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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8:2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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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18.9.16 주일예배 설교 여의도순복음교회 |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마태복음 8장 23~27절)
서론
‘고난을 다스리는 믿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가지고 5000명을 먹이고 난 다음 주님이 이제 제자들을 데리고 호수를 건너서 자기가 옛날 고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던 중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풍랑 위 바다에 띄워진 조그마한 배의 뒷머리에 주무시면서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제자들은 곧장 물에 빠져 죽겠거든요.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서 깨웠습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였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파도야, 바람아, 잠잠하라.” 그러니 파도도 그렇게 큰 파도가 삭 없어져버렸어요. 바람이 삭 그쳐버렸어요. 놀랍고 굉장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주 놀란 얼굴로 예수님을 쳐다보니 예수님께서 “왜 두려워했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믿음이 작은 자들을 보고 꾸짖었습니다. 우리 인생도 살아가면 인생의 파도를 겪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도 역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야지 우리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큰 고통을 당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본론
1. 절대 믿음의 모범
예수님과 제자들을 물에 빠뜨려 죽이려고 한 과거의 마귀의 수단은 통과가 되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3절로 24절에 보면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큰 놀입니다. 적은 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큰 놀이라 하면 한강같이 조용한 강물이 아닙니다. 태산을 뒤엎을만한 파도가 친 것입니다. 근데 거기에 조각배 하나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태워서 건너가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눈도 깜짝할 사이 없이 물에 빠져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조각배에 타고 그 놀을 겪으면서 주무십니다. 사람이 생각해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데, 감당하시고 거기에서 주무시니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 의지하면 못 의지할 것이 없다. 할 수 있거든이 무엇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 참말인 것입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놀과 같은 시련을 겪을 때, 적은 시련이나 큰 시련이나 예수님이 오시면 까딱없다고 확신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랜 목회생활 동안에 하나님 앞에 중요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 교훈이 뭐냐 하면, ‘귀신과 같이 살지 마라. 항상 귀신을 쫓아내라’ 사람들이 이 세상에 귀신이 와글거린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귀신이 가는 곳마다 와글거린다는 것을 못 보니깐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귀신과 같이 살지 말라’고 나보고 ‘항상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수차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라’고 그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잠 잘 이부자리를 펴고 드러누워 귀신을 쫓아냅니다. “이 더러운 귀신아! 나하고 같이 잘 수 없다. 내 어느 곳을 괴롭히는 괴로움을 데리고 물러가라!” 그리고 어떤 때에는 밤중에 소변을 보고 싶고 몸이 괴로울 때, 그대로 자면 안 됩니다. “하나님, 몸이 괴롭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너 더러운 귀신아! 네가 나를 괴롭혀도 예수님이 계시므로 내가 너의 압박에 들어가지 않는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그 다음 잠을 깨고 난 다음 새벽에 일어날 때, “이 귀신아 오늘은 새로운 날이다. 나하고 관계가 없다. 너희가 훼방을 할 수 없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그러고 내 몸에 허약이 있고 괴로우면 주님께 기도하여 치료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귀와 귀신들이 와글거리는데, 이걸 우리가 쫓아내지 않고 같이 살면, 우리의 생활에 귀신의 방해를 많이 받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귀신을 쫓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나니’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마귀와 상관없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대적을 해야 피하지, 가만히 있는데 피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삶에 풍랑이 일어날 때, 두려워하지 말고 마귀를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호하게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도망치는 것입니다.
시편 55편 22절에 보면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주님이 주시는 이 보증이 놀랍습니다. 우리가 풍랑이 불어 닥치는 상황에서 평안히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무슨 말이냐 하면, ‘절대 믿음을 가져라’ 그냥 믿음이 아니라 ‘절대 믿음’을 가져라. 절대 믿음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작은 자들아” 적은 믿음을 꾸짖었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태산을 옮길 수가 있는데 그보다 더 작은 믿음을 가지고 꾸짖음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은 단순히 마음이 약한 문제가 아니라, 불신앙의 문제인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야훼시니라’ 우리가 아무리 계획을 해도 하나님이 그 길을 완성하는 것이니깐, 아무리 능력을 다해서 하나님 없이 길을 계획해도, 하나님 없이는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집을 짓는데 도움을 주지 아니하시면 집 짓는 자가 헛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절대 신앙인 것입니다. 절대로 믿고, 절대로 맡긴다.
