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남준  | 출판사 :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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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인생의 가치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며,진정한 인생의 깊이는 성취가 아니라 의미입니다.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천지 창조부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신자의 성화, 천국에서의 삶에 이르는 구원 계획 속에서 신자의 삶이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쉬운 교리서. 살아 있는 것에 급급하여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의 신앙적 의미를 알지 못하고 진정한 삶의 목적에 연관시키지 못하는 비주체적 존재들을 위한 인생 가이드.고달픈 현실에서 겪는 괴로움과 절망은 노력으로 극복되지 않는다.인생 여정에서의 갖가지 곤란에 담대할 수 있으려면 우리의 삶의 목적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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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준 목사님의 <내 인생의 목적 하나님>를 읽으면서 각 챕트마다 일부분을 옮겨적었습니다.
가능하면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시고 죽 긁어다가 다른데로 옮기는 것은 좀 삼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글이 여기저기 복사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요?
햇볕같은이야기 6188-6287호까지 한편씩 나눈 글입니다.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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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계의 시작, 하나님
창세기 1장 1절은 구약성경의 시작이 뿐 아니라 성경 계시 전체의 시작입니다. 또한 이 모든 세계의 시초와 인류 역사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이 위대한 선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 이 모든 세계가 그분에 의해 창조 되었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창조된 세계를 향한 어떤 뜻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하나님에 관한 질문
과학이 발달하여 인간이 하는 많은 일을 로봇이 대신합니다. 그 로봇이 아무리 인간과 흡사하다 하여도 로봇을 만든 제작자와 동급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뛰어난 로봇은 그것을 개발하고 만든 제작자의 능력을 더 높게 평가하게 할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위대함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분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3.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온 땅과 모든 만물 위에 지극히 탁월하셔서 어느 곳에서도 피조물과 구별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은 그분 안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존재적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4.드넓은 우주를 생각함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계는 우리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구뿐만 아니라 하늘과 우주 모두를 아우르는 가장 넓은 의미의 피조세계를 발합니다. 하나님 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성경은 ‘천지’라고 표현합니다. 드넓은 우주의 크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엄청난 크기의 우주 앞에 인간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요?


5.영원을 생각함
인간이 오래 산다고 해 봐야 100년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찰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시간의 흐름 안에서 생각할 때, 여러분이 100년을 살다 죽는 것이 한 모금의 구강 세정제로 죽는 입 안의 세균의 수명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끝없는 공간과 시간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6.지성의 한계를 생각함
우리가 온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간 지성의 한계 때문입니다. 저성의 한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이 모든 세계가 그분으로부터 창조된 것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은 이 세계에 익숙해질수록 익숙해진 방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7.살아계신 하나님
이 세계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증거의 파편들로 가득합니다,. 하나, 하나를 찾을 때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또 다른 것들과 서로 연결을 짓고 성경의 진리로 해석할 때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우렁찬 증거들로 가득합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말하기 때문에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소리가 온 우주에 가득합니다.(시19:1-4)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8.하나님을 아는 자의 복
여러분의 삶의 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지식이 여러분 속에서 열렬히 살아 역사해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 지식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발견할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허접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나의 인생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가치 있게 되며, 나의 존재가 존귀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9.하나님을 의존하도록 창조됨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공간과 시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주의 가장 거대한 별이라고 할지라도, 어마어마한 시간을 견디어 낸 그 무엇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과 가족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 중 최고의 걸작품은 인간입니다. 인간이 있음으로 이 세계는 더욱 빛나고,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10.하나님과의 무한한 간격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간격이 있습니다. 먼저, 창조주와 피조물간에 엄청난 격차가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하찮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무한한 존재적 격차가 있기에 피조물이 자신의 영광을 아무리 높이 쌓아올린다고 할지라도 창조주와 비교될 수 없습니다.


