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남준  | 출판사 : 익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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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대망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고 육체의 쉼과 관계의 회복을 누리는 날입니다.” [김남준 목사(열린교회)가 들려주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실제적 지침] 김남준 목사는 본 책을 통해 청교도의 주일성수에 대한 내용을 평가하여 오늘날의 현실에 맞게 적절하게 계승하고, 방종과 바리새주의의 양극단을 넘어 두 가지 차원의 쉼의 균형을 다루어 참된 주일성수를 제시하고 있다.[더보기▶]




김남준 목사님의 <성수주일>를 읽으면서 각 챕트마다 일부분을 옮겨적었습니다.
가능하면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시고 죽 긁어다가 다른데로 옮기는 것은 좀 삼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글이 여기저기 복사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요?
햇볕같은이야기 6129-6187호까지 한편씩 나눈 글입니다.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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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오늘날 주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습니다. 더욱이 조국 교회에서 주일성수에 관련된 신자들의 세속적인 태도들에 대해 솔직하게 비판하는 설교를 듣는 것도 그리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조국 교회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고한 정체성보다는 출석하는 숫자를 가지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2.편의적 자유주의


오늘날 주일을 지키는 방식 중에 ‘편의적 자유주의 태도’는 주일을 지킴에 있어서 성경의 견해가 어떤지를 숙고하는 대신 자신들의 편의를 따르는 입장입니다. 오늘날은 신앙의 어떤 문제들을 판단할 때 성경과 신학을 의지하기 보다는 현실적인 삶의 상황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이때 인간의 편의와 자유는 어떤 문제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3.치우친 일원론주의


오늘날 주일을 지키는 방식 중에 ‘치우친 일원론주의’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를 예배로 보는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입증하는 성경 구절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를 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받으셔야 할 영광은 단지 좁은 의미에서의 예배만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삶 전체라는 것입니다.


4.치우친 이원론주의


오늘날 주일을 지키는 방식 중에 ‘치우친 이원론주의’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을 강조하는 입장입니다.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종교적 예배와 세속적 삶, 하나님을 향한 봉사와 인간을 위한 노동 등을 대립관계 내지는 상하관계로 봅니다. 이러한 입장을 주일성수에 적용할 때 신자는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모든 요인에 대해 전투적인 태도를 갖게 됩니다.


5.경험적 축복주의


오늘날 주일을 지키는 방식 중에 ‘경험적 축복주의’는 주일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성경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특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번영주의적인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 경험한 간증들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로써 이 견해는 신앙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호소력을 갖습니다.


6.주일의 규정


‘주일’은 문자 그대로 ‘주님의 날’입니다.(계1:10) 신약성경에서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네 번 등장하는데, 그 중에 세 번은 종말론적 심판을 의미하는 말로, 나머지 한 번은 그리스도의 날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 우리는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고 있는데,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타당성 있는 일인가?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신약의 주일 제도 안에서 영속성을 갖는가?


7.일요일은 태양신 숭배의 날?


안식교를 비롯한 일부 이단들은 기독교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로마제국 시대에 태양신 숭배의 날을 지키는 것으로 기독교가 이교와 종교적 혼합을 하여 배교를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접근을 하면 토요일도 땅의 신인 ‘사투루누스(크로노스)’신을 섬기는 날이기 때문에 안식교도 제우스의 아버지를 섬기는 날과 혼합되었다고 비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제국 안에 있던 수없이 다양한 종교들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종교통일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들을 하나의 국민정신으로 묶고자 하는 정서적 의도로 일요일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양한 종교들은 일요일에 각자 자기 종교의 의식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8.안식일의 기독론적 전환


신약성경에는 안식일이 기독론적 전환을 통해 오늘날 기독교에서 주일로 규정한 ‘안식 후 첫날’이 될 수 있는 근거와 역사적 사실들이 풍부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2:8) 또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막2:27)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 후 첫날 부활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사도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어 일곱 교회의 계시를 본 것이 ‘주의 날’ 곧 주일이었습니다. 그가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연대가 주후 90-96년 경이니, 우리는 여기서 이미 이때쯤에는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6일 창조 후의 안식보다 더 중요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9.부활과 주일