인생이 위기를 만났을 때 절망하지 말고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62편 8절에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피난처가 되신다는 겁니다. 시편 34편 18절로 19절에 ‘야훼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야훼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신실하게 믿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바람처럼 생각하고 맙니다. 이제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에 예수님께 절대 의지하고, 절대 사랑하는 태도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맡기느냐.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워 구원을 요청했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깨워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는 것을 깨워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깨우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깨웁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세계의 교회를 흔들고 깨우는 것은 새벽기도, 철야기도 하는 교회가 세계를 다니면 열 손가락을 헤아려서 얼마 안 됩니다. 새벽기도 하는 것을 강조하면 놀랍니다. 왜? 새벽에 기도한다는 것은 그 시간이 잠이 제일 달콤하다고, 새벽기도를 할 수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고 금요일 날 철야기도도 말만 철야기도지 방문기도입니다. 교회 와서 한번 보고 그냥 집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자들이 놀에 흔들리면서도 주무시고 있는 예수님을 본받아서 철야기도, 새벽기도 이 여러 가지 기도의 방법을 통해서 기도해서 예수님을 깨우시면,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주님이 우리가 시험을 당해서 낭패하게 만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 고난을 다스리는 방법인 것입니다. 제일 마귀가 무서워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2. 환경을 극복하는 믿음
그 다음에는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보면,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에게 재앙을 주거나 환난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평안하게 하고 희망을 주는 것이 성령님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로 7절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축복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시험에 떨어질까 두려워하고, 실패할까 두려워하고, 친구에게 상처 받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었다는 우리들은 두려움에 떨리는 것이 나이를 먹을수록 두려움이 더 많아집니다. 생활에 시험이 들까, 일이 잘될까, 몸이 병들까, 이러한 두려움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자녀의 앞날 때문에 두렵고, 병에 걸리지 않을까 두렵고, 불안한 노후가 두렵습니다. 혹시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는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마음에 들어와서 억누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이겨내려면, 풍랑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풍랑이, 놀이 내려치는데 그 위에 조그만 조각배에 예수님이 주무시니깐, 예수님은 안 보이고 그 놀과 물결만 보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다스리는 삶을 살려면, 만사를 제쳐놓고 예수님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갈보리산 위의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계신데, 십자가를 보지 않고 갈보리 산만 바라보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말할 필요도 없고, 우리 주를 믿는 사람도 문제가 다가오면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문제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감사하지 않고 문제를 바라보고 탄식을 하고 뒤로 물러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34편 4절에 ‘내가 야훼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사도행전 2장 17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1서 5장 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고, 기도하고, 이런 것이 합쳐져서 우리가 세상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과 기도, 우리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하면 터널을 통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우리가 이 도로에서 저 도로 가는데 터널이 몇 개 있습니다. 우리가 차를 타고 이 터널을 지나갈 때 겁을 내서 떠는 사람 있습니까? 핸들 잡고 덜덜덜덜~“아이고 이거 어쩌나” 그렇게 하는 운전수가 없습니다. 택시뿐만 아니라 자기 자가용을 끌고 갈 때도 차를 터널을 통해서 갈 때 안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터널에 들어가면 출구(입구)가 있으니 반드시 나가는 입구(출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긴 터널을 간다고 해도 들어갈 때 벌써 마음속에 출구가 보입니다. 그러므로 터널이 겁나지 않습니다.