11.복음으로 부르심
복음(福音)은 문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나와 상관없이 남에게만 기쁜 소식이 아니라 오늘 나의 행복과 직결되는, 나의 이익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그런 의미에서의 기쁜 소식입니다. 이 기쁜 소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요3:16)


12.인격적인 신앙의 경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우리도 좋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의 생각을 일깨우고 마음을 감동시켜서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하십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입니다.


13.참된 기독교는 인격적인 신앙임
인격적인 신앙은 두 가지로 구성됩니다. 지성의 설복과 의지의 감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지성의 설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진리의 말씀으로 다가와서 인간의 지성에 말을 건네십니다. 인간 지성에 당신 자신의 존재와 성품을 호소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스스로 납득하여 받아들이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지성을 설득하십니다.


14.신앙-사랑의 싸움
 성도의 거룩한 삶은 얼마큼 대단한 성과를 하나님 앞에 남겼느냐가 아니라 어떤 삶의 과정을 통해 살아왔느냐에 의해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로 우리가 주님을 섬기며 살아왔는지 다른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두 아십니다.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달아보십니다.


15.세상을 창조하심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아직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세계까지 창조하셨습니다.(창1:1)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이 세계가 없으면 뭔가 불편하고 모자라는 것이 있어서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16.인간: 하나님께서 만드심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을 만드셨을까요? 사람이 만든 모든 것에는 그 목적이 있습니다. 확성기는 소리를 크게 내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전등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는 눈에 보이는 물건에 비해서 얼마나 놀라운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까? 이렇게 뛰어난 가치를 지닌 인간을 하나님께서 아무런 목적이 없이 만드셨을 리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당신의 뜻으로 품고, 이 세계 속에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17.신자: 그리스도께서 재창조하심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음으로써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잠시 좌절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 둥 일부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 살게 하십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 것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망가진 천지 창조의 목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속하신 십자가는 창조와 재창조 사이에 있습니다.


18.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성경의 첫 번째 관심사는 참 사람이 되는 것 곧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바른 인생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에 대한 숙고가 필요합니다. 구원이 필요한 인간의 비참함과 그 비참한 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19.참사람이 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천국에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진정한 효용은 죄로 인해 망가진 사람을 이 세상에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그의 인생을 통해 구현하며 행복하게 살게 하는 데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데 기여하면서 사는 것, 그래서 나 라는 인간 하나가 이 땅에 존재함으로써 어떤 아름다움이 이 세계에 추가되는 것, 그것이 선한 일입니다.


20.자신의 자리에서
쓸모없이 창조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목적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이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기 위하여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께서 정하신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21.하나님께서 도우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도록 도우시는데, 이 일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목표를 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간절히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며 공급하십니다. 물질이나 돕는 사람, 재능이 모자라서 하나님의 일을 못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2.그 길을 걸어가도록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의도를 알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리하십시오. 그래서 얻은 것들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사용했을 그러한 방법으로 사용함으로써 이 세계의 한 구석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목적대로 돌아가도록 이바지하며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잇대어 살 수 있는 자복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23.나님을 떠난 인간
 타락 이후의 인간은 죄 아래 있는 인간입니다. 범죄한 인간들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통로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타락 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모든 아름다운 지위를 상실하였고, 죄를 떠나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고통과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24.인간에게 부여하신 영광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의 의미는 인간이 영광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하는 탁월한 지위와 상태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전에 부여받은 탁월함과 올곧음, 순전함과 사랑, 영혼의 거룩한 기능 등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무한히 공급받는 거룩한 사랑과 영적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25.하나타난 하나님의 의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문제는 끝이 없이 나타납니다. 재물이 부족할 때도 있고, 능력이 모자랄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파괴된 관계로 인해 괴로운 날을 보내야 하는 시절도 있습니다. 지혜가 부족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현실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것들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입니다. 그것이 있음으로 우리는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고, 그것이 없을 때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고통스러운 환경에서는 아파하고, 좋은 상황이 펼쳐지면 무작정 기뻐하는 것입니다.