초대교회가 안식일보다 안식 후 첫날을 지키는 일에 더 무게중심을 두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매우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주일성수의 개념이 흐려지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부활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일성수에 대해 가장 올바른 전통을 세웠다고 평가되는 청교도들도 역사적으로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게 된 것에 대해 로마의 태양신 숭배 관습과는 상관이 없고,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신학적 사실 그리고 공교회의 역사적 결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10.안식일 제도의 폐지론-루터


루터는 십계명 중 안식일에 관한 제4계명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을 규율하던 것이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을 규율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루터는 안식일 제도가 그리스도의 구속과 함께 폐지되었다고 확신했지만, 그것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의식적 전통에 대한 것이지 안식일이 지니는 고유의 영속적인 의미까지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구약의 안식일 제도 안에서 드러나는 노동으로부터의 육체적인 쉼,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의무, 영원한 안식을 바라본 모상으로서의 지상적 안식일 개념의 신학적 또는 자연법적 계숭 같은 것을 인정했습니다. 다만, 안식일 제도 자체만 구약의 의식법과 함께 폐지되었다고 보았을 뿐입니다.


11.안식일 제도의 폐지론 -칼빈


존 칼빈은 제4계명의 의식적인 부분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4:10-11)라는 사도 바울의 주장을 근거로 제시하며, 날들에 차별을 두는 것은 미신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2.안식일 제도의 영속론 -청교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합당한 시간을 따로 구별해야 하는 것은 자연 법칙에 속하는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 가운데서도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구속력이 있는 적극적이며 도덕적이며 영속적인 계명으로, 주로 일곱 날 중 하루를 안식일로 정하여 그분을 향해 거룩히 지키도록 지정하셨다. 이날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었는데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부터는 일주일의 첫째날로 바뀌게 되었다. 성경에서는 이날을 ’주일‘이라고 부르는데 이날은 세상 끝날까지 기독교의 안식일로 지속되어야 한다.’라고 합니다.


13.조나단 에드워즈의 견해


성경은 두 종류의 창조를 말하는데 옛 창조와 새 창조가 그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구약의 교회가 옛 창조를 기념해야 했던 것처럼, 신약의 교회도 똑같이 새 창조를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엿새 동안의 창조 이후에 있었던 하나님의 안식과 동일하다고 본 것입니다.


14.찰스 핫지의 견해


찰스 핫지는 신약의 주일 제도는 궁극적으로 ‘온 인류에게 적용되어야 할 안식일의 기독교적인 적용’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주일성수가 종교적 지식을 증진시키며, 그것을 무시하면 이교의 사상이 팽배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구약 시대 안식일 제도의 본질적 의미는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신약시대 기독교에서는 주일제도가 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5.조국교회의 주일성수


조국교회가 가지고 있던 확고한 전통중의 하나는 주일성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평양에서 주일이면 거의 대부분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신앙에서 많은 규범들이 가지는 구속력들이 점차 사라지고 산업주의의 영향으로 편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태도들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일성수의 전통을 별 특별한 의미가 없는 낡은 전통의 유산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안이한 생각 속에서 기독교인의 삶의 진지함은 사라지고 신앙과 윤리의 기준도 느슨해져가고 있습니다.


16.역사적 배경


17세기 영국 청교도들의 주일성수에 대한 헌신은 순교를 무릅쓴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정치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청교도들에 대한 제임스 1세의 정치적인 핍박은 그들의 신앙에 대한 도전이었고, 이로써 청교도들은 주일성수 문제에 대해 더욱 단호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주일성수에 관한 청교도들의 기본적인 원칙은 말씀과 상식에 부합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예배와 예전의 경계를 지정해 주는 규범성과 양심의 자유를 위한 유연성을 동시에 제공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본 원칙 안에서 청교도들은 주일성수에 대하여 엄격주의적인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17.엄격주의적 주일성수


토마스 아퀴나스는 안식일의 계명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의식적인 의무로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노동을 그쳐야 하는 안식이고, 둘째는 도덕적 의무로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시간을 떼어두는 것이었는데, 이는 유대인의 안식일 준수에서는 없던 구분이었습니다. 아퀴나스의 구분은 이후 모든 안식일 엄수주의를 지지하는 신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습니다.


