도 그 사실은 저절로 알려졌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치유의 능력도 얻겠다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15절).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기보다 오히려 그들로부터 물러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16절). 사람들이 몰려오자 오히려 사람을 물리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보라. 자신이 뜰 때 자신을 잘 감추고 사람이 몰려올 때 사람을 잘 물리칠 줄 알아야 한다.
사람 앞에서 잘 물러날 줄 알아야 주님의 뜻을 더욱 잘 알게 된다. 특히 한적한 곳에서의 기도가 중요하다. 기도는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하는 것만이 아니다. 생활 중에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도 기도다. 기도는 지혜를 얻는 원천이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정확히 몰라도 한적한 상태에서 기도하면 거룩한 이해력과 예지 능력이 커지고 선견지명이 생기면서 문제를 비교적 잘 대비하고 대처하게 된다.
예전에 어떤 사람은 작가는 모두 언행이 다른 위선자이기에 자신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 흐름을 거부하고 항거할 수는 있지만 자기 의에 사로잡혀 세상을 미워하고 현실을 미워하면 안 된다. 작가도 자기 글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도 작가를 다 위선자 같다고 해서 책을 읽지 않고 남의 말을 무조건 거부하면 어떻게 자기 발전이 있겠는가? 완벽한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묵상과 성찰과 관조를 통해 자기 부족함을 조금이나마 더 깨닫고 개선하려는 태도다.
일반적인 묵상과 성찰도 깨달음의 큰 원천이 되는데 하물며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루면 깨달음이 얼마나 커지겠는가? 깊은 기도를 통해 많은 것을 얻지만 특히 하나님과의 깊은 공감 능력을 얻는다. 그때 하나님의 뜻을 조금 더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삼고 하나님의 마음과 시각을 가지게 되면서 선견지명도 넘치게 된다. 한적한 곳에서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철든 성도가 되는 것처럼 복된 일은 없다.
< 영적인 공감 능력을 키우라 >
어느 날 신실한 믿음과 봉사와 헌신으로 담임목사의 특별한 총애를 받던 한 청년이 담임목사에 대해 오해했다. 부목사의 갑작스런 사임에 대해 부목사가 너무 설교를 잘해서 부당하게 쫓아냈다는 오해였다. 그는 실망한 채 교회를 떠났다. 그가 나중에 목회자가 되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때 담임목사님에 대해 내가 오해했구나. 교회에서의 일 관계와 인간관계의 복잡한 상황을 내가 너무도 몰랐구나.” 공감 능력이 커진 것이다.
그는 예전의 담임목사를 찾아가 오해를 풀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지만 한국 최대 교회의 목사가 된 그를 찾아가면 그가 성공했기에 계산적인 목적으로 찾아온 것으로 오해할까봐 그냥 멀리서 축복을 빌어드리기로 결심하고 찾아가지 않았다. 목회자들은 옛날에 이해되지 않던 목회자의 어떤 모습이 자기가 목회자가 된 후 이해되었다는 얘기를 가끔 한다. 직접 체험하기 전에는 신뢰하는 사람이라도 그의 뜻과 마음과 조치에 온전히 공감이 안 되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처럼 사람의 뜻도 알기 어려운데 하나님의 뜻은 더욱 알기 어렵다. 그래도 깊이 기도하고 묵상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해하는 공감 능력을 어느 정도는 키울 수 있다. 믿음이 커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공감 능력이 커지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공감하고 그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면 지금은 잠시 패배한 것 같아도 나중에 때가 되면 최상의 승리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는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다.
1946년 4억 5천만 명의 중국인 중 교인이 약 100만 명이었다. 그때 공산화로 인해 교회가 문을 닫고 선교는 불가능해졌는데 50년이 지난 1996년에는 5천 3백만 명의 공산당원 수보다 기독교인 수가 거의 2배에 달하는 1억 명 이상이 생겼다. 지금 중국 교회가 다시 핍박 받지만 이 시련도 언젠가는 승리의 역사로 귀결될 것이다. 믿음 안에서는 인간의 의지가 끝나는 때가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될 때다. 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기도하며 힘쓰면 후퇴와 실패도 일시적인 후퇴와 실패일 뿐 조만간 전진과 승리의 때가 찾아온다.
누구에게나 살면서 시험은 있지만 시험은 드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다. 어떻게 시험에 들지 않는가? 그 비결은 “주님!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에 있다.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계속 준비하며 나아가면 시험이 오히려 축복의 발판이 된다. 사람에게는 수시로 마음이 흔들리는 상황이 생기기에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늘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다.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룩한 양철북 소리로 삼고 하나님의 뜻대로 힘써 살아감으로 시험을 잘 통과하고 승리하는 복된 심령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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