26.구속의 의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죄로 인해 망가뜨린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구원받을 모은 인류를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그들의 죄를 당신이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한 합당한 진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아내셨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당신은 죽임을 당하시고, 당신의 품에 있던 자 들의 죄의 값을 치러 주셨습니다. 이것이 속죄입니다. 이 속죄의 결과로 우리는 구속을 받게 됩니다.


27.십자가로 이루신 구속
죄는 인간이 지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 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의입니다. 만약 인간이 죄를 지었는데도 죄에 대한 합당한 심판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모순이 되는 일입니다. 죄에 대한 대가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인간을 모두 벌을 받아 죽게 하셨다면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담당케 하여 형벌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고, 그 대가로 인간들을 속량해 주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확고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28.무엇으로부터의 구속인가
십자가는 율법으로부터의 구속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죄에 대한 형벌이 어떠한 것인지를 선언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도 완벽하게 율법을 지킬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의 저주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성시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그분의 의를 덧입어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29.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으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왜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힘들고 괴로운 날들이 왜 없겠습니까? 그때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믿으며 감사함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그 생명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졌기 때문에 맨정신으로 이길 수 없는 역격과 시련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합니다. 사랑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게 하는 정신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30.여자의 후손
아담과 하와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류는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생겨납니다. 그러니 결국 온 인류는 한 몸에서 유래하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만약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인류는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는 사랑의 고백을 나누는 거대한 가족 공동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바라셨습니다.


31.교회를 세우심
하나님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인류를 재창조하실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재창조 된 인류를 통해서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잠시 멈춘 것 같았던 당신의 위대한 창조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류의 완성을 위한 종자씨로 교회를 택하셨습니다. 교회는 머리와 지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이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닙니다. 시간적으로는 인류 태초부터 시작해서 종말까지 이르게 될 모든 성도들의 연합이며, 장소적으로는 이 모든 세계를 포괄하는 모든 구원받은 무리의 연합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보편교회입니다.


32.교회의 머리: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당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머리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식적으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부활사건 이후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어버지께 영광을 도릴게 하셨느니라.”(빌2:9-11)


33.그리스도와의 원리적인 연합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이 누구이고, 인간이 누구이며, 이 세계가 무엇인지를 탐구해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자신의 인생을 그리스도 안에서 주체적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하는 힘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과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에 접붙인 바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참사람답게 살게 하는 자원을 하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는 영적인 통로가 열렸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우리에게까지 스며들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34.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
기독교 신앙의 유익은 삶 가운데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신앙의 본질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최고의 가치는 사랑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부여받아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실제적인 연합입니다.


35.교회와 함께 완성되는 구원
우리는 홀로 그리스도께 연합된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거대한 몸의 일부가 되어 그리스도께 연합되어서 원리적인 연합을 누립니다. 이것은 또한 실제적인 연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충분히 부어지고, 우리가 교회에 접붙여 있기 때문에 그 생명과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36.교회를 사랑하며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단지 그분의 생명과 은혜를 공급받는 수동적인 몸의 일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엡4:16), 그 생명과 사랑을 충만히 공급받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봉사하게 하려고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주셨습니다.(앱4:12)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37.교회의 확장과 성숙
교회는 우주적인 완성을 바라보며 점점 더 확장되어 가야 하며, 동시에 점점 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교회가 확장된다는 것은 거듭남으로써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참된 성도들의 숫자가 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아무리 커진다고 하더라도 참된 중생과 회심이 없는 교회의 외적 성장은 진정한 성장이라 할 수 없습니다.


38.영적 성장의 필요성
 어린아이는 판단과 이해에 있어 미숙하고 의지도 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굳게 서 있지 못하고 흔들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이 세상에서 소외될까 봐 혹은 무엇이 옳지 않은 것인지조차 분별이 되지 않아서 세상의 풍조에 휩쓸립니다. 그러나 신앙의 대의는 자기가 믿고 배우고 확신한 바를 따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39.신자의 영적 성장
 지식과 판단에서의 지성적인 성숙입니다. 어린  아이는 지식이 충분하지 않고 판단력이 흐리기 때문에 언제나 지식과 판단에 있어서 결함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지식과 판단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의해서 증진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성경 말씀을 잘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구체적으로 성경의 내용을 배우고 교리를 습득해 가는 것입니다.