18.윌리엄 에임즈


윌리엄 에임즈는 “주일을 바르게 준수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쉼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 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쉼이 요구하는 바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모든 일을 중단하는 것이다. 사업상의 모든 거래, 활동, 축제, 스포츠, 이와 유사한 다른 일들로 인해 마음이 신앙의 실천들로부터 멀어진다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19.윌리엄 퍼킨스


윌리엄 퍼킨스는 주일 성수를 위한 의무들을 사랑이 아닌 개인적인 편의를 고려하여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주일에는 불필요한 여행이나 상거래, 각종 농사일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농담이나 스포츠나 도박도 멀리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서 그는 중심이 없이 겉으로만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과 우상숭배적 탐심이나 과식, 간음과 같은 안식일을 모독하는 행위 등도 삼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20.언약 신학 안에 있는 긴장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는 언약에서 하나님의 편무성을 강조함으로써, 신자의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강조하였고, 블링거와 같은 종교 개혁자는 언약에서 인간의 의무를 강조하는 쌍무성을 강조함으로써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반응하는 언약 당사자들의 믿음과 순종을 강조하였습니다.


21.루터와 칼빈의 주일관 차이점


루터는 주일은 율법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같은 동기로 지키는 것이 아니며, 주일이 주일이기 때문에 다른 날에 비해 특별히 거룩한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주일은 거룩한 날이기에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율법주의적 사고라고 보았습니다,
칼빈은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를 넘어설 수 없다는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 전적으로 합의하였으나, 예배의 구체적 전례의 채택과 주일성수에 대해서는 루터보다 엄격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22.그 날


청교도들은 구약 시대의 안식일이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이라고 보았고, 신약시대의 주일이 한 주간의 첫날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안식일과 주일로서의 계기적인 ‘그 날’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루터는 어차피 안식일 제도의 의식적인 성격이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기 때문에, 안식일의 영속적이고 신학적인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그 날’이 한 주간의 몇 번째 날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23.칼빈의 ‘그 날’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로 대체한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이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그대의 안식일이 예표하는 참된 안식은 우리 주님의 부활에서 성취되었고 그날을 바라본 예표들은 폐지되었기에, 주일은 그림자와 같은 예식에 집착하지 말라는 경고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곱이라는 숫자를 고수하여 교회를 거기에 묶어두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미신만 없다면 다른 경건한 날에 교회들이 모임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교회들이 단지 훈련과 정한 질서를 준수하고자 이런 날들을 지키기로 결정하였다면 그것은 허용할 수 있을 것이다.-칼빈<기독교 강요>


24.역사적으로 지켜온 ‘그 날’


구약의 안식일은 6일 창조 후의 하나님의 안식을,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지만 그것은 계기적으로 한 주간의 나중과 처음을 완벽하게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주일성수는 계기적인 ‘그 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교회의 결정에 의해 ‘정해진’ 한 주일의 한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만약 주일로 지키는 날을 개인이나 개교회가 함부로 결정하고 바꿀 수 있게 한다면 혼란과 무질서가 뒤따를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와 공교회의 결정을 따라 역사적으로 지켜온 날을 ‘그날’로 삼을 뿐입니다.


25.종교개혁자들의 주일성수 개념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주일성수 개념도 노동에서의 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에서의 안식일 제도와 상관없이, 주일에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함으로써 말씀을 듣고 은혜를 누리기 위한 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신자의 삶은 늘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이어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과 사회 구조적인 제약으로 인해 실제로 인간이 1년 365일 예배의 규례를 엄수하며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한 주간 중 ‘그날’을 따로 떼어놓고, 육체와 정신이 6일 동안의 노동에서 해방되어 하나님만을 앙망함으로써 육체의 쉼과 함께 영혼의 안식을 얻게 하였습니다.