인생에 터널이 많이 다가옵니다. 우리 인생에 적은 터널, 큰 터널이 다가오는데, 겁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들어가는 데가 있으면 나오는 데가 있습니다. 들어가기만 하고 나오지 못하게 나오는 길이 없는 인생의 터널은 없습니다. 들어가면 나갑니다. 주인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터널은 두려워 떠는 사람이 없는 것이 출구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고난이란 터널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눈에 보이는 것 없고 손에 잡히는 것 없지만, 출구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내 말을 따라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모든 터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출구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나도 출구가 있기 때문에 컴컴한 터널을 지금 지나가고 있어도, 얼마 안 있으면 출구가 나올겁니다. 여러분도 어려움을 당하면 출구를 바라보면서 출구를 통해서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은총을 주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이사야 43장 1절~2절)’ 고난 중에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 멋있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3. 긍정적인 믿음의 고백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야훼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편 19편 14절)’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 말을 하고 살아야 됩니다. 근데 이 말이 4차원의 영성으로서 말은 우리가 형체를 볼 수가 없습니다.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이 있는데 보질 못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권능이 큽니다. 왜?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있고, 지금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이 저희와 함께 있으니깐 우리가 말하는 것이 창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은 말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는 것도 말을 통해서 축복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줄 때 언제나 말부터 먼저 하신 것입니다. “동쪽을 보라. 서쪽을 보라. 남쪽을 보라. 북쪽을 보라. 네가 보이는 그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식들에게 주겠다.” 축복도 말로써 주셨지, 실제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로써 주시되 시간이 지나매 그 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굉장한 언약의 은혜를 여러분 마음에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야훼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편 19편 14절)’ 입의 말, 마음의 묵상, 이것이 이루어지길 원하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축복을 주려거든 창조적인 말을 이웃에게 하십시오. 말이 이웃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아이고 일이 잘 되겠네,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 잘된다.” 그 말은 축복이 그 말을 신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잘되게 하기 위해서 축복을 해야 되는데, 아들과 딸에게 되기를 원하는 말을 해야 될 것입니다. 이웃에게 긍정적인 말을 하면 ‘빛이 있으라’ 할 때 빛이 생긴 것처럼, 하나님의 은총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언 16장 24절)’라고 했습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잠언 20장 19절)’ 화도 말로 따라옵니다. 말을 통해서 축복이 가기도 하고, 말을 통해서 화가 따라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 많은 사람 친구 삼지 말라고 성경에 말하는 것입니다. 말을 조심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계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누가복음 6장 45절)’ 입을 손수건으로 닦는데 이거는 괜찮아요.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 말이 축복을 싣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병자를 보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병이 나을지어다!”, “믿습니다.”하고 받아들이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왜 말이 무서우냐,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모세가 열두 지파의 열두 스파이를 가나안 땅에 미리 보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탐을 하러 간 다음에, 열두 명을 보냈는데, 열 명이 아주 흉악한 보고를 했습니다. 그 말을 이스라엘 백성이 다 듣고 그 말에 동요를 해서 반항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모세가 계획한 일에 대해서 대항을 하고 반대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진노해서 그 사람들은 다 죽고 말았지만요. 거기 가나안 땅에 곧 들어갈 것을 그 사람들 말 잘못해가지고서 못 들어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했으면 그 말을 가지고 나가야 되지, 자꾸 변화를 시키거나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불과 열 사람의 입에서 나온 불신앙의 말 때문에 열 명의 정탐꾼이 전한 부정적인 보고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퍼져서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은 전염성이 높고 이처럼 무서운 파급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고통을 말을 통해서 받은 사람은 욥입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자식들 다 죽고, 곡식 거둔 것 다 빼앗기고, 몸은 병들고, 아주 불쌍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욥은 부정적인 말을 안 하고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신앙고백을 보면, 비록 자기가 지금은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은, 하나님의 고통이 자기를 금 같은 사람이 되게 만든다고, 고통을 통해서 모든 찌꺼기가 불타버리고 순수한 순금이 되어 하나님께 나간다고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욥은 입에서 좋은 말만하고 원망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장 10절)’ 이와 같이 욥이 말한 것입니다.
불을 통과함으로서 찌꺼기가 불로써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긍정적인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 고단한 땅에 같이 계시는 하나님이 고난을 태우고 순수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이익을 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한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고난 속에서 건져주는 경험을 함으로 말미암아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고난을 통해서 힘있는 신앙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말씀했는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제사가 감사로 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하는 말은 하나님이 한없이 좋아하십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고의 언어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고의 언어가 감사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받으셔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한 수필가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두 곳인데, 한 곳은 천국이요, 한 곳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한 곳은 천국에 하나님의 거처가 있으면, 따로 이 땅에 감사하는 마음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그러니 여러분 감사한 성도들이 이 4부에만 해도 굉장히 많으신데, 거기 다 하나님이 들어가 계시니깐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사를 아끼지 않고 해야 될 것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로새서 3장 17절)’고 바울선생이 말하고 있는건데, 바울선생이 신약성경에 들어와서 제일 일도 많이 하고, 제일 감사를 많이 한 분입니다. 여러분도 일생에 감사를 많이 하십시오. 기억에 남는 축복이 감사를 따라 우리에게 올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린도후서 1장 9절)’ 이것은 바울선생이 환난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깨달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밤이 있어야 낮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밤이 없으면 낮이 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병이 들어봐야 건강이 좋고 건강이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병이 들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병이 있으면 건강이 있습니다. 천당이 있으면 지옥도 있고요.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믿는데 왜 고난이 다가오느냐고 묻습니다. 고난을 당해야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너희는 야훼를 만날 만한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이사야 55장 6절)’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 손을 내밀어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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