40.그리스도를 닮아감
이 세상을 향한 신자의 최고의 섬김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신자는 세상에 있는 것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의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행3:6)


41.참된 생활을 함으로
우리는 참된 생활을 함으로써 영적 성장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참되다’ 라는 것은 진리에 부합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간혹 나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하나님과 매우 가깝게 있는 듯한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아는 진리에 부합하는 참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2.사랑 안에서 삶으로
우리는 사랑 안에서 삶으로써 영적 성장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실제로 누가 행복한 삶을 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도 기꺼이 십자가에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43.교회를 통해 이루는 성장
하나님께서 교회를 존재하게 하신 이유는 먼저 하나님을 위함입니다. 예배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헌신이 바로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또한 교회는 이 세상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 세상을 향한 복음 전파와, 선교, 구제와 자비로운 행위로 교회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섬깁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교회 자신을 위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성도들을 성장하게 하신 후에 교회가 그들의 도움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44.택하신 족속:선택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입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1:2)


45.왕같은 제사장:사명
그리스도인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벧전2:9) 이것은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드려주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죄로 불결해진 인간을 제사라는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입니다.


46.거룩한 나라:구별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나라입니다.(벧전2:9) 거룩한 나라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함은 구별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 구별되었다는, 즉,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해 하나님께 선점되었음을 뜻합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을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바쳐진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47.소유된 백성:사랑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벧전2:9) 소유된 백성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나누는 사랑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소유’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히브리어 동치어가 ‘값진 재산’ ‘특별한 보물’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값진 재산이며 특별한 보물인 것입니다.


48.빛 가운데로 불러주심
하나님께서는 어둠에 있던 우리를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한 때 어둠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이 세상의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 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좋은 데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큰 능력으로 우리를 어둠에서 불어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49.기이한 덕을 선포케 하시려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마땅히 하나님의 덕을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직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사명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셨는지, 우리에게 어떻게 소명을 주셨는지에 대해 사람들에게 상세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언어적 선포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 존재를 아우르는 선포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50.전파하는 선교적 삶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게 된 때부터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고정하였습니다. 물론 거룩한 목표를 위해 살 때 우리의 삶에는 고난과 희생, 아픔과 좌절, 눈물이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삶을 통해 이 세상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덕들의 열매를 볼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충분히 기쁠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 쓰임받는다면 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일까요?


51.선하심을 찬양함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은 다윗은 약 80여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여러분은 그 많은 시편들 중 압도적인 주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찬양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은 영원불변하는 것이었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 끝까지 가득 찬 관대한 것이었습니다.


52.선: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상태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시107:1) 그런데 이 선이라는 것은 단순히 ‘보기에 아름답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계획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 선은 인간이 생각하기에 ‘좋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룬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하게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선하게 생각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53.있는 선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더 깊이, 더 많이 만나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손이 나를 무엇으로 빚든지 그것이 가장 선한 것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면 나 보기에도 좋은 것이라는 확신으로 우리를 주님의 손에 맡겨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맞보라, 그리고 알지어다.”(시34:8)


54.경험된 선
맑은 하늘 아래 졸다가 깬 개가 하늘을 향해 짖어댄다고 태양이 빛을 잃겠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이 계시니 안계시니, 좋은 분이니 나쁜 분이니 아무리 떠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태양처럼 변함없이 거기 계셔서 당신의 선하심을 모든 피조물에게 나누어 주십니다.(약1:17)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객관적인 선하심이 신앙 안에서 주관적으로 경험될 때 우리 자신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55.선을 경험하는 믿음
우리가 애매한 고난을 당하든지 혹은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고난을 당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당신의 선하심을 믿고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선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한사람을 구원해 놓으신 계획이 있습니다.
가장 초라해 보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주실 때는 그를 통해 이루고 싶은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임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선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56.누가 선을 경험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환경과 싸우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을 해서 밥을 먹고 사느냐가 아닙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인생이 어디를 향해 가느냐 입니다. 인생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심으로 우리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자신의 인생의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십니다.