26.두 가지 십계명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 준수를 강조한 십계명은 모세오경에 두 번 나옵니다.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입니다. 그 중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4계명은 그것을 지키는 동기가 두 곳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출애굽기는 ‘창조 사역 후 하나님이 안식하신 것을 기리는 것’이고, 신명기의 4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 종살이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을 기념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합니다. 이로 보아 십계명의 신학적 의미는 구속사의 전개에 따른 구원계시의 점진적인 발전과 함께 시대를 흘러가며 이행되고(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7.훈련의 삶


칼빈은 주일성수의 의무를 지켜야 하는 이유 첫 번째로 연약한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주일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신앙을 고백하도록 훈련을 받습니다. 이는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을 북돋우고 경건하게 살도록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28.구별된 삶


칼빈은 주일성수의 의무를 지켜야 하는 이유 두 번째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방 백성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칼빈은, 주일 제도는 거룩한 방식의 삶의 온전한 실천, 세상살이에 대한 사랑과 욕망으로부터의 쉼, 하나님께 대한 자기 봉헌의 실천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29.봉헌의 삶


칼빈은 주일성수의 의무를 지켜야 하는 이유 세 번째로 자기봉헌의 삶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른 신앙을 가진 이방인들에게도 안식일을 지키게 한 사실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주신 것은 자기 봉헌적인 삶의 의지를 회복하고, 엿새 동안 그렇게 살아야 할 자신들의 본분을 확인하고, 실로 그런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30.스윈녹의 견해


스윈녹은 ‘아침부터 밤까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한 지침’을 상세하게 제시했는데, 주일 전날인 토요일 오후 또는 저녁부터 행동과 마음가짐의 규칙을 제시하고 주일에 평일보다 일찍 일어나라고까지 권면했습니다. “옷을 입고 나서 은밀한 기도의 헌신에 방해가 없도록 하라. 기도의 골방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에 쥐어 주시는 품삯을 생각하라. 주일의 소중함과 의무의 중요성, 그리고 머잖아 매 안식일과 은혜의 때에 대해 당신이 해명해야 할 것을 생각하라.”


31.리처드 백스터의 견해


청교도인 리처드 백스터는 ‘가족들과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기 위한 지침들’ 이라는 제목아래 주일성수의 작은 지침들과 그 지침 아래 더 구체적인 실천사항들을 열거하며 아주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세한 규칙들을 제시하는 것에 반대하는 자들, 저 육적 사람들의 트집에 대항하여 잘 결심하라. 그들은 당신이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는 것은 필요없는 일이라고 믿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32.청교도들의 주일성수


청교도들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성경적인 교회와 신앙을 추구했던 사람들로, 연단된 꿋꿋함과 성숙한 경건을 보여 주었던 그들의 삶은 지금까지도 뚜렷한 존재의 울림으로 남아있습니다.
청교도들의 신학적 전통은 당시 대륙을 풍미했던 17세기 정통주의의 맥락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파 정통주의는 초대교회 교부에서 중세까지 이르는 보편 교회의 신학과 교감하면서 종교개혁의 신학의 유산을 세밀화하고 정교화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33.주일을 지키는 것에 대한 태도


청교도들은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일은 ‘영혼을 위한 장날’이요, ‘심령의 일을 위한 날’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대체로 그 전날인 토요일 밤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따라서 신자는 토요일 저녁을 주일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구별해 놓아야 합니다.


34.경계


청교도들이 탁월한 신앙과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그들이 제정한 구체적인 규칙들은 우리 시대에 그대로 답습해야 할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에 그들의 주일성수 규칙을 율법주의적으로 따르거나 바리새주의적인 태도로 남을 정죄하는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35.우리의 문제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대부분의 조국교회가 주일성수에 대한 확고한 신학적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일의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의미에 대한 목회자의 정리된 지식과 판단의 부족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목회적인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36.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주일이 무엇인지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확고하게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삶의 불편을 무릅쓰고 희생하겠습니까? 더욱이 그 주일에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축복들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것들에 대한 신령한 기대로 주일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37.우리시대의 신앙고백


우리가 따르는 교단 헌법은 우리의 교리적 표준을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와 ‘성경 대소요리문답’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조의 역사에서 ‘웨스트민스터 기준 문서들’과 ‘신도게요서’가 가지는 신앙적 가치의 탁월성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작성되었을 때와 정치, 사회, 문화적 배경이 현저히 다른 오늘날에도, 상당 부분의 ‘아디아포라’가 포함된 신앙의 문제들에 대하여 약 370년 전 영국에서 작성된 기준 문서들을 그대로 따른다고 간단히 답하는 것은 신앙의 역사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너무 쉽게 넘어가는 결정입니다. 우리는 우리시대의 신앙고백을 작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38.한국교회는 1907년에 머물러 있음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소집된 제1회 노회때 신경과 규칙을 정식 채용한 것을 그동안 예배 모범이나 주일성수에 관한 기타 조항들에 대해 첨삭을 거치며 개정되어 왔지만, 우리시대, 그것도 한국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적실성이 부족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 선교 초기에는 교회가 신학적 지식도 충분하지 않고 신학자들의 숫자도 부족하여 17세기에 작성된 표준 문서를 교단의 신앙고백으로 전용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우리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지도 못한 시기였습니다. 17세기 청교도들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적 상황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그것들과는 현저히 다릅니다.


39.그때와 엄청나게 달라졌음


우리가 신앙의 기준으로 삼은 유서 깊은 17세기의 신앙고백 문서들의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가치는 탁월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 18세기 계몽주의, 19세기 자유주의, 20세기 사회주의, 제국주의, 실존주의, 허무주의를 거쳐 해체주의를 거쳐 21세기인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조선의 멸망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남북분단, 독재정권의 출현과 부패, 군사정권의 폭압과 민주화, 그리고 지금은 세대주의, 첨단 미디어 시대에서 세계는 글로벌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조선시대 노론 소론, 동인 남인이 싸우던 선조대왕 때 만들어진 어떤 규칙을 지금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면 그것이 합당합니까?
우리 시대의 교회는 우리 시대의 언어로써, 현실과 치열한 고민과 씨름 속에서 자기의 입술로 고백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고민과 고백의 큰 틀 안에서 이 시대의 새로운 신앙고백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거기에 주일성수에 관한 교단적인 합의를 담아내야 합니다.


40.주일의 신학적 의미를 가르침


주일은 단지 종교적인 습관을 따라 준수하는 ‘그날’이 아닙니다.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를 모르는데 어떻게 ‘성수’하겠습니까?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를, 성경을 통해서 정확하고 풍부하고 쉽게, 그리고 반복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교인들과 자라라는 세대들이 주일의 신학적인 의미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구속사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주일의 신학적 의미 규정은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그리고 종말론이 만나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41.지식과 신앙


그리스도인의 지식과 신앙은 체계적인 구조를 갖출 때 사상으로서의 힘을 발휘할 수 있고, 윤리로서의 힘은 그 위에 역사하는 은혜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 지식과 은혜는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사랑은 올바른 지식과 총명에서 온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42.주일의 신학적 의미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생활은 사상적인 체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어야 확고한 정당성과 지속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일의 신학적 의미를 규정하는 작업 안에서 기독론과 신론, 인간론, 교회론과 종말론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주일의 의미를 잘 배우는 것은 단순히 율법적 의무를 교육받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격은 주일의 신학적 의미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43.영혼을 위한 장날 같은 기쁨


주일성수를 강조할 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의무만이 아니라 ‘무엇을 누릴 수 있는지’와 관계된 특권과 축복을 함께 강조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일에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신령한 복에 대해 사모하고, 영혼을 위한 ‘장날’ 같은 기쁨을 기대하고, 또 그 모든 것을 실제로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을 누리는 날입니다. 가족들 간의 유대나 교제의 기쁨, 더 많은 관용과 기쁨, 영적인 자유가 주어지는 날입니다. 주일의 신학적 의미에 대한 바른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주일을 노예처럼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날로 여기지 않고, 신자들에게 주신 독특한 영적 특권들을 누리는 날로 여기게 할 것입니다.