57.하나님의 선과 인간의 행복
인간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다윗은 비참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4:8) 


58.참 행복에 이르도록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잃어버린 복을 당신 안에서 다시 누리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의 부활과 부활로써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만세전에 예정하셨고 시간과 공간의 펼침을 통해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 선한 일들을 우리를 통하여 이룸으로써 이 땅 한 구석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드러내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도록 끝까지 섭리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가 됩니다.


59.그리스도를 위한 은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합니다. 은혜가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계획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께만 영광이 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진정한 행복입니다. 이 둘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60.자기 만족을 위한 은혜가 아님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은혜의 용도는 은혜가 주어진 통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은혜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전가되고, 그 교회에 우리가 영적으로 접붙여 있기 때문에 신부가 누리는 그 은혜를 우리도 받아 누립니다. 그래서 이 은혜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자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61.교회를 위한 고난
충만한 생명력과 놀라운 은혜를 유지하며 살던 비범한 사람들은 모두 교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디에서든지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드려 희생하였습니다. 자기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케 함으로써 자신도 주님 앞에 온전케 되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워 교회를 온전케 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온전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62.세상을 위한 고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또한 이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단지 교회의 구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결국 이 세상의 구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살아가셨을 그 섬김과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임을 알기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금 이곳에 계셨으면 하셨을 그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63.삶으로 아멘하라
그리스도 예수만을 위해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방해하는 것들을 꺾어버리고 삶으로 아멘을 고백하는 사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세상의 즐거운 것과 유익한 것이 있지만 내게 주신 은혜가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알기에 부당한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 내게 주신 은혜가 너무 놀라워 나를 버리고 예수님을 붙드는 사람, 자기의 뜻을 버리고 예수님을 위해 살기에 고난의 길을 택하는 사람, 수많은 우익과 명성이 기다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삶으로 아멘하기 위해 고난과 무명의 길을 택하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를 붙들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기에 고난 받는 믿음입니다.


64.사랑하기에 고난 받음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든지 그렇지 않든지 와는 상관없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기 안에 충만하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며, 어리석은 자를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치고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베풀고 봉사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주신 목적에 따라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소명을 은혜 안에 담아두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소명이고, 신자는 이것 때문에 고난을 받습니다.


65.복음을 믿는 다는 것
삶이 온전히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것, 그분께만 드려지는 삶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달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오직 한 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 큰 은혜를 주셔서 잠시 지나는 이 인생길에서 허무한 것을 붙드는 대신 영원한 것을 붙들며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66.기뻐하라
우리에게 고난과 시련이 끝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기쁨도 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슬픔과 고통이 찾아올 때에도 그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67.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우리는 종종 이 세상에서 시련과 역격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마치 이 세상에 홀로 던져진 것 같은 외로움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죽는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에게 오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입니다.(히7:25)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68.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구약 시대 제사장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지만 대제사장은 언제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직무는 일년에 한 차례, 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죄를 하나님 앞에 속함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히9:7)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대제사장이 되어 구원받을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영원한, 단번의 제사를 드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69.보좌 앞으로 나아가라
성경은 우리에게 보좌 앞으로 나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를 속죄해 주신 이유이며, 우리가 어떠한 인생의 시련과 역격을 만나든지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주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역경에 처한 우리를 돕고, 사망의 위협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입니다.


70.은혜를 받기 위하여
우리는 은혜를 받기 위해 보좌 앞에 나아갑니다. 성경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을 요청합니다.(히4:16)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때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때가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해야 할 때,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인내해야 할 때, 시험을 당하거나 유혹을 받을 때, 나 혼자서는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이런 특별한 때를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도우시는 분이시니 그 은혜를 받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71.담대히 나아가라
히브리서 기자는 ‘담대히’ 나아가라고 말합니다.(히4:16) 우리가 항상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성령 충만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애워싼 삶의 상황은 우리에게 너는 희망이 없다고, 네가 갖고 있는 모든 자원과 능력보다 너를 애워싸고 있는 상황과 환경이 훨씬 더 엄중하기 때문에 너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압박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72.그리스도로 인한 은혜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지만 우리는 그것에 접근할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해 친히 그분은 대제사장이 되어 자신을 제물삼아 바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도의 고전적인 형태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보다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이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인한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73.불붙는 하나님의 사랑
호세아는 자신의 아내 고멜을 진심으로 사랑하였습니다. 고멜이 수시로 남편의 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남자를 따라갔을 때도 호세아의 마음 속의 사랑은 진실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내 고멜이 먹을 것이 떨어져 다시 집으로 들어오면 그녀를 받아 주었습니다. 호세아의 이 사랑은 고멜의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끊임없이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였습니다.


74.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게 하는 근본적인 힘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와 그렇지 않은 성도의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왜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서가 아침 구름과 같이 쉬 사라지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견고하고 오래도록 지속될까요? 이에 대한 모든 답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다른 민족과 구별된 정신과 삶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원동력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인 힘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곧 사랑입니다.


75.기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죄를 뉘우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못할 때 즉시 우리를 때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십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불순종과 잘못 때문에 도래한 쓰디 쓴 열매를 맛보고 우리의 죄를 뉘우칠 때까지 말입니다. 기다림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76. 주님의 얼굴을 구하기까지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악인에게 향할 때는 징계로, 사랑하는 자녀에게 향할 때는 은총으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의 최고의 특권은 주님의 얼굴 빛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77.고난을 사용하심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들을 나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나의 행복을 증진시킬 궁리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고통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멀리 한 자신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그 고난의 아픔 속에서 인간은 자기를 도울 분은 결국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78.회개를 결단케 하심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돌이키시는 하나님에 대해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6:1)


79.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함
하나님께서는 부모처럼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때로 자식이 올바른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회초리로 때립니다. 책망하며 나무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도 자녀를 향한 그 사랑은 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운명과도 같습니다.


80.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고난과 시련을 만날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적은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은 사람은 마음이 가난해져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녹이십니다. 우리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분이신지를 더 깊이 알게 하시고, 그 앎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보게 하십니다.


81.확신하는 한 가지
그 무엇도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창세전에 이미 나를 향해 예정되었습니다.(엡1:4) 그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기독교의 유익은 이 확신 속에서 사는 데 있습니다.


82.끊을 수 없는 사랑
현실이 냉혹할지라도 지울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사망이나 생명, 천사나 사탄, 장래 일이나 현재 일, 높음이나 깊음 등에 의해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83.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라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사랑하며, 자기를 반성하고 부인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진전을 이룹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열고 더욱 충만한 하늘의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84.그 생명으로 살라
우리의 인생에 고난은 끝없이 찾아옵니다. 문제는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현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자원이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자원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이 생명과 사랑입니다. 그 생명과 사랑을 충만히 누림으로써만 우리는 인생의 이 고통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85.그 사랑으로 이기라
만약에 우리가 혼자라면 환란을 당하는 것, 곤고한 일을 만나는 것, 박해를 받는 것, 기근과 적신, 위험과 칼의 시련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 중 어느 것도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86.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우리는 실패와 좌절이 좋은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늘 이기고 싶어 하고, 극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잘 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잘못된 삶의 좌표, 어그러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려둔 채 승리만 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탐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지 않습니다.