44.율법적 바리새주의를 경계함


개교회가 주일성수에 관한 세부적인 조항들을 끊임없이 제정하고 그것의 준수 여부를 감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이 주일을 어떻게 보내든지 교회가 내버려두자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주일성수에 대한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주의적인 태도를 가르치기 보다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 17세기 청교도들과 대륙의 정통주의자들이 견지했던 주일성수의 실천들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항구적인 원리들을 추출하여 성도들에게 감화력있게 가르치자는 것입니다.


45.확실한 처방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존재적 미천함과 도덕적 비천함을 인식한 신자들이라면 두려움과 의무감 속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과 죄 사함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 사이의 뚜렷한 격차를 모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주일성수에 대한 청교도들의 엄격주의적 조항들을 무조건 따르도록 가르치지 말고, 거기서 찾아낼 수 있는 항구적이고 성경적인 원리를 설교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경건한 삶을 총체적으로 회개하고 돌이켜 은혜를 받게 하는 것이 주일성수와 관련하여 율법적 바리새주의에 빠질 수 있는 교회적 위험에 대한 확실한 처방입니다.


46.그동안 조국 교회에서


그동안 조국 교회에서 주일성수에 대한 논의는 교회의 신령한 덕을 제고하고 신자들을 온전한 신자로 세우고자 하는 덕스러운 운동이기보다는 구체적인 표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 사용되는 때가 많았습니다. 더욱이 주일성수에 대한 율법주의적인 판단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를 저촉하고 외식들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경건의 유익과 분리되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과는 상관없이, 구체적 계명을 준수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구속보다는 자기의 의를 의지하게 하고, 준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양심의 부자유함이나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한 노골적 폐기를 부추기는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모두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47.자유주의적 방종을 경계함


주일을 신학적으로 구약의 안식일의 직접적 연장인 것처럼,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사항들에 대해서조차 주일성수의 규칙들을 지나치도록 상세하게 제정하고는 무조건 지키게 하고 이것을 준수하지 않을 때 정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일성수에 대한 아무 규칙도 없이 주일을 아무렇게나 보내도 좋은 것처럼 내버려두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느슨한 주일성수의 관습들은 그렇지 않아도 침체 상태에 있는 교인들의 영적 생활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48.실천적 방종을 막기 위하여


주일성수에서 신자들의 실천적 방종을 막기 위하여, 교회는 주일 성수를 위한 구체적인 준수 사항을 물질적 복이나 하나님의 징벌과 관련하여 설교하여 성도들을 유인하거나 정죄하기 보다는, 청교도들이 주일성수에서 견지했던 엄격주의적인 태도 안에 있는 성경적 원리들을 감화력 있게 설교하여 은혜를 받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인들이 그 원리들에 담긴 신앙심에 의해 스스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적용에 이르게 하여야 합니다.


49.주일 성수에 관한 개인 규칙


성령의 역사로 주일성수에 대해 깊은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구체적인 실천의 규범을 갖지 않는다면, 일관성 있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일의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주일성수의 의무의 아름다움과 행복에 대해 깊이 은혜를 받은 후에는, 스스로 그 지식을 따라 신앙과 양심에 합당하게 주일성수에 관한 개인 규칙들을 만들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50.자신의 삶을 규율할 목적


주일성수를 위한 개인 규칙을 정하는 것은, 남에게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기 위해 자신의 삶을 규율할 목적으로 누구의 간섭도 없이 스스로 작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 규범으로서의 주일성수의 개인적 규칙들은 공교회적 신앙고백이나 공적인 설교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얼마나 상세하게 정하여 주일성수를 위한 개인 규범으로 정할 것인지는 개인의 신앙과 양심에 달린 것입니다.