87.무너진 예루살렘
예레미야 애가는 애가(愛歌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애가(哀歌통곡의 노래)입니다. 주전 586년경에 바벨론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유다를 멸망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때 찬란한 영광으로 빛나던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말발굽 아래 유린되고 파괴되었습니다. 그 비참한 때의 예레미야 선지자가 멸망당한 예루살렘 한 가운데서 눈물로 쓴 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의 함락은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88.하나님의 성품을 회상함
나라는 멸망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거룩한 성전은 훼파되고 여기저기서 울부짖음이 들려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의 군대들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그 무엇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였습니다. 자신들이 비록 징계를 당하고 고난과 시련을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자신들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언약의 백성이라는 사실은 그 무엇으로도 취소될 수 없었습니다.


89.신실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잘못한 이스라엘을 때리시는 것은 이 백성들과 맺은 관계를 계속 누리고 싶어 하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심판은 이스라엘을 당신과의 관계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당한 징계와 환란은 큰 것이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화가 나서 그 백성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는 이 징계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로 부르고 계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았습니다.


90.기업 사상
기업은 일차적으로 땅을 가리킵니다. 그렇지만 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과 유무형의 가치가 있는 명예나 재산, 지위등을 모두 가리켜서 기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업이란 말이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당을 차지하고 나서부터입니다.
땅은 곧 생명의 근원이었습니다. 거기에 씨를 뿌려 얻은 수확으로 자신과 가족들이 먹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태어날 후손들도 그 땅을 기반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업은 단순히 먹고 사는데 필요한 재산의 양태가 아니라 ‘생명’으로 보는 것이 성경적인 사상입니다.


91.나의 기업이신 하나님
신앙의 진수는 나같은 인간을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여기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나도 하나님을 기업으로 여기며 그 관계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92.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신자의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은혜 아래 나의 인생 전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을 이 세상에서 잠시 낙을 누리는 것보다 훨씬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고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93.본향을 사모하며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것은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성을 소망하며 그 성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낙심된 일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완전한 기업 속에 있는 안식과 축복을 바라보며 우리는 험악한 세상을 걸어갑니다.


94.죽음 이후의 인간
신자든지 불신자든지 모두 때가 되면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불신자에게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지만 신자에게 죽음은 그를 보다 더
행복한 상태로 이끌어가기 위한 성화의 과정입니다. 이 세상에서 온전해지고자 애써도 온전해질 수 없었던 그 사람을 죽음의 때에 하나님께서 성화를 완성시키십니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적합하게끔 그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 이후 그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주님과 대면하며 살아갈 날을 사모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95.위로가 있는 나라
하늘나라는 위로가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태어날 때부터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나고 마지막 죽을 때에도 비통한 울음 속에서 정든 세상을 등집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의 눈물을 닦아줄 만한 사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모두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닦아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위로는 성도의 영원한 위로이고,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위로입니다.


96.영생이 있는 나라
하늘나라는 영생이 있는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질 위협 없이 거룩하신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사랑하는 성도들과 하늘 가족으로 살아가게 될 곳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한량없이 누리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살아갈 것입니다.


97.해방이 있는 나라
하늘나라는 해방이 있는 나라입니다.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남은 날수를 우리는 알 수 없으며 정해진 날 동안 우리가 강건하게 살지, 연약하게 살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길 바랍니다.


98.그리스도께서 계신 나라
온 땅과 하늘에 뛰어나신 그리스도, 그분의 광채를 모든 천사와 사람들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매료될 것입니다. 믿음은 모두 현실로 나타나고 소망은 성취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분의 아름다움을 목도한 자마다 그분을 더 열렬하게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99.최대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곳
그날에 우리는 천군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할 것입니다. 그분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온 마음을 다하여 찬송할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며 늘 우리와 함께 하셨던 성령님께 한없는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릴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고난과 시련이 끝없지만 그 나라에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랑의 노래가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00.그날을 기다리며
신앙의 출발도 중요하고 신앙에서의 업적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죽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죽느냐는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매일 매일을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은 향기로운 제물과 같이 하나님 앞에 드려질 것입니다.  ⓒ김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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