51.교회는 교인들에게


교회는 각 교인들이 주일을 거룩하고 온전하게 지켜서, 영혼을 예배와 진리로써 거룩한 은혜에 이르도록 고양하고, 육체를 편안한 쉼으로써 건강과 평안에 이르게 하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스스로 정한 주일성수의 엄격한 개인 규칙을 따르도록 다짐해야 합니다. 그렇게 개인적으로 제정한 주일성수의 규칙 중 어떤 것들을 어겼을 때에는 정직한 자기반성을 통해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파악하고 회복의 은혜를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주일성수 뿐만 아니라 삶의 전 방면에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경건에 결함이 있는지를 정사하는 기회로 활용하고 다시 분발하는 기회로 삼게 하는 것입니다.


52.신자들의 영적 변화


교회는 신자들의 영적 변화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청교도들의 탁월한 신앙과 신학, 철저한 생활 방식을 그저 ‘까다롭고 꼬장꼬장한 분리주의자들의 고집’ 또는 ‘타협을 모르는 비현실적이고 결벽주의적인 태도’라고 부정적으로 간주해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그렇게 높은 수준의 경건과 엄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경험한 영적 부흥 때문이었습니다.


53.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라


주일성수에 대한 논의를 할 때 으레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날 조국 교회에서 과연 주일 성수의 신앙적 필요성과 신학적 중요성에 관해 깊이 숙고하고 개인 규칙을 작성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신앙을 가진 교인들이 얼마나 되겠냐는 질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분명 영적인 어둠이 깊이 드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두가 눈을 감고 살아야 하는 것인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빛을 완전히 거두신 시대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54.성령의 각성케 하심


신자의 거룩한 삶을 위한 성령의 각성케 하는 역사를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들이 말씀으로 깊이 은혜를 받을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미학적이고 윤리학적인 감각이 상승되며, 이는 즉각적으로 그들에게 거룩한 존재가 되고 싶고 거룩한 삶을 살고 싶어지게 갈망을 느끼게 합니다. 신자들이 은혜로 말미암는 영적 각성을 경험할 때, 온전한 삶을 살고자 하는 거룩한 욕구는 탁월하게 증가하고, 주일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게 됩니다.


55.인간의 신령한 의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령한 의무는 신령한 세계의 아름다움을 경험함으로써 인간에게 사랑받게 됩니다. 명백한 주일성수의 의무에 대한 기피와 태만은 하나님의 위엄과 사랑에 대한 영적 무감각에 원인이 있습니다. 성령의 각성케 하심과 은혜 없이는 누구도 주일성수의 의무 속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배려를 읽어내지 못합니다.


56.체계적인 교리교육


지금부터라도 교회는 교인들에게 체계적으로 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청교도들의 견고한 삶은 확고한 교리적 지식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교리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을 공시적으로 조직화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신학적 논제에 대해 구속사의 전개에 따라 나타난 계시의 점진성을 고려하여 통시적으로, 성경의 전체 게시를 조명하여 평면적으로 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과 인간과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일들에 관한 신적 지혜를 의미합니다.


57.참된 부흥을 위한 기도


조극 교회의 참된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아무리 훌륭한 개혁주의 교리를 자신들의 신앙이라 고백해도, 그 고백을 따라 살게 하는 힘은 입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절대가치를 부정하는 상대주의와, 극단적으로 개인의 행복과 평화로 도덕과 가치를 대신하고자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의 격랑 앞에서 단지 입술로 하는 신앙고백은 파도 위에 떠 있는 검불과 같을 뿐입니다.


58.그날을 지키게 하는 최선의 방법


교회가 주일에 성도들에게 줄 수 있는 축복은 단지 육체적 쉼만을 강조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주일이 다른 날과 구별되는 특별한 은혜의 날임을 알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날 영혼의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59.주일 예배를 통하여


주일은 단지 이성적 가르침만으로 신자의 마음과 삶 속에서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거룩한 주일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부흥 없이는 거룩하게 지켜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에게 주일성수를 가르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주일 예배를 통하여 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각양 찬란한 신적 성품의 빛이 진리를 아는 지식과 함께 신령한 사랑으로 그들의 마음을 압도하여 주일성수의 의무를 버리고 누릴 수 있는 세속적인 즐거움들이 쓰레기처럼 느껴지게 하여야 합니다. ⓒ